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베풀 때는 화끈하게
정명훈 법인장 숙소.
장대산이 해리슨 상원의원을 만나러 자리를 뜬 사이, 겨울과 정명훈 법인장은 다른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대리, 하도진 부지점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정명훈 법인장이 H&J 컨설팅에 하도진 부지점장을 영입할 생각이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쳤다.
하도진 부지점장은 일 욕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활발하고 친화력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입도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의 성격 탓인지 모르겠지만, 현재 부투야 실장을 포함한 VIP들과도 허물없이 교류하고 있었다.
H&J 컨설팅에 적합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가 이직을 결심할지 여부는 모르는 일이었다.
겨울이 이 점을 거론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정명훈 법인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봉 빵빵하지, 근무지도 한국이지, 게다가 직위까지 임원으로 승진시켜 줄 예정인데, 오지 않겠다고 하면 바보가 아닐까?”
“하긴… 법인장님의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한 대리, 내가 하 부지점장을 우리 회사에 영입하려는 이유를 듣고 싶지 않나?”
“듣고 싶습니다.”
“나는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하고만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한 대리도 아프리카 대륙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없을 거고.”
“하 부지점장께 아프리카 대륙을 담당시키겠다는 말씀인가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 생각이야.”
정명훈 법인장이 아프리카 법인에서 허물없이 지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두 명.
추성민 이사와 김종학 지점장,
만약에 정명훈 법인장이 하도진 부지점장을 스카우트하게 되면, 필시 김종학 지점장이 서운해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김 지점장도 때가 되면 영입할 예정이야.”
“언제쯤이요?”
“후후, 나중에 얘기해 줄게.”
드르륵―
그때, 소탁 위에 올려놓은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부투야 실장이었다.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통화를 시작했다.
“네, 실장님.”
[시간 괜찮으면 커피 한잔했으면 하는데, 어떠십니까?]
부투야 실장 일행은 비밀리에 미국을 방문한 상태이기 때문에 오늘 오후에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예정된 상태였다.
아마도 출발하기 전에 작별 인사를 나누자고 하는 것 같았다.
부투야 실장 등에게 H&J 컨설팅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낀 겨울로서는 마침 잘된 일이었다.
“부투야 실장님, 혹시, 다른 분들도 같이 계십니까?”
[왜요? 우리한테 할 말이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부투야 실장의 숙소를 방문한 겨울은 커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가 설립 예정인 컨설팅 회사와 투자 회사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저희는 오전에 협의를 통해서…….”
겨울은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작명 이유와 운영 방안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희 둘은 부사장이라는 직위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두 회사가 번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오코사 실장님.”
잠시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진 후, 부투야 실장이 입을 열었다.
“한 대리님, 어제 중국 대사관에서 저를 감시하고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을 겁니다.”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름 전에 중국 대사가 저를 찾아와서 청탁을 하더군요.”
“어떤 청탁입니까?”
“자기 지인이 정수기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판로가 막혔다면서 우리보고 수입해 달라고 했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상하수도 시설이 열악한 상태이기 때문에 매년 많은 숫자의 정수기를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를 보고 겨울도 콩고 지점에 근무할 당시에 정수기 수입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대한 그룹이 정수기 제조 회사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곧바로 관심을 껐다.
겨울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부투야 실장의 얘기는 계속됐다.
“어차피 우리나라는 정수기가 많이 필요한 상황이라서 흔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 중국 대사가 돌아간 후, 카탈로그와 견적서를 비서실 직원에게 주면서 가격 조사를 시켜 봤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판매하는 가격보다 무려 세 배가 넘는 가격을 제시하더군요.”
“그런 날강도 놈이 중국 대사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네요.”
겨울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며칠 전에 중국 대사를 불러서 심하게 항의했더니만, 중국이 우리나라를 도와준 게 얼마인데 그깟 정수기를 수입해 주지 못하냐면서 거꾸로 성질을 내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정수기 수입은 없던 것으로 하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하하, 속이 시원하네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바통고 대통령님께 이미 정수기를 수입하겠다고 보고했고, 예산까지 확보해 놓은 상태입니다.”
부투야 실장이 은센기에게 언급한, 돈이 되는 일감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일감을 주겠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부투야 실장님, 저희 H&J 컨설팅에 맡겨 주시면, 최소의 이익을 남기고 정수기를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H&J 컨설팅의 첫 비즈니스인데 그럴 수 있나요. 지난번처럼 각종 비용을 제외하고 25% 마진을 책정하고, 결제 조건도 선급금으로 지급하도록 할게요.”
겨울은 그제야 부투야 실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눈치챘다.
정수기를 콩고민주공화국에 수출해서 발생하는 이익을 H&J 컨설팅의 운영 자금으로 사용하라는 의도였다.
고마운 마음에 울컥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색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정수기는 몇 대가 필요한지, 가격대는 어떤지, 기타 세부적인 조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정수기는 1만 대를 수입할 예정이고, 가격대는 각종 비용과 이익을 제외하고 200달러에서 300달러 사이면 적합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전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정수기로 제안해 주시고, 필터는 2년 정도 사용할 수 있도록 넉넉하게 준비해 주세요. 단, 필터값은 별도입니다.”
“납기는 언제까지입니까?”
“준비되는 대로 공급해 주세요.”
