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 성공 신화-104화 (104/328)

[104화] 키다리 아저씨

당연히 문제가 있었다.

FTA 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겨울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명훈 법인장의 지시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가 자신의 직속 상사였으니까.

“네. 아무 문제없습니다.”

“휴가가 아닌 출장으로 처리해.”

정명훈 법인장의 말을 들은 추성민 이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장은 회사 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비용은 회사에서 부담한다.

겨울이 지인의 아버지를 병문안하러 가는데, 회사의 비용을 사용하는 것은 나중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매사에 합리적인 정명훈 법인장이 회사의 규정에 어긋난 지시를 내리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성민 이사는 발언권을 요청하고 질문을 던졌다.

“법인장님, 나중에 감사받을 때 문제되지 않을까요?”

“추 이사, 탄자니아 마지리 대통령 등의 핸드폰에 백도어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이 장대산 씨야. 그래도 문제가 될까?”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이제 됐지?”

“네, 물론입니다.”

추성민 이사의 확답을 받은 정명훈 법인장은 겨울에게 시선을 옮기며 지시했다.

“한 대리는 형식상으로도 출장 계획서를 작성해서 고 팀장한테 제출하고.”

“네, 알겠습니다.”

“미국 출장 기간 동안에 내가 컨펌해 줘야 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네, 법인장님.”

“추 이사만 남고, 모두 나가서 일 봐.”

모두들 밖으로 나가자, 정명훈 법인장은 추성민 이사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한 대리의 미국 출장으로 인해서, 나를 포함한 우리 회사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법인장님, 제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말입니까?”

“후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정명훈 법인장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 * *

법인장실에서 나온 겨울은 미국 워싱턴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장대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대리님, 허락받았습니까?]

“네. 오늘밤 자정 무렵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공항에 나가 봐야 하니까, 비행기 티켓을 저한테 보내 주세요.]

“제가 병원까지 알아서 찾아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병원에는 어머니와 누나들이 있어서 한두 시간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괜찮아요.]

“알겠어요. 그럼 보내 줄게요.”

겨울이 통화를 끝내자, 옆에 앉아 있던 가쿠타 과장이 말을 걸어왔다.

“한 대리님, 어디 가세요?”

“미국에 볼일이 있어서 다녀오려고요.”

“현재 진행 중인 업무와 미결 업무는 저한테 넘겨주세요.”

겨울은 간단하게 출장 계획서를 작성해서 고영규 팀장에게 전송하고, 업무 인계서를 작성했다.

한 시간 가까이 들여서 업무 인계서 작성을 끝내고, 출력을 마친 겨울은 가쿠타 과장에게 말을 건넸다.

“회의실에서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회의실.

겨울에게 업무 인계서를 건네받은 가쿠타 과장은 꼼꼼하게 읽어 보고 궁금한 점에 대해서 물었다.

“한 대리님, 알제리 건은 뭡니까?”

“아, 그거요? 어젯밤에 알제리 정보국이…….”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과 부투야 실장에게 취득한 정보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상황이 급변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부투야 실장님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셔야 할 겁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핸드폰은 24시간 동안 켜 놓고 있을 테니까, 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주세요.”

“지금 당장 급한 일이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지난주에 남아공 정부에서 저희 가족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줬는데, 2월 중에 이사해도 될까요?”

겨울은 가쿠타 과장이 어떤 의도로 질문했는지 감 잡았지만, 지금 당장 명쾌한 답변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거취에 따라서 그의 거취도 결정될 예정이기 때문에.

“가쿠타 과장님,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는 게 어떨까요?”

사실 가쿠타 과장이 겨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대한 그룹을 퇴사할 생각이 있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겨울의 대답으로 미루어 보니, 퇴사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이 분명했다.

“아이고, 아쉬워라.”

“뭐가요?”

“은센기 사장하고 내기할 때 금액을 10달러로 정한 것이 아쉽다는 말입니다.”

지난 1월 말에 겨울이 3개월 안에 퇴사하는 조건으로 세 사람이 건 내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때 가쿠타 과장은 겨울이 퇴사할 거라는 은센기 쪽에 10달러를 걸었다.

“가쿠타 과장님, 퇴사 시기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소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다면서요?”

“아이고.”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 대리님을 쫓아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순간, 겨울의 머릿속에 큰 문제가 하나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쿠타 과장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 봐야 하지만,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투야 실장님께는 미국 출장 사실을 알려 주는 게 어떨까요?”

겨울은 평소 가쿠타 과장의 세밀한 일처리에 놀랄 때가 많았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미국 출장을 준비한답시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그가 꼼꼼하게 짚어 주었다.

“아차, 제가 깜빡했네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이제 업무 인계서는 폐기하면 되죠?”

“그렇게 하세요.”

미국 출장을 준비하기 위해 일찍 퇴근해서 짐을 꾸려 놓고, 겨울은 부투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미국 출장 사실을 밝혔다.

“…해서 주말쯤 복귀할 예정입니다.”

[연합군들에게 핸드폰을 24시간 열어놓은 상태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면 되겠죠?]

겨울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자기는 부투야 실장이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의 아버지를 병문안 간다고 살짝 거짓말을 섞어서 전달했을 뿐인데.

하지만 그는 자기가 누구를 병문안하러 가는지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로 얘기하고 있었다.

