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고마운 사람들
다음 날, 정명훈 법인장은 아침 일찍 자신의 숙소로 겨울과 장대산을 불러들었다.
자기는 어제 오후에 존스 홉킨스 병원의 VIP 회의실에서 투자 회사와 관련한 얘기를 처음 들었다.
그 자리에서 겨울과 장대산에게 투자 회사 설립 배경 등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으나, 저녁 늦게까지 모임이 이어지는 바람에 짬을 내지 못했다.
오늘도 머뭇거리다가는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마자 투자 회사에 대해서 물었다.
“법인장님, 저도 투자 회사에 대한 얘기는 어제 오전에 해리슨 상원의원님께 처음 들었습니다. 저보다는 대산 씨한테 답변을 듣는 게 좋을 듯합니다.”
겨울이 장대산에게 기회를 넘기고 뒤로 물러났다.
“대산 씨, 얘기해 줄 수 있나?”
정명훈 법인장의 질문을 받은 장대산은 해리슨 상원의원과 나눈 대화 내용을 기억에 떠올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법인장님, 투자 회사에 대한 아이디어는 해리슨 상원의원께서 먼저 언급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그러셨겠지.”
“중국이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면, 큰 혼란이 발생할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중국의 공백을 메워 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투자 회사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미국이 직접 나서서 투자하면 되잖아.”
“저도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미국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시면서…….”
정명훈 법인장은 미국의 입장에서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중국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미국은 다른 사람이나 회사에 그 역할을 맡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굴러 들어온 복을 발로 걷어차는 셈.
무조건 미국이 자신들한테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산 씨, 투자 회사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을게.”
“아, 감사합니다.”
“이제 실무적인 얘기를 해 볼까?”
“네, 말씀하십시오.”
“투자 회사가 미국으로부터 얼마를 투자받기로 했나?”
“저희는 1차로 1,000억 달러를 투자받을 예정입니다.”
“뭐야?! 1,000억 달러라고?”
나름대로 강심장이라고 자부하던 정명훈 법인장이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무려 110조 원에 가까운 엄청난 돈을 투자해 주겠다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장대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국가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규모가 크고, 투자한 돈을 회수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저는 1,000억 달러도 부족할 거라 생각합니다.”
“중국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1조 9,00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투입한 것을 감안해 보십시오.”
장대산과 겨울의 말에 정명훈 법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말이 맞는 것 같군. 그건 그렇고 미국이 우리한테 공짜로 돈을 빌려주지는 않겠지?”
“네, 물론입니다. 투자 효과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무이자이고, 그 후부터는 FED(Federal Reserve, 미국 연방 준비 제도)의 금리 수준의 이자를 부담해야 합니다.
현재 FED의 금리는 연 2% 수준.
투자 회사가 연평균 5% 정도 수익을 올린다고 가정하면, 연 50억 달러의 이익이 발생한다.
그중에서 이자와 세금 등을 부담한다고 하더라도 최소 10억 달러는 손에 쥘 수 있다는 뜻.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도 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정명훈 법인장이 자신의 생각에 대해 밝혔더니, 장대산은 생각지도 않은 얘기를 꺼냈다.
“법인장님께서는 미래를 너무 장밋빛 시각으로 보신 것 같습니다.”
“내 말이 틀렸다는 건가?”
“저희가 잘못된 판단으로 투자에 실패해서 원금이라도 떼이게 될 경우, 대미지가 상당히 클 겁니다.”
“음…….”
정명훈 법인장은 팔짱을 끼고 잠겼다.
장대산과 겨울은 그의 생각을 돕기 위해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난 후, 정명훈 법인장이 자세를 풀고 입을 열었다.
“대산 씨, 만약에 불가피한 상황으로 돈을 떼이게 되는 경우는 어떻게 되나?”
“미국 정부와 공동 조사를 통해서 절차상에 아무 하자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채무를 면제받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나저나 투자 회사를 운영하려면 인력이 필요한데, 어떤 방법으로 채용할 건가?”
“저희가 요청하는 인력을 미국 정부에서 파견시켜 주기로 했고, 자체적으로 채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 파견 오는 사람들의 소속은 어떻게 되나?”
“저희 회사 소속입니다.”
장대산의 말에 정명훈 법인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산 씨, 그들이 미국을 위해서 스파이 행위는 하지 않겠지?”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다만, 제가 철저하게 통제하겠습니다.”
“알았어. 투자 회사와 관련된 얘기는 나중에 논의하고, 모기업인 컨설팅 회사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고. 한 대리, 컨설팅 회사의 이름은 결정했나?”
“H&JJ 컨설팅이 어떻겠습니까?”
정명훈 법인장은 JJ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눈치챘다.
정명훈과 장대산의 성의 첫 글자인 J라는 사실을.
자기는 겨울과 장대산이 공동으로 설립하는 컨설팅 회사의 전문 경영인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지, 엄밀히 말하면 창립 멤버는 아니었다.
그러니 J를 추가하는 것은 이치상 맞지 않았다.
“한 대리, 내가 하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네, 말씀하십시오.”
“컨설팅 회사는 J를 하나 삭제하고, 투자 회사는 H&J Investment로 정하자고.”
“그러시다면 법인장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H&J 컨설팅의 지분은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나?”
겨울은 지분 문제만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자기는 장대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같은 비율로 지분을 소유하자고 제안했으나, 장대산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리 설득하고, 저리 설득해도 돌부처처럼 요지부동인 장대산.
결국 장대산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제가 51%, 대산 씨가 29%, 법인장님이 20%를 소유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10%를 소유할 테니까, 두 사람이 내 지분 10%를 가지고 가는 것으로 해.”
“저는 29% 지분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합니다.”
