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보이지 않는 힘
아무리 비즈니스 석이라고 해도, 20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겨울이 찌뿌듯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사이, 승무원의 기내 방송이 시작됐다.
[저희는 잠시 후,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에…….]
“아이고, 이제 살겠다.”
겨울은 미국 입국 심사가 까다롭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미국 입국 심사 때 주로 묻는 질문을 추리고, 모범 답변을 달달달 외워 놓고 있었다.
그런데 입국 심사관은 겨울에게 건네받은 여권과 미국 출입 카드를 힐끗 훑어보더니, 아무 질문 없이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 주었다.
허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순간일 뿐.
입국 심사관에게 재빨리 여권을 받아 들고, 수하물을 찾으러 출발했다.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 문을 열고 나가니, 예상대로 장대산이 손을 흔들며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한 대리님, 미국 방문을 환영합니다.”
“대산 씨, 거의 1년 만인가요?”
“네.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요?”
“생각보다 미국 입국 심사를 빨리 받아서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글쎄, 입국 심사관이…….”
대산은 보이지 않는 힘이 움직였다고 판단했으나,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봐도 이상하네요. 여기는 혼잡하니까, 얼른 공항을 벗어납시다.”
“네, 그러죠.”
대산의 차에 오르자마자, 겨울은 해리슨 상원의원의 상태부터 물었다.
“아직 거동은 불편하시지만,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어요.”
“천만다행이네요.”
“한 대리님, 저희 양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겨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있는 척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당연히 궁금하죠.”
“저희 양아버지의 이름은 토머스 해리슨 상원의원입니다.”
“네? 정말요?”
어색한 겨울의 반응.
장대산은 겨울이 자신의 양아버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알고 있을 정도로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였기 때문에.
따라서 겨울이 미국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을 검색해 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겨울은 브라이언 박사와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지 않나.
겨울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 질문을 해 본 것인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평소보다 어색한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제 양아버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계셨군요?”
“하하, 눈치채셨어요?”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무사히 끝났다는 전화를 램버트 교수님께 받았을 때부터요.”
“어쩐지…….”
장대산이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끝말을 흐렸다.
“대산 씨는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인가요?”
“저는 대한 그룹에 사표 내고 이곳에 온 겁니다.”
장대산이 대한 그룹에 취업을 결정한 이유를 알고 있는 겨울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얘기였다.
“대산 씨, 친모를 찾으셨나 보네요?”
“네. 이미 돌아가셨지만요.”
“아…….”
생각보다 장대산은 덤덤하게 지난날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제 어머니는 저를 낳고 미국으로 입양 보낸 후, 힘들게 사시다가 10년 전에 암에 걸려서 돌아가셨다고 해요.”
“어머니 가족이나 이복형제들은 없고요?”
“네. 그저 독신으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그건…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러게요. 후우…….”
체념한 듯 내뱉는 장대산의 말이 겨울에게는 더욱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겨울은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 대화 주제를 변경했다.
“그러고 보니 대한 그룹에서 사표를 받아 줬나요?”
“네. 지난 토요일에 통보받았어요.”
“앞으로 미국에 살겠네요?”
“아니요.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면,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미국에 좋은 취직자리도 많은데, 굳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지금은 얘기해 줄 수 없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겨울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동안 장대산과 친분을 맺어 온 가장 큰 원동력은 입사 동기라는 점 때문이었다.
대한 그룹을 떠난 지금으로서는 원동력이 모두 사라진 셈.
당분간은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하겠지만, 어느 순간에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질 수 있는 관계가 입사 동기였다.
그런데 장대산은 자기와 인연을 계속 유지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겨 오고 있었다.
“대산 씨, 한국에서 다시 취업하려고요?”
“아직은 아닌데, 곧 그렇게 될 거 같아요.”
“대산 씨의 스펙이면 모두들 얼씨구나 모셔 갈 겁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가 모시게 될 보스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고, 발신자는 브라이언 박사였다.
겨울은 장대산에게 양해를 구하고, 얼른 그와 통화를 시작했다.
“네, 브라이언 박사님.”
[미국에 온다는 얘기를 들어서 전화했어요.]
“이미 미국에 도착했고, 해리슨 상원의원께서 입원해 있는 존스 홉킨스 병원으로 이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몇 시쯤에 도착할 것 같은가요?]
“내비게이션에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오세요.]
겨울은 ‘최대한 천천히’이라는 말이 묘하게 귀에 거슬렸다.
느낌상 브라이언 박사가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하려는 것 같았다.
겨울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살짝 찔러 봤다.
“오, 아직 준비가 다 안 됐나 보네요?”
[어… 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대산 씨가 박사님의 계획을 미리 알려 줬습니다.”
[이상하네요? 장대산 씨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흐흐, 확실히 뭔가 있나 보군요? 저를 위해서 뭔가 준비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까요?”
[아이고.]
뚝.
브라이언 박사가 겨울에게 말렸음을 눈치채고 얼른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런 겨울을 향해 장대산이 질문했다.
“그동안 정말 궁금했는데, 브라이언 박사님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된 거예요?”
겨울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다.
장대산과의 대화 소재가 거의 소진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상당히 긴데, 상관없을까요?”
“그럼요. 전혀 상관없어요.”
“작년 11월 초에 있던 일입니다.”
