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결전의 순간
“대산아, 한 대리가 뭐라고 했어?”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해리슨 상원의원이 질문했다.
“송 회장님이 속마음은 밝히지 않았지만, 대화 분위기는 상당히 괜찮았다고 하더군요.”
“흐음, 대한 그룹이 CNOOC의 지분을 인수한다고 봐도 되겠군.”
“아버지, 그건 너무 일찍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닐까요?”
장대산의 우려 섞인 물음에 해리슨 상원의원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송 회장이랑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 봐?”
그는 이 말과 함께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너는 친구가 아파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병문안 한 번을 오지 않네.”
[목소리를 보니 팔팔한 거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내일 오전 9시 30분까지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와.”
[이유가 뭔데?]
“그냥 보고 싶어서.”
[갑자기 무슨… 설마… 진짜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거야?]
상대방의 놀라는 목소리가 장대산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몸 상태가 좋으면 입원했겠어?”
[알았어. 시간 맞춰서 갈게.]
딸깍.
해리슨 상원의원이 전화를 끊자, 장대산이 질문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온다고 하네.”
“송유관 건설공사와 관련해서는 내일 중에 모두 결론이 나겠네요?”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지.”
“아버지, 정명훈 법인장님이 H&J 컨설팅과 관련한 얘기를 송 회장님께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리슨 상원의원은 정명훈 법인장의 신중한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 문제는 내일 중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예정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정 법인장이 먼저 언급하기 전까지 나도 입 다물고 있으라는 거지?”
“네, 아버지.”
“후후, 알았어. 그리고 너도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라.”
즉,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를 서둘러서 설립하라는 의미였다.
“네, 알겠어요.”
“법인 설립과 사무실 등을 임대할 자금은 가지고 있고?”
장대산은 그 문제만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사실 한국에서 법인을 설립하는 데에는 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사무실을 임대하고, 사무 집기 등을 구입하는 부대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가는 편이지.
겨울과 정명훈 법인장은 그런 비용을 간과하고 있었는지, 지분 비율대로 초기 자금을 부담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뫼비우스 띠처럼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아서, 법인 설립 비용 문제는 나중에 별도로 논의하자고 미뤄 놓은 상태였다.
“그게… 조금 복잡하게 꼬여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정 법인장님과 한 대리님이…….”
해리슨 상원의원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법인을 공동으로 설립하면, 지분대로 초기 자금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지사.
다만, 두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 사무실은 엄청나게 초라할 테지만.
“네 생각은 어때?”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나중에 해결할 생각입니다.”
“내가 돈을 보태 줄까?”
“나중에 두 사람이 알게 되면, 더욱 골치 아파질 거 같아요.”
“알았다. 나는 모르는 척 하고 있을게.”
* * *
링링링.
황급히 잠에서 깨어난 겨울은 알람을 끄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알람이 아니라 호영이 걸어 온 전화였다.
혹시나 해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지금은 새벽 3시 30분이었다.
단잠을 방해받았다고 생각하자, 짜증이 만땅으로 치솟아 오른 겨울이었다.
“인간아, 잠 좀 자자.”
[크크, 너도 이제 내 심정을 알겠지?]
“만약 장난전화면, 지금 당장 한국에서 감동의 재회를 할 줄 알아라.”
[어휴 무서워라. 진정해. 조금 전에 은센기 사장하고 통화했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이상한 소리라니?”
[너, 대한 그룹 때려치우고, 컨설팅 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정확하게 열 명이 있었다.
부투야 실장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느낌상 은센기가 부투야 실장과 통화하던 도중에 컨설팅 회사 설립과 관련한 정보를 취득한 모양이었다.
언젠가는 알려질 내용이었기에 일찍 매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어. 그렇게 됐다.”
[우리 회사에 입사하는 것보다 돈벌이가 잘될 거 같아?]
“인간아, 말이야 방구야?”
[하여간 성질 머리는… 그 회사의 주요 업무가 뭔데?]