“아이고.”
30분 가까이 입씨름한 끝에 겨울이 61%의 지분을 소유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H&J Investment도 같은 비율로 지분을 소유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CEO는 애초 약속대로 정명훈 법인장이 맡기로 했고, 겨울이 H&J 컨설팅을, 장대산이 H&J Investment을 책임지는 것으로 결정했다.
두 회사의 본사는 서울에 두기로 결정했고, 실무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장대산이 책임지기로 했다.
“법인장님, H&J 컨설팅 인원은 어떻게 충원하죠?”
정명훈 법인장은 생각해 놓은 방안이 있었지만, 아직 공개할 때가 아니었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
“퇴사 시점은 언제로 해야 합니까?”
“송유관 건설 공사에 대한 방향이 결정되는 시점에 퇴사하는 것으로 하자고.”
“네, 법인장님.”
윙윙―
그때, 호영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겨울이 회의 중이라고 매너 문자를 보내려는 순간, 정명훈 법인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누구야?”
“작년 11월에 저한테 홍삼 선물 세트를 보내 준 친구입니다.”
“받아 봐.”
“나중에 받아도 됩니다.”
“급한 일일 수도 있잖아.”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겨울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호영 사원, 무슨 일이 있습니까?”
[통화하기 어렵나 보구나?]
눈치 하나는 기막히게 빠른 호영이었다.
“조금 그런 면이 있습니다. 왜 전화했는데요?”
[방금 전에 은센기 사장과 통화했는데, 부투야 실장님이 반군들한테 납치됐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대.]
부투야 실장이 미국에 출장 온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콩고민주공화국의 비밀 정보국이 퍼트린 소문이었다.
“헛소문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빅 바이어님, 내가 신경 쓰이니까 그래. 반말로 통화하자.]
“알았어.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겸사겸사.]
“또 뭐가 있는데?”
[부투야 실장님이 언급한 비즈니스 건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 건은 아직 알아보지 못했어.”
[빨리 알아봐라. 이러다가 굶어 죽겠다.]
“지난달에 부투야 실장님께 발주받은 것부터 선적시키고 나서 그런 얘기를 해라.”
[인간아, 너는 김만 먹고 사냐?]
“바쁘니까 끊는다.”
뚝.
겨울이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한 대리, 부투야 실장님이 정호영 씨한테 무엇을 발주했는데?”
겨울은 아차 했다.
바통고 대통령에게 생일 선물로 홍삼 선물 세트 등을 공급하는 건은 비밀로 한 상태였는데, 자신의 부주의한 말 한 마디로 인해서 모든 것이 탄로 나게 되어 버렸으니.
그러나 대한 그룹을 퇴사하기로 결정한 이상,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홍삼, 우황청심원, 김 선물 세트입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얘기해 줄 수 있나?”
“바통고 대통령님이 제가 테슬라와 관련된 고급 정보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한 대가로…….”
겨울은 당시의 일들을 사실에 입각해서 보고했다.
단, 이익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겸업 금지 규정 때문에 어쩔 수없이 은센기 사장을 통해서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SH무역의 규모는 큰 편인가?”
“연간 매출액 기준으로 1조가 넘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참에 SH무역을 우리 H&J 컨설팅의 파트너로 선정하는 건 어때?”
“대한 그룹에서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내가 비록 대한 그룹 출신이기는 하지만, 모든 일감을 한곳에 몰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
“H&J 컨설팅이 설립되면, 정식으로 미팅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부투야 실장의 숙소에 연합군 수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부투야 실장님, 저희를 왜 보자고 했습니까?”
마지막으로 도착한 문두야 부통령이 비어 있는 소파에 앉으며 질문을 던졌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씀을 곡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네, 말씀해 보세요.”
“우리는 개인 및 국가적으로 한 대리님한테 많은 도움을 받은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희도 그 점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한 대리님이 대한 그룹에서 퇴사해서 컨설팅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제법 돈이 많이 들어갈 것이라 예상합니다.”
“우리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서 보태자는 말씀입니까?”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백 퍼센트의 확률로 거절할 겁니다.”
문두야 부통령은 부투야 실장의 의도를 알아챘다.
자신들이 겨울에게 일감을 주고, 여기서 발생하는 이익을 바탕으로 컨설팅 회사가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만들자는 얘기였다.
“부투야 실장님, 좋은 일감이 있습니까?”
“저는 요즘 붐이 일고 있는 정수기를 생각해 놓고 있는데,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 봤으면 합니다.”
마사카 부통령은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결정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겨울에게 정수기를 발주할 수 없었다.
“부투야 실장님, 한 대리님이 컨설팅 회사를 언제쯤 설립할 것 같습니까?”
“아무리 늦어도 3월에는 설립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가 한 대리님한테 정수기를 발주하면 언제쯤 받을 수 있을까요?”
“마사카 부통령님께서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겠는데, 납기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계약과 동시에 정수기 수입 금액을 선급금으로 지급할 생각이니까요.”
“네? 정수기를 납품받기 전에요?”
“마사카 부통령님은 한 대리님을 믿지 못하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아이고. 부투야 실장님, 저한테 왜 그러시는 겁니까?”
부투야 실장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마사카 부통령이 꼬리를 바닥까지 내렸다.
“정수기 구입은 한 대리님을 도와주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투야 실장님, 제가 오해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마사카 부통령과 대화를 종료한 부투야 실장은 오코사 실장과 문두야 부통령에게도 어렵지 않게 동의를 얻어 냈다.
부투야 실장을 제외한 세 사람은 대통령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겨울을 돕기 위한 계획을 보고했고, 즉시 컨펌을 받았다.
“이제 한겨울 대리님을 불러 볼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