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시작하기 전에 승자가 결정된 싸움
“우리나라에 대해서 한 대리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겨울에게 호영과의 통화 내용을 전해들은 가쿠타 과장이 입을 열었다.
“그게 뭔가요?”
“한 대리님 말씀처럼 일반인이 사업자 등록을 신청하면 최소 한 달 넘게 걸리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돈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신청하면, 일주일 만에 사업자 등록증이 발급되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겨울도 그 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나마 부패가 적다고 하는 대한민국도 그런 일이 종종 발생하는데, 부패가 만연한 콩고민주공화국은 말해서 뭐 하겠는가.
하지만 가쿠타 과장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가쿠타 과장님, 은센기 씨는… 그으, 아무래도 돈이나 권력이 없잖아요?”
“네? 대리님이 착각하시는 거 같은데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부투야 비서실장님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어, 하긴… 그렇겠네요.”
겨울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심바 과장은 호기심이 치솟아 올라왔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주한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공급하는 업무는 콩고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그런데 두 사람은 은센기라는 사람이 공급하는 것을 기정사실화 해 놓고 있었다.
밀려오는 호기심을 해소하지 못하면 밤잠을 설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대리님, 은센기 씨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심바 과장의 질문을 받은 겨울은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조수석에 심바 과장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겨울이 적당한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려고 두뇌를 풀가동하는 사이, 가쿠타 과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심바 과장, 작년 11월에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지?”
“한 대리님이 콩고민주공화국의 VIP들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네? 반이 틀리다니요?”
“당시에 VIP들에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한 대리님뿐만 아니라 은센기라는 사람도 있었어.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에서 주는 선물들은 본의 아니게 대한 그룹이 모두 받게 되었지. 그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 부투야 실장님이…….”
가쿠타 과장은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가며 한 편의 단편소설을 써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던 심바 과장은 일련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보답의 일환으로, 부투야 실장이 은센기에게 바통고 대통령의 생신 선물 납품권을 준 것이리라.
주저하고 있는 은센기를 위해 겨울이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가 납품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
그렇다면 콩고 지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 공급 업무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었다.
심바 과장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가쿠타 과장의 설명이 모두 끝이 났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여기저기 떠벌여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겨울은 묘하게 가라앉은 차 안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전환했다.
“심바 과장님, 탄자니아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있을까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정보가 떠돌아다니고 있기는 합니다.”
“어떤 정보인가요.”
“우리나라 핸드폰 시장의 빅 쓰리인 보다콤, 에어텔, 티고(Tigo)가 대규모로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을 하기 위한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흐음,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모바일 결제 시장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라고 들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은 넓은 국토 면적에 비해서 인구 밀도가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은행은 대도시에만 집중적으로 개설되었고, 작은 도시에는 지점조차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했다.
금융 업무가 필요한 사람들의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 이동통신 회사들은 몇 년 전부터 모바일 뱅킹 업무를 특히 더 집중해서 육성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 시장은 매년 엄청난 속도로 규모가 커지는 중이었다.
탄자니아의 경우에는 세 회사의 모바일 결제 시장의 점유율이 거의 비슷비슷한 상태였다.
따라서 세 회사는 신규 고객을 유치하고 선도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에 힘을 쏟고 있었다.
생각을 끝낸 겨울이 심바 과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세 회사가 언제쯤 입찰을 진행할 것 같나요?”
“아무리 늦어도 상반기 중에는 진행할 것 같습니다.”
“입찰 공고가 뜨면 최대한 빨리 저희한테 알려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가쿠타 과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대리님, 나이지리아 지점에서 들은 얘기인데, 그 나라에 진출해 있는 MTN(아프리