“간단하게 말하면, 각 나라에서 추진하고 있는 국책 및 민간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협력 회사에 배분하는 역할이야.”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액수의 자금이 필요할 텐데… 그 돈을 조성할 방법은 수립해 놓았고?]
역시 상황 파악이 빠른 호영이답게 핵심을 정확하게 찔러 왔다.
“계열사로 투자회사를 설립할 예정이야. 자금은 미국 정부로부터 투자받기로 했고.”
[얼마를?]
“정호영, 너무 깊숙이 파고드는 거 아니야?”
[쏘리.]
호영이 재빨리 사과하고 물러났다.
“빠르게 사과했으니까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봐 줄게.”
[어휴,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그럼 네가 어제 언급한 네 개의 나라가 컨설팅 회사의 주요 고객이겠네?]
“어, 맞아.”
[앞으로 고객은 점점 늘어나겠고?]
“아무래도 그렇겠지.”
[흐음, 혹시… 그 협력 회사에 우리 SH 무역도 포함시켜 주나 해서… 흐흠…….]
H&J 컨설팅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눈치챈 듯, 묻는 호영의 목소리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당연한 걸 왜 묻는데?”
[하하하! 역시 한겨울! 고맙다, 친구야.]
진심으로 기뻐하는 호영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귓속까지 파고들었다.
“이제 자도 되냐?”
[아, 우리 사장님이 바꿔 달라고 하는데, 통화 한번 할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상호 사장과는 꼭 통화할 필요가 있었다.
“알겠어. 바꿔 줘.”
잠시 후, 중후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겨울아, 오랜만이다.]
“아저씨도 그동안 잘 계셨죠?”
[그럼. 잘 지냈지. 지난번에 홍삼 선물 세트 건 등을 비롯해서 이번의 정수기 건도 정말 고맙다.]
“하하, 뭘요. 아, 네 나라에 수출하는 정수기는 가격보다는 성능에 초점을 맞춰 주세요.”
[염려 마라. 고객이 만족할 수 있는 최상의 제품을 선정해 줄게.]
“알겠습니다.”
[귀국하면 밥 한 끼나 하자꾸나.]
“그렇게 할게요. 아차, 저희 부모님께는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왜?]
“그분들은 대한 그룹이 최고라고 생각하시거든요.”
[하하하, 알았다.]
겨울은 정상호 사장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 * *
“한 대리,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어?”
해리슨 상원의원을 만나러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정명훈 법인장이 물었다.
겨울은 새벽에 정상호 사장, 호영과 통화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으나, 이런저런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 탓에 그의 눈가가 퀭했다.
“새벽에 제 친구 놈이 전화해서 못살게 구는 바람에 잠을 좀 설쳤어요.”
“친구라면… 그 SH 무역의 정호영 씨?”
“네.”
“그 친구가 왜?”
“저희가 컨설팅 회사를 설립한다는 얘기를 은센기 사장한테 들은 거 같더라고요.”
“흐음, 은센기 사장은 누구한테 얘기를 들었을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부투야 실장님이 범인 같아요.”
“그렇군. 은센기 사장한테 입조심은 시켜 놨고?”
“아차차.”
겨울은 재빨리 은센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부사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은센기가 자신의 직위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 부투야 실장이 범인이 확실했다.
“은센기 사장님, 제가 컨설팅 회사를 설립한다는 얘기를 부투야 실장님께 들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지난번에 부투야 실장님이 한 대리님이 컨설팅 회사를 창업하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저런 추리 끝에 때려 맞춘 겁니다.]
“저를 부사장이라고 부른 것도 추측이라는 말인가요?”
[정 법인장님이 급하게 미국으로 출장 간 이유가 뭐겠어요.]
“크흠, 당분간 비밀인 거 아시죠?”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그나저나… 부투야 실장님이 언급한 일감이 정수기라면서요?]
역시 눈치 빠른 은센기가 슬쩍 화제 전환을 시도해 왔다.
