[117화] 결정적인 증거
뿌요네 회장은 CNOOC의 텐궈리 회장에게 뒤통수를 맞을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텐궈리 회장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지나칠 정도로 몸을 낮춰 왔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백도어 프로그램을 설치해서 자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니.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영원한 아군도, 적군도 없다는 말을 이번처럼 절실히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그동안 부주의한 자신을 탓해야지.
뿌요네 회장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장대산의 설명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미국과 서방국가들은 화웨이를 정보통신 업계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작업에 돌입해 있습니다.”
“대산 씨가 아니었으면, 큰 낭패를 볼 뻔했네요. 정말 고마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해리슨 상원의원이 입을 열었다.
“CNOOC 측에서 뿌요네 회장을 감시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뿌요네 회장도 그 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게 하나밖에 없었다.
“모잠비크 정부와 공동으로 해상 가스전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년 12월 초에 텐궈리 회장이 해상 가스전 지분 20%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해 왔는데,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루며 답변해 주지 않고 있었는데… 설마 그게…….”
“답변해 주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지분 인수 가격을 너무 후려쳤기 때문입니다.”
CNOOC가 백도어가 설치된 핸드폰을 뿌요네 회장에게 선물한 것치고는 이유가 너무 하찮았다.
분명히 중요한 이유가 더 있는데, 뿌요네 회장이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무엇일지 겨울이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조병석 실장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한 대리,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아, 뿌요네 회장님이 말씀하신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아서요. 그것 때문에 백도어 프로그램을 설치한 휴대폰을 줬다기에는 너무 하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나하고 생각이 같네요.”
“실장님께서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토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없어서 생각나는 게 없어요.”
그때,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모습을 보고 해리슨 상원의원이 말을 걸어왔다.
“한 대리님, 무슨 석연찮은 점이라도 있습니까?”
겨울은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사실 그대로 털어놓았다.
뿌요네 회장도 겨울의 얘기가 일리 있다고 판단하고,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하던 장대산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았다는 듯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뿌요네 회장님, 벤자민 파바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2년 전까지 우리 회사의 부회장으로 재직하다가 비리를 저질러서 쫓겨난 사람입니다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파바르 전 부회장이 지난 12월부터 토탈의 지분을 조금씩 매입하고 있는데, 자금의 출처가 CNOOC로 확인됐습니다.”
“네? 그게 정말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뿌요네 회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파바르 전 부회장은 현재까지 토탈의 지분을 4.8%를 매입한 상태입니다.”
토탈은 1924년에 90개의 은행 및 기업의 투자로 설립된 회사였다.
따라서 다른 재벌 그룹과는 달리 최대주주의 지분이 고작 6.3%에 불과할 정도로 지배 구조가 특이했다.
그런데 파바르 전 부회장이 CNOOC와 손을 잡고 토탈의 지분 4.8%을 확보한 상태라고 한다.
그가 토탈의 지분을 조금만 더 매입하게 되면, 경영권까지 흔들 수 있는 상황.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뿌요네 회장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산 씨의 정보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정말 고마워요.”
“저보다는 조병석 실장님과 한 대리님께 고맙다고 하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뿌요네 회장은 두 사람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잠시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진 뒤, 해리슨 상원의원이 가장 중요한 말을 꺼내 들었다.
“뿌요네 회장, 파바르 전 부회장과 CNOOC의 공격으로부터 토탈의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습니까?”
“적군과 그들의 의도를 알았는데, 경영권을 지키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내려와야지요.”
“그럼… 우리 미국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요?”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SOS를 칠 테니까, 그때 도와주세요.”
겨울은 두 사람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호기심이 생겨 두 사람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송훈석 회장이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대신 나섰다.
“해리슨 상원의원님, 토탈은 프랑스 회사인데 미국에서 신경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토탈은 사업 자금의 대부분을 우리나라 금융기관들로부터 투자받고 있습니다.”
즉, 토탈의 숨통을 미국이 거머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우리 무거운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한겨울 대리로부터 탄자니아와 우간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들어보는 게 어떨까요?”
“네, 좋습니다.”
이에 겨울이 헛기침으로 가볍게 목을 푼 뒤,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뿌요네 회장님,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모두 검증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거짓이 없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알았어요. 얘기해 보세요.”
“CNOOC는 작년 연말에 회장님뿐만 아니라, 탄자니아와 우간다의 대통령님을 포함한 고위 공무원 등에게…….”
이야기를 다 들은 뿌요네 회장은 지난 3년간의 노력이 또다시 물거품이 될 위기에 봉착했음 깨달았다.
