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새로운 아이템
겨울이 퇴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황열, 뎅기열 등의 질병을 옮기는 모기들을 박멸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모기 박멸을 위해서 장기 투숙하고 있는 호텔의 객실 내부에 모기약을 흠뻑 뿌려 준 후, 샤워를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밖으로 나와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와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와는 반드시 통화해야 했다.
겨울은 얼른 전화를 걸었다.
[네, 한 대리님.]
“은센기 사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오늘 오후에 사업자 등록증이 발급됐습니다.]
겨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은센기가 서류 준비 과정을 거쳐서 ‘H&E 트레이딩’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자를 신청한 것이 지난 화요일이었다.
아프리카라는 특성상, 사업자 등록증을 발급받는 데 적어도 보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센기는 불과 4일 만에 사업자 등록증을 발급받았다고 한다.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부투야 실장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 주셔서 예상보다 빨리 사업자 등록증이 발급됐습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랐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최고 실세인 대통령 비서실장이 손수 사업자 등록을 챙기는데, 서두르지 않을 공무원들이 누가 있겠는가.
아마도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을 것이다.
“축하합니다, 은센기 사장님.”
[내일 우리나라로 넘어오세요.]
“뜬금없이 왜요?”
[부투야 실장님이 계약서를 작성하러 대통령관저로 들어오랍니다.]
“H&E 트레이딩의 대표는 은센기 사장님이잖아요?”
[바통고 대통령님께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납품하는 업무는 한 대리님 때문에 시작된 거잖아요.]
은센기의 말이 지극히 옳았다.
바통고 대통령의 제안을 그때 거절했더라면, 두 품목을 은센기가 납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겨울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작은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일이 토요일이기 때문에 주말을 이용해서 콩고민주공화국에 다녀와도 큰 문제없을 것 같았다.
“제가 몇 시까지 가야 하나요?”
[오후 2시까지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럼 시간 맞춰서 콩고민주공화국에 가도록 할게요.”
[출발하기 전에 전화하시는 거 잊지 말고요.]
“그야 물론이죠.”
은센기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겨울은 또 한 명의 관련자인 가쿠타 과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이 사실을 전달하고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빠르게 일을 처리한 겨울은 휴식을 취하려고 침대에 몸을 던졌지만, 곧바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인간아, 잠 좀 자자.]
잠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한국은 지금 몇 시냐?”
[설마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건 아니겠지?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바로 남아공으로 달려가서 응징한다, 진짜로…….]
“크흠… 정호영 사원, 빅 바이어를 너무 홀대하는 거 아니야?”
[아이고오… 빅 바이어님, 제발 부탁인데 제가 잠 좀 잘 수 있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들어 봐.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한테 할 일이 없어서 전화했겠냐.”
[뭐야? 설마… 벌써 사업자 등록증이 발급된 거야?]
호영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귓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래. 오늘 오후에 발급됐다고 하더라.”
[오오, 축하한다.]
“내일 계약서를 체결할 예정이니까, 최종 견적서를 나한테 보내 줘.”
[지난주에 보내 줬잖아.]
“네가 보내 준 견적서를 내가 동의했나?”
[지금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네가 보낸 견적서에서 1%만 깎아 줘.”
[이 치사한 놈아, 1%면 내 연봉보다 많은 금액이라는 거 몰라?]
당연히 호영이 강하게 반발했다.
겨울은 인터넷을 통해서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의 가격을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물론, 호영이 보내온 견적 가격도 매우 저렴했지만, 충분히 가격 인하의 요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너희 회사 마진을 줄이지 말고, 공급 회사한테 가격을 깎아 달라고 해 봐.”
[인간아, 내가 가격을 깎느라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내가 방법을 알려 줄까?”
[얘기해 봐.]
여전히 시큰둥한 목소리.
“선급금을 주겠다고 하면, 1% 이상 추가 DC가 불가능할까?”
[음… 오, 가능할 수도 있겠네.]
“이제 자라.”
뚝.
