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밑져야 본전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겨울은 두 가지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두 가지 계획 모두 완벽하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기껏 힘들게 맺어 놓은 인맥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막말로 얘기해서 대통령이나 부통령을 찾아가서 라면이나 김을 수입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둘째 계획은 인맥은 최대한 활용할 수는 있지만, 시작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점이 문제였다.
정명훈 법인장은 문제점에 대한 해결 방안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으며 질문에 대답했다.
“절친의 작은 아버지가 CEO로 계시는 무역 회사에 입사하는 것과 컨설팅 회사를 창업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역 회사의 이름을 내가 알 수 있을까?”
“SH무역이라고 합니다.”
“아주 큰 회사는 아닌가 보네?”
즉, 모른다는 얘기였다.
“무역 회사 중에서는 제법 규모가 크다고 들었습니다.”
“알았어. 이제 회사 창업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봐.”
“제가 컨설팅 회사를 창업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겨울의 계획을 듣고 있던 정명훈 법인장은 2% 부족한 점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도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기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결정이 아쉽지만은 않았다.
어차피 몇 년 후에는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다가올 것이기에.
정명훈 법인장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겨울의 설명이 끝났다.
“…해서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첫 번째 계획은 한 대리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니까, 우리 두 번째 계획을 추진하는 게 어떤가?”
순간, 겨울은 귀를 의심했다.
정명훈 법인장도 자기와 함께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있다는 뜻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겨울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하고 같이 사업하는 게 싫어?”
“그것은 아니지만, 법인장님께서 회사를 그만둘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임시 직원의 줄인 말이 임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정명훈 법인장은 다 식어 버린 커피를 마저 마시고,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거의 모든 회사는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어. 즉,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리가 없다는 뜻이지. 내가 회사를 다닌다면, 앞으로 몇 년을 더 다니겠나?”
“법인장님은 능력이 있어서 사장까지 승진하신 후, 퇴임하실 것 같습니다.”
“칭찬은 고마운데,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고 있어. 아마도 길어야 사오 년일 거야. 퇴임하면 나이가 예순도 안 되는데, 집에서 놀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기회에 제2의 인생을 조금 일찍 시작하겠다는 것뿐이야.”
“회사를 그만두시는 것이 아쉽지 않으세요?”
“평생을 몸 바쳐 일해 온 회사인데, 아쉽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한 대리가 컨설팅 회사를 창업하면, 뒷마무리는 깔끔하게 정리해 줄 자신은 있어.”
사실 겨울도 이 점을 제일 고민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여서 일감을 수주해 오면, 뒷정리를 해 줄 인물이 필요했다.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정명훈 법인장이 제격이었다.
“법인장님께서 컨설팅 회사에 합류해 주신다면, 저는 쌍수 들고 환영하겠습니다.”
“내가 합류한다고 가정하고, 궁금한 점에 대해서 물어볼 테니까, 대답해 줄 수 있나?”
“네, 말씀하십시오.”
“컨설팅 회사는 어디에 설립할 생각인가?”
“제가 처음에 발을 디딘 콩고민주공화국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정명훈 법인장은 끝말을 흐린 후, 생각에 잠겼다.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과 대화를 나누면서 회사를 창업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대한 그룹에 남아서 피해를 주는 것보다 밖에서 마음의 빚을 갚는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창업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지만, 정명훈 법인장이 충분히 메워 줄 것이라 생각했다.
제법 시간이 많이 흐른 후.
이윽고 생각을 끝냈는지 정명훈 법인장이 입을 열었다.
“한 대리, 컨설팅 회사는 우리나라에 설립하도록 하지.”
의외의 결정이었다.
겨울은 즉시 그 이유를 물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굳이 하나를 꼽으라면 카운터 파트너들이 한국에 있기 때문이야.”
“파트너들이라면… 법인장님은 저희가 수주한 일감을 대한 그룹에 몰아 줄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까?”
“당연히 대한 그룹에 많은 일감을 주겠지만, 대한 그룹과 관련 없는 일감을 수주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건가?”
“법인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컨설팅 회사를 설립한다고 가정할 경우에 직원들이 필요할 텐데, 생각해 놓은 사람은 있나?”
“현재는 가쿠타 과장밖에 없습니다.”
“알았어. 이 문제는 내가 고민해 볼게.”
“네, 법인장님.”
큰 그림의 합의를 도출해 낸 두 사람은 컨설팅 회사 설립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 집중했다.
“한 대리, 컨설팅 회사 설립 건은 언제든 백지화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왜요?”
“회장님께서 한 대리를 임원으로 승진시켜 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에이, 설마요.”
겨울의 부정적인 반응에 정명훈 법인장은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내가 만약에 회장님이라면, 한 대리가 수주해 놓은 일감이 아까워서라도 임원으로 승진시켜 주겠다.”
“그 일감들은 제가 아니라 대한 그룹이 수주한 거잖아요.”
“한 대리가 VIP들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 일감들이 우리한테 왔겠어? 그리고 아직 계약서에 사인한 게 하나라도 있나?”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자기가 대한 그룹을 퇴사한다면, VIP들이 마음을 바꿔먹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컨설팅 회사 설립 건은 당분간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하자고.”