겨울은 당시의 사건을 시간 순으로 자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민감하다고 생각되는 얘기는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가볍게 넘어갔다.
“…해서 브라이언 박사님은 꼭 필요할 때 저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거든요.”
“한 대리님은 그 대가를 제 양아버지를 살려 달라는 것에 사용했다는 말인가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반드시 꼭 갚을게요.”
“제가 지난주에 말하지 않았나요?”
“고작 테슬라 주식 895주로요?”
장대산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지난달에 큰돈을 벌을 기회가 생겨서 테슬라 주식을 추가로 1만 105주를 매입할 수 있었어요.”
“수익률은 어느 정도 되나요?”
“어제까지 누적 12%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금액으로 계산하면, 17만 달러정도 되고요.”
“하여간 축하드립니다.”
“대산 씨는 저보다 수익률이 훨씬 높지 않아요?”
“저도 테슬라 주식을 매수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수익률이 그다지 높지 않아요.”
“테슬라 주식을 몇 주나 가지고 있는데요?”
“14만 주요.”
“네?!”
겨울이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테슬라 주식 14만주는 무려 2,000만 달러에 육박하는 엄청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장대산의 신중한 성격상 한 종목의 주식에 몰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의 금융자산은 2,000만 달러보다 훨씬 많다는 뜻이었다.
겨울의 깜짝 놀라는 표정을 본 장대산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놀랄 것 없어요. 한 대리님은 앞으로 저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예정이잖아요.”
“네? 제가요?”
겨울이 또다시 놀라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다.
“제 아버지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대리님을 보자고 했을까요?”
“뭔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나요?”
“아마도요.”
그렇게 둘이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주고받는 사이, 차는 목적지인 존스 홉킨스 병원에 도착했다.
“대산 씨,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 병원 안으로 들어갑시다.”
“네? 왜요?”
“깜짝 파티는 깜짝 파티로 응수하는 법입니다.”
“저는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그런 사실도 모르고 브라이언 박사는 자신의 의료팀과 함께 병원 출입문 로비에서 겨울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도착 예정 시간이 10분 가까이 지났는데도 겨울과 장대산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다 판단한 브라이언 박사는 램버트 교수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차가 막혀서 늦는 게 아닐까요?”
“아니에요. 한겨울 씨의 성격상 무언가 꿍꿍이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요.”
그때,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쓴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브라이언 박사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누구……?”
“브라이언 박사님, 접니다.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겨울이 마스크와 모자를 벗으며 정중한 자세로 인사했다.
“한겨울 씨, 깜짝 놀랐잖아요.”
“박사님, 서프라이즈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하하, 이번에는 제가 졌네요. 우리 악수나 한번 합시다.”
겨울은 브라이언 박사와 램버트 교수부터 안젤리카 간호사까지 차례로 돌아가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브라이언 박사가 겨울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해리슨 상원의원을 만나러 올라가 봅시다.”
“네, 박사님.”
겨울은 지금까지 VIP 병실만 세 번째 경험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입원한 대한종합병원의 VIP 병실, 부투야 실장이 입원한 킨샤사 국립병원 VIP 병실, 마지막으로 해리슨 상원의원이 입원해 있는 존스 홉킨스 병원 VIP 병실까지.
세 곳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VIP 병실을 꼽으라면, 당연히 이곳이었다.
겨울이 VIP 병실 크기와 화려함에 압도당하고 있는 사이, 램버트 교수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한겨울 씨, 얼른 들어갑시다.”
“아차, 죄송합니다.”
램버트 교수에게 사과한 겨울은 재빨리 병상에 앉아 있는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다가갔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도착해 있던 장대산이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말을 건넸다.
“아버지, 제 절친인 한겨울 대리입니다.”
“한겨울 대리님,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토머스 해리슨…….”
해리슨 상원의원은 겨울에게 한 손을 내밀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조심스럽게 악수를 건넨 그는 익살스럽게 물었다.
“한겨울 대리님, 병문안 선물로 가지고 온 게 무언인가요?”
정명훈 법인장이 어제 퇴근하기 전에 건네준, 회사에서 준비한 홍삼 선물 세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선물 세트를 겨울에게 건넸다.
작년 11월에 자기가 반강제로 떠넘긴 홍삼 선물 세트라는 사실을 알아봤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짧게 생각을 끝낸 겨울은 해리슨 상원의원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제가 상사로 모시고 있는 분이 상원의원님께 가져다주라고 한 홍삼 선물 세트입니다.”
“직장 상사께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 주세요.”
“네, 상원의원님. 참고로 홍삼의 주요 효능 중에 하나가 기력 회복입니다. 정기적으로 복용하시면, 탁월한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만, 간혹 체질에 따라서 몸에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시고 복용하셔야 할 겁니다.”
“홍삼은 예전에도 복용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문제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조금 남아 있던 기력을 모두 소진했는지 해리슨 상원의원이 피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 본격적인 얘기는 내일 오전에 하는 게 어떨까요?”
“네, 알겠습니다.”
해리슨 상원의원은 브라이언 박사에게 당부했다.
“박사님, 제 대신 한 대리님의 환영식을 화끈하게 치러 주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비용은 저한테 청구해 주시고요.”
“비용이 조금 과하게 나올 텐데, 상관없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오늘 밤에 누구는 죽었네.”
브라이언 박사 뒤에 서 있던 램버트 교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