“최대한 빨리 은센기 사장을 통해서 제안서를 받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서 오코사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한 대리님, 우리는 같은 조건으로 2만 대를 납품해 주세요.”
“우리 탄자니아는…….”
네 나라의 정수기 주문 수량을 모두 취합한 겨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정중한 자세로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여러분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파트너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도 이하 동문입니다. 나중에 우리나라에 오시면, 내가 거하게 대접해 줄게요.”
“오코사 실장님, 그때 가서 모른 척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요. 이제 해리슨 상원의원을 병문안하고, 본국으로 돌아갑시다.”
* * *
해리슨 상원의원은 루퍼트 장관, 해인스 장관, 장대산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VIP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수송기가 아닌 루퍼트 장관님의 전용기를 제공해 주는 게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그럴 계획이었습니다.”
“해인스 장관님, 투자 회사 설립 건에 대해서 대통령님의 승인은 떨어졌나요?”
“오늘 오전에 최종 승인해 주셨습니다만, 한 가지 조건을 명시하셨습니다.”
“조건이 무엇인지 말씀해 보세요.”
“1년에 한 번은 투자 회사의 경영 상태를 점검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해리슨 상원의원은 시선을 장대산에게 돌리며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강제 규정이 아닌, 저희가 자발적으로 보고하는 형태를 취했으면 좋겠습니다.”
“해인스 장관님은 제 아들놈의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해인스 장관은 어제 오후에 겨울에게 한 방 얻어맞은 기억이 떠올랐다.
만약에 겨울이 이 문제를 꼬투리 삼아서 투자 회사 설립을 백지화시킨다면…….
등줄기를 따라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한 발 양보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대통령님께 장대산 씨의 의견을 전달하겠습니다.”
“해인스 장관님, 투자 회사가 설립되고 본격적인 투자가 집행되기 전까지 제법 시간이 남았으니까, 제가 퇴원해서 대통령님을 만나서 직접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해인스 장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입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부투야 실장을 포함한 VIP들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서들 오십시오.”
해리슨 상원의원이 밝은 표정으로 그들을 반겼다.
“상원의원님,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오코사 실장님, 이번 기회에 중국의 오만한 콧대를 확실하게 꺾어 주십시오.”
“하하, 염려 마십시오.”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사 루퍼트 장관이 입을 열었다.
“나머지 얘기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누는 게 어떨까요?”
“네? 저희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케냐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를 깜짝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문두야 부통령은 루퍼트 장관의 말에 어떤 의도가 숨겨 있는지 단숨에 알아챘다.
자신들이 본국으로 편하게 돌아가도록 국무장관의 전용기를 내주겠다는 뜻이었다.
루퍼트 장관은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 계획에도 없던 스케줄을 급하게 만든 것이고.
그런 생각을 자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오코사 실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루퍼트 장관님, 저희에게 베풀어 준 호의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중국이 개망신을 당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제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오코사 실장의 얼굴에는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다.
* * *
“법인장님, 저희는 오늘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는 틀렸겠죠?”
부투야 실장 등을 배웅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겨울이 질문을 던졌다.
“급한 일이 있어?”
“저희 H&J 컨설팅이 부투야 실장님 등으로부터 첫 번째 일감을 수주했는데, 최대한 빨리 처리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어떤 일감인데?”
“네 개 나라에 정수기 5만 대를 수출하는 건입니다.”
“기타 세부적인 조건들을 얘기해 봐.”
“가격대는 각종 비용을 제외하고…….”
겨울은 부투야 실장 등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한 대리, 콩고민주공화국을 제외하고 세 나라는 어떤 방법으로 정수기를 수출할 거야?”
“이제부터 궁리해 봐야 합니다.”
“세 나라에 정수기를 수출하는 방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한 대리는 정수기를 수급하는 데 집중하라고.”
“그래 주시겠습니까?”
“나도 엄연한 H&J 컨설팅의 주주인데, 밥값은 해야지.”
“하하, 알겠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겨울은 곧바로 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냐?]
“아직 출근하지 않았지?”
[지금 밥 먹는 중이야.]
“작은아버지께도 안부 좀 전해 줘.”
[네가 직접 얘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오늘은 됐고, 다음 달에 회사로 찾아가서 인사드리려고.”
[오호라! 드디어 결심했구나.]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대한 그룹 때려 치고, 우리 회사에 입사하겠다는 얘기 아니야?]
“헛소리 하지 말고, 메모할 준비나 해.”
[부투야 실장님한테 비즈니스 건이 무엇인지 알아냈구나!]
호영이 내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맞아.”
[빨리 얘기해 봐.]
“콩고민주공화국, 탄자니아, 우간다, 나이지리아에 정수기를 모두 5만 대를 수출하는 비즈니스 건이야.”
[야, 정수기 5만 대가 누구네 집 강아지 이름이냐?]
예상한 대로 호영이 시큰둥한 반응을 나타냈다.
“너희 회사는 정수기 수출에 관여하기 싫다는 얘기야?”
[아이고, 빅 바이어님.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들으시면 어떻게 하십니까요?]
“진작 그럴 것이지.”
[수출 조건을 빨리 얘기해 봐.]
“가장 중요한 결제 조건은 계약과 동시에 선급금으로 쏴줄 예정이야. 그리고…….”
겨울은 세부적인 조건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제안서는 최대한 빨리 보내 줘.”
[겨울아, 고맙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