겨울도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고 얼른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그래요.”
[우리나라를 제외한 세 나라에는 정수기를 어떻게 수출하실 건가요?]
“법인장님께서 해법을 찾아본다고 하셨어요.”
[그 업무를 저희 H&E 트레이딩이 처리한다고 법인장님께 말씀해 주세요.]
“네? 하실 수 있습니까?”
[알고 보니 루암바 과장이 의외로 인맥이 넓더라고요.]
“알았어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통화해요.”
[네, 한 부사장님.]
겨울은 은센기와의 통화한 내용을 정명훈 법인장에게 전달했다.
“정수기는 H&E 트레이딩이 책임지겠답니다.”
“알았어.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나도 플랜 B를 수립해 놓고 있을게.”
* * *
같은 시각.
해리슨 상원의원은 휠체어에 앉은 채 프랑스 토탈의 장 뿌요네 회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뿌요네 회장의 방문은 해리슨 상원의원이 억지를 부려서 이루어진 측면이 강했다.
“이렇게 나와 있어도 돼?”
“장시간은 안 돼도 두세 시간은 괜찮대.”
“주님이 너를 품으로 부르지 않은 이유가 뭘까?”
“아직은 이 세상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는 뜻 아니겠어?”
“네 소원을 꼭 성취하기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도 나를 도와줘야 할 거야.”
“네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된다는 뜻인가?”
“다른 건 몰라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진행하는 비즈니스에는 도움이 될 거야.”
“아프리카 대륙이 중국의 앞마당으로 변해가는 거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후후, 과연 그렇게 될까?”
뿌요네 회장은 해리슨 상원의원과 대학교 동창으로, 40년 넘게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해리슨 상원의원은 허튼 소리를 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그가 확신에 찬 말을 꺼냈다는 의미는 무언가 확실한 카드를 손에 쥐고 있다는 뜻.
뿌요네 회장은 호기심이 치솟아 올라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봐, 해리슨 상원의원. 설마 중국을 쫓아 버릴 비책을 가지고 있는 거야?”
“후후후,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똑똑.
그때, 노크와 함께 겨울과 장대산이 송훈석 회장 등을 데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송훈석 회장은 해리슨 상원의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60대 노년의 남자를 본 순간, 깜짝 놀랐다.
세계 5대 메이저 석유 회사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토탈의 장 뿌요네 회장.
해리슨 상원의원과 뿌요네 회장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겨울의 얘기가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멈칫거리고 있을 때, 재빨리 장대산이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송 회장님, 이분은 프랑스 토탈의…….”
장대산의 소개로 상견례가 끝나자마자 해리스 상원의원은 사람들을 넓고 쾌적한 보호자 대기실로 안내했다.
그제야 모든 사람들은 단순한 병문안이 아님을 깨달았다.
해리슨 상원의원이 주인 된 자격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뿌요네 회장님은 저하고 대학 동창이고, 송 회장님은 초선의원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온 사이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의 말에 저마다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나눌 대화는 모두 비밀입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십시오. 대산아, 시작해라.”
“네, 아버지.”
짧게 대답한 장대산이 뿌요네 회장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회장님, 화웨이 핸드폰은 언제부터 사용하셨습니까?”
“작년 연말에 CNOOC의 텐궈리 회장으로부터 새해 선물이라면서 받았으니까, 한 달 조금 넘었어요.”
겨울은 뿌요네 회장의 핸드폰에도 백도어가 설치되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만약에 자신의 예감이 맞다면, 오늘의 대화는 어려움 없이 쉽게 풀려 갈 것이 확실했다.
겨울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제가 핸드폰에 어떤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는지 잠깐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나요?”
“회장님의 핸드폰에 절대로 설치되어서는 안 되는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일단 알았어요.”
장대산은 노트북과 핸드폰을 연결해서 한참 동안 살펴본 후,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뿌요네 회장님, 혹시 백도어 프로그램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