이번에는 겨울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윙―
곧바로 호영에게 문자가 수신되었다.
― 이 매정한 녀석아. 잘 자라는 인사도 없냐.
― 굿나잇 인사는 네 여친한테 받으시고요.
― 아무튼 아이디어 땡큐.
― 나중에 나 한국에 들어가면 밥이나 사 줘.
― 설날에는 오냐?
겨울과 호영은 한참 동안 문자를 주고받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공항에서 가쿠타 과장을 만난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카트 위에 놓여 있는 이 커다란 박스는 뭡니까?”
가쿠타 과장은 어젯밤에 은센기와 통화하던 도중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리고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그 결과물이 카트 위에 놓여 있는 커다란 박스였다.
“한국의 특산품 중에 하나인 김입니다.”
“김은 왜요?”
“부투야 실장님께 선물하려고요.”
콩고민주공화국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음식은 푸푸(Fufu)로 옥수수나 카사바 등의 곡식이나 농작물 가루를 반죽해 익힌 것이었다.
김은 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한테 어울리는 반찬이지, 푸푸를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한테 추천할 만한 음식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이곳에서 김 가격은 매우 비싼 편이었다.
이런 시큰둥한 겨울의 반응에 가쿠타 과장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꺼냈다.
“한 대리님, 우리나라 상류층 사람들 중에서 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들에게 김은 그다지 비싼 반찬도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김은 어디서 구했는데요?”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대형 마트들을 돌아다니며 싹쓸이했습니다.”
“김을 구입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저한테 알려 주세요. 제가 대신 지불할게요.”
“음, 이번에는 제가 부투야 실장님께 선물하는 것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쿠타 과장의 연봉은 수당을 제외하고 1만 달러 내외.
즉, 한 달에 830달러 수준이었다.
그는 월급의 대부분을 콩고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가족들한테 보내 주기 때문에 항상 돈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구입한 김 가격은 가뿐히 100달러는 넘어 보였다.
그런 이유로 겨울이 비용을 대신 부담하려고 했으나,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대리님,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속담을 알고 계시죠?”
겨울은 가쿠타 과장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오늘 오후에 바통고 대통령에게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하면, 통관비용 등을 포함해서 선급금으로 500만 달러를 넘게 받게 될 예정이었다.
이 중에서 제품값 400만 달러를 제하면 자신들의 이익은 모두 80만 달러.
그중 가쿠타 과장에게 배정된 몫은 10%인 8만 달러였다.
그는 조언만 하는 대가로 8만 달러라는 거액의 배당을 받아가는 것에 대해서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알았어요. 부투야 실장님께는 가쿠타 과장님이 선물하는 것으로 하죠.”
“고마워요.”
“이제 출국 수속을 밟으러 갑시다.”
* * *
콩고민주공화국 은질리 국제공항.
은센기는 가쿠타 과장이 밀고 오는 카트 위에 놓여 있는 커다란 박스에 특히 시선이 갔다.
재빨리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커다란 박스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가쿠타 과장님, 이게 뭡니까?”
“차 안에서 자세하게 얘기해 드릴게요.”
“네, 알았습니다.”
커다란 박스를 택시 트렁크에 넣으려고 집어 드는 순간, 은센기는 적잖이 놀랐다.
빈 박스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크기에 비해서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다.
박스를 트렁크에 넣고, 운전석에 앉은 은센기는 고개를 뒤로 돌려 가쿠타 과장에게 물었다.
“설마 빈 박스는 아니겠지요?”
“당연히 아닙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한번 알아맞혀 보세요.”
“막연하게 그러지 마시고, 힌트를 하나만 주세요.”
“하하, 알았어요. 대한민국의 특산품 중에 하나입니다.”
은센기는 박스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시동을 걸고 택시를 출발시켰다.
윙윙―
잠시 후,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겨울은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즉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 사원, 벌써 협상이 끝난 거야?”
[당연한 말씀을.]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됐냐?”
[흐흐흐, 알면서 왜 그래?]