겨울은 그가 알고 있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브라이언 박사님과 통화했어요.]

“부투야 실장님, 제가 해리슨 상원의원을 병문안하러 가는 사실을 다른 분들도 알고 계십니까?”

[아직은 바통고 대통령님과 저만 알고 있습니다.]

“당분간 비밀로 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요. 그 대신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 말씀해 보세요.”

[해리슨 상원의원님을 만나면…….]

겨울은 부투야 실장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연합군 뒤에 미국이 버티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다가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문제가 선결이 되지 않는 이상, 부투야 실장이 원하는 것은 이뤄질 수가 없다.

겨울은 그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질문부터 던졌다.

“부투야 실장님, 미국 대통령이 해리슨 상원의원의 부탁을 들어줄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죠?]

“미국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해리슨 상원의원이 최대 정적 중에 한 명이잖아요.”

[한 대리님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어요. 미국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서로 으르렁대고 싸우던 나라들과도 과감하게 손을 잡는 나라입니다. 미국 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신의 치적을 쌓을 수 좋은 기회인데, 해리슨 상원의원의 제안을 거절할까요?]

“하긴… 실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들이 제안한 것을 과감하게 요구하세요.]

“실장님을 믿고 화끈하게 일을 저질러 보겠습니다.”

[하하하, 좋은 자세입니다.]

겨울은 이번 기회에 또 다른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부투야 실장님,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을까요?”

[당연히 요구하겠죠.]

“제가 어떻게 대처하면 될까요?”

[우리가 제시하는 두 가지 조건을 먼저 수용하면, 원하는 반대급부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세요.]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보세요.”

[미국과의 대화 창구는 반드시 한 대리님을 통해야 하고, 우리한테 일방적으로 불리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말아 달라고요.]

겨울은 ‘반드시’라는 단어가 귀에 거슬렸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컨설팅 회사를 설립하려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꼭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낼 안건이 있으면, 저한테 전화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우리들의 요구를 전달할 때 한 대리님의 몫도 반드시 챙기도록 하세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하하, 이래도 대한 그룹을 계속 다닐 생각입니까?]

겨울은 그제야 부투야 실장의 유도 심문에 완벽하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장님, 아직 결정된 게 아니니까, 소문내지 말아 주세요.”

[저만 알고 있을 테니까, 염려 마세요.]

“고맙습니다.”

[출장 잘 다녀오세요.]

부투야 실장과 통화를 끝낸 겨울은 캐리어를 끌고, 남아공의 관문인 요하네스버그 오알 탐보 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항공사 창구로 가서 수하물을 부치고, 비행기 탑승권을 건네받는 과정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자기는 분명히 이코노미 클래스를 예약했는데, 발급받은 탑승권은 비즈니스 좌석이었다.

겨울은 항공사 직원에게 탑승권을 되돌려 주며, 다시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손님, 저희는 정상적으로 탑승권을 발행했습니다. 즐거운 여행되십시오.”

탑승권을 되돌려 받은 겨울은 자기에게 이런 도움을 준 키다리 아저씨가 누구인지 추리에 들어갔다.

자기가 미국에 출장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제법 많았지만, 이코노미 클래스를 예약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장대산.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20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 비행기 티켓을 업그레이드해 준 것이리라.

고마운 마음에 그에게 전화할까 했다가, 출국 수속을 끝내고 전화하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무사히 출국 수속을 끝낸 겨울은 출발까지 남은 시간 동안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에서 보내기로 했다.

처음 발을 디딘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깔끔하고 한적하게 쉴 수 있는 공간에 가볍게 먹을 것이 갖춰진 공간이었다.

커피와 주전부리를 챙긴 겨울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장대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한 대리님.]

“대산 씨, 저한테 이렇게 편의를 제공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제가 어떤 편의를 제공했다는 거죠?]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대산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반응을 보였다.

“에이, 왜 그러세요. 대산 씨가 제 비행기 티켓을 업그레이드 해 줬잖아요.”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키다리 아저씨는 대산 씨가 아닌가? 그렇다면 누구지?’

머릿속에 의문을 한가득 품은 겨울은 장대산에게 공항에서 일어난 일을 털어놓았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럼 대산 씨의 아버지께서 저한테 편의를 제공해 주신 걸까요?”

[제 아버지는 한 대리님이 미국에 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떤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오는지는 모르고 있어요.]

“그래요? 그럼 누구지?”

[어쨌든 내일 도착하거든 공항에서 봅시다.]

장대산과 통화를 끝낸 겨울은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조사해 볼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을 알아내서 뭐할 건데?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해리슨 상원의원과 어떤 대화를 나눌지 생각이나 해 보자.”

하지만 겨울은 곧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해리슨 상원과의 대화가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 빤했기 때문에.

겨울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미국 워싱턴으로 출발하는 비행기의 탑승을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 * *

겨울이 탄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확인한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나?]

“아무 문제없이 출발했습니다.”

[비행기 티켓 업그레이드와 관련해서 한겨울 씨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했고, 장대산 씨한테 전화해서 물어봤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지는 않았고?]

“네, 그렇습니다.”

[앞으로 바빠질 것 같으니까, 한겨울 씨가 남아공에 돌아갈 때까지 휴가를 즐기도록 해.]

“감사합니다.”

[나중에 보자고.]

의문의 남자와 통화를 끝낸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공항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흙수저 성공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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