윙윙―
그때, 소탁 위에 올려놓은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떠 있는 번호를 확인하니 장대산이었다.
느낌상 매너콜을 보고 전화를 걸어온 것 같았다.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장대산 씨,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네에, 한 대리님도요…….]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
겨울은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대산 씨, 무슨 일 있어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려고… 크흑.]
겨울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고, 장대산은 말을 잇지 못하고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겨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일밖에 없었다.
잠시 후, 푹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추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요.]
“대산 씨,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어제 저녁에 제 아버지가 레스토랑에서 지인들과 식사하고 있는데, 괴한이 갑자기 안으로 들어와서 총기를 난사했어요.]
“아…….”
겨울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가슴과 복부 등에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서 수술을 시작했는데, 총알들이 장기에 여러 발이 박혀 있다는 이유로 수술을 포기한 상태입니다.]
병원에서 수술을 포기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죽음.
겨울은 절망에 빠져 있는 장대산의 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아버지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현재 혼수상태에 빠져 있고, 병원 측에서는 길어야 하루 정도라고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야겠네요.”
[…위로해 줘서 고맙습니다.]
장대산과 통화를 끝내는 순간, 겨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 번 시도라도 해 보자.’
결심을 굳힌 겨울은 급하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이게 누구입니까?]
“브라이언 박사님, 작년 11월에 저와 하신 약속을 이행하실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한겨울 씨, 어떤 상황인지 빨리 애기해 보세요.]
브라이언 박사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제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동기의 아버지가 총상을 입어서 생명이 위독한 상항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이 대한민국입니까?]
“아닙니다. 미국입니다.”
[환자의 구체적인 상태가 어떤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가슴과 복부에 여러 발의 총알을…….”
겨울은 장대산에게 들은 얘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환자가 미국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보다 그 동기한테 브라이언 박사님의 번호를 알려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나한테 전화해 달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겨울은 즉시, 브라이언 박사의 전화번호를 장대산한테 문자로 보내 주고 전화를 걸었다.
[네, 한 대리님…….]
“대산 씨, 문자 받았죠?”
[받았습니다만… 누구의 번호입니까?]
“흉부외과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코비 브라이언 박사님의 전화번호입니다.”
[한 대리님이 브라이언 박사님을 어떻게 알고 계세요?]
“대산 씨도 그분을 알고 계십니까?”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는 것으로 하고, 빨리 전화해 보세요.”
[한 대리님… 정말 고마워요.]
“고맙다는 얘기는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나서 듣는 것으로 할게요.”
뚝.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명훈 법인장이 말을 걸어왔다.
“한 대리, 혹시 장대산이라는 사람이 화웨이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해 준 그 사람인가?”
“네, 그렇습니다.”
“아이고, 부디 무사히 쾌차하셔야 할 텐데…….”
“저도 법인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브라이언 박사님께서 잘해 주시기를 기도해야겠네.”
윙윙―
제법 시간이 지난 후,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가 전화를 걸어왔는지 알고 있었기에 겨울은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박사님.”
[한겨울 씨, 지금 의료팀을 소집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늦어도 다섯 시간 후에는 수술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겨울은 문득 이상했다.
아프리카에 있는 브라이언 박사가 미국까지 날아가는 데 적어도 열다섯 시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지금 휴식 기간을 맞이해서 미국에 들어와 있어요. 그리고 방금 전에 환자의 CT와 MRI 사진을 받아 봤는데, 운이 따라 준다면 생명을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천만다행이네요.”
[최선을 다해서 환자의 생명을 구해 보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박사님.”
[수술 끝나고 전화합시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브라이언 박사와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장대산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브라이언 박사에게 들은 얘기를 가지고 대화를 나눈 뒤에 통화를 종료했다.
이를 지켜보던 정명훈 법인장이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 질문을 던져 왔다.
“한 대리, 장대산 씨 양아버지의 직업이 뭐야?”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선출직 공무원이라고 했습니다.”
“선출직 공무원이면, 상당히 고위직에 계신 분이겠네?”
장대산이 화웨이와 관련한 극비 자료를 손쉽게 입수한 것에 대한 추측이리라.
겨울도 그와 마찬가지로 장대산이 양아버지로부터 극비 자료를 얻은 것으로 추측했으나, 다른 가능성도 주목했다.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장대산 씨가 어떤 경로로 극비 자료를 입수했을까?”
“장대산 씨는 MIT 공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으음, 해킹으로 극비 자료를 입수할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나는 장대산 씨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으로 할게.”
“네, 알겠습니다.”
“호텔에 돌아가 봐야 할 일 없을 거니까, 점심은 먹고 가라고.”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겨울은 그때부터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일만 반복했다.
“이제 수술을 시작했겠네. 제발 수술이 잘 끝났으면…….”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수술을 시작한 지 아홉 시간이 지난 자정까지도 핸드폰은 아무 미동도 없었다.
수술이 잘못됐을 가능성 때문에 장대산에게 쉽게 전화할 수도 없었다.
그저 브라이언 박사가 전화를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는 겨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