호영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봐서 생각보다 많은 DC를 받은 것 같았다.
“얼마나 DC를 받았는데 그렇게 웃어?”
[홍삼은 3%, 우황청심원은 2.5%.]
즉, 11만 달러를 추가 DC를 받았다는 뜻이었다.
겨울은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거리가 생겨났다.
“너무 가격을 후려친 거 아니야?”
[너는 톱다운(Top―Down)방식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냐? 아니지, 너같이 무식한 돌머리한테는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속담이 더 이해하기 쉽겠네.]
겨울은 호영이 언급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제조업자들이 SH무역에서 선급금으로 받은 돈을 원재료 공급자들에게 먼저 지급하는 조건으로 가격 인하를 이끌어 냈다는 뜻이다.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뜻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흐음, H&E 트레이딩하고 거래를 끊고 싶어서 그런 막말을 내뱉는 거겠지?”
[아이고, 빅 바이어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크크,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봐주마.”
[그나저나 최종 견적서는 어떻게 만들어서 보내 줄까?]
“내가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니까, 반반 어때?”
[콜.]
호영은 숨도 안 쉬고 동의했다.
그렇게 겨울은 호영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은센기에게 말을 걸었다.
“은센기 사장님, SH무역의 정호영 사장한테서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의 견적서를 받았습니까?”
“그럼요. 부투야 실장님께 전달해서 진즉에 컨펌까지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사실 겨울은 호영에게 받은 최종 견적서를 토대로 부투야 실장과 계약을 체결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행력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빠른 은센기가 이미 부투야 실장과 가격 결정까지 끝내 놓은 상태라고 했다.
물론, 오늘 부투야 실장을 만난 자리에서 최종 견적서를 제시하며 계약 금액을 수정할 수도 있지만, 반면에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겨울은 두 사람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제가 방금 전에 SH무역의 정호영 씨와…….”
바통고 대통령에게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공급함으로 인해서 은센기가 얻는 이익은 모두 16만 달러.
이 중에서 사무실 임대비용 및 기타 등등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최하 13만 달러가 순이익이었다.
그런데 겨울은 추가로 5만 5,000달러의 이익이 발생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손에 떨어지는 이익은 모두 1만 1,000달러
문제는 겨울이 대통령에게 두 제품의 가격을 인하해 줄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자기도 사람인지라, 애써 DC받은 이 금액이 아까워도 너무 아까웠다.
“한 대리님, 우리나라에서 돈이 제일 많은 사람이 바통고 대통령님입니다.”
“은센기 사장님의 얘기가 맞습니다. 그분이 5만 5,000달러를 DC해 준다고 해서 크게 기뻐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가격을 추가 DC해 주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좋습니다. 두 분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대리님.”
“저도요.”
두 사람의 진심이 묻어나는 인사에 들떠 있던 차 안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겨울은 뻘쭘한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를 느끼고 재빨리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그래서 은센기 사장님, 이 박스에 뭐가 들어 있는지 생각은 해 냈나요?”
“아, 이제 생각해 보려고요.”
“힌트는 검정색입니다.”
은센기는 겨울의 힌트를 듣자마자, 정답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김.
8년 전에 한국에 축구하러 갔을 때, 반찬으로 나온 김을 먹어 본 적이 있었다.
검정색 해초 위에 고소한 냄새가 일품인 기름이 발라져 있었고, 그 위에 소금이 살짝 뿌려져 있는 것이 정말로 맛있었다.
그래서 귀국길에 면세점에서 김을 잔뜩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는데, 예상대로 엄청나게 좋은 호응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구하기 힘든 김을 겨울은 한 박스나 가지고 온 것이었다.
“한 대리님, 김을 누구한테 선물하려고요?”
“어라? 김을 알고 있었어요?”
“그럼요. 제가 8년 전에 한국에 갔을 때 먹어 본 적이 있거든요.”
은센기의 말에 겨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김을 부투야 실장님께 선물하면 좋아하실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