탄자니아와 우간다가 중국과 일전을 벌일 예정이라면, 송유관 건설 공사가 무사히 진행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게다가 CNOOC는 두 나라가 중국과 일전을 벌이도록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범인이 아닌가.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송유관 건설 공사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러던 중, 이 자리에 참석한 송훈석 회장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해리슨 상원의원이 CNOOC의 퇴출을 염두에 두고, 송 회장님을 부른 게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침울하던 기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만약에 추측이 맞다면, 더 이상 겨울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한 대리님, 정말 미안한데, 잠시 얘기를 멈춰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연합군이 중국과 일전을 벌일 계획은 내가 알고 있어 봐야 도움 될 것 같지 않아서 그럽니다.”
“네, 알겠습니다.”
뿌요네 회장은 곧장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핵심을 물었다.
“퇴출되는 CNOOC의 빈자리를 대한 그룹이 채운다고 생각하면 됩니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대한 그룹이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조건을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모두 세 가지입니다. 대한 그룹이 CNOOC의 지분을 인수하고, 생산되는 석유 또한 전량 수입하는 조건입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송유관 건설 공사는 수의계약으로 대한 그룹에 넘겨주는 겁니다.”
뿌요네 회장은 CNOOC가 제안한 조건보다 훨씬 좋다고 판단했다.
송유관 건설 공사를 시행할 CSCEC의 시공 능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한 그룹이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해리슨 상원의원님의 제안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합니다만, 결정적인 문제점이 두 개 있습니다.”
“어떤 문제인지 말씀해 보세요.”
“먼저 탄자니아와 우간다 측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탄자니아의 문두야 부통령과 우간다의 마사카 부통령이 어제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두 분께 이미 동의를 받아 놓았기 때문에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역시 철저하시네요.”
“두 번째 문제는 뭡니까?”
“CNOOC가 지분을 매각하지 못하겠다고 버틸 경우에 딱히 강제할 수단이 없다는 겁니다.”
“탄자니아와 우간다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중국의 국영기업들은 모두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뿌요네 회장과 대화를 중단한 해리슨 상원의원은 송훈석 회장에게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송 회장님께서는 제가 드린 제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뿌요네 회장님이 동의하신다면, 저희가 송유관 건설 사업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하시고, CNOOC가 퇴출이 확정되는 시점에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는 좋습니다.”
“뿌요네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리슨 상원의원이 그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글쎄요. 중국 정부가 제 동선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합의서 작성은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오늘 중으로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게 낫겠네요.”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 정명훈 법인장이 조용히 발언권을 요청했다.
“합의서를 작성하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CNOOC의 지분을 대한 그룹이 직접 인수하게 되면, 협상 기간도 길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세하게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CNOOC는 그동안 투입한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높은 가격을 제시할 게 빤합니다. 이에 반해 저희는 적당한 가격에 인수하려고 버틸 겁니다. 그렇게 되면 협상은 장기전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겨울도 한마디 보탰다.
“CNOOC가 지분을 대한 그룹이 아닌 다른 회사에 넘길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 할 겁니다.”
해리슨 상원의원은 정명훈 법인장보다 겨울의 얘기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되면 대한 그룹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니까.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정 법인장님, 해법이 있습니까?”
“토탈 측에서 CNOOC의 지분을 회수해서 저희한테 매각하는 방법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뿌요네 회장님, 가능하겠습니까?”
“그 문제는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까?”
“이제 없는 것 같습니다.”
“합의서는 보안을 고려해 이곳에서 작성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그렇게 합의서는 서동호 실장의 책임하에 작성하는 것으로 결정됐고, 두 명의 회장들은 지쳐 있는 해리슨 상원의원의 휠체어를 밀고 병실로 이동했다.
해리슨 상원의원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피곤해진 몸을 침대에 눕혔다.
남은 두 사람은 침대 근처의 의자에 앉아 못 다한 얘기를 이어 나갔다.
송훈석 회장은 뿌요네 회장에게 궁금하던 점에 대해 물었다.
“기술력이 한참 떨어지는 CSCEC에 송유관 건설 공사를 맡기려고 한 이유를 제가 알 수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뿌요네 회장은 작년 12월의 기억을 더듬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CNOOC의 텐궈리 회장으로부터 CSCEC의 리아오윈 회장을 소개받았다.
셋이서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우연찮게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텐궈리 회장은 송유관 건설공사를 CSCEC에 주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자기가 싫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치자, 상당히 매력적인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 송유관 건설 공사 금액은 국제입찰을 통해서 낙찰된 가격보다 무조건 낮게 책정하겠다.
― 송유관이 통과하는 우간다와 탄자니아 대통령에게 1월말까지 커미션으로 각각 5,000만 달러를 제공해서, 송유관 건설 공사에 대한 잡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처하겠다.
― 송유관 건설 공사 완공 후, 하자가 발생하면 CNOOC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
― CNOOC가 약속한 대로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페널티로 10억 달러를 부담하겠다.
뿌요네 회장은 전혀 손해가 없었기에 즉석에서 동의해 주고, 일사천리로 합의서까지 체결했다.
그는 당시의 일들을 송훈석 회장에게 가감 없이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송유관 건설이 CSCEC로 넘어가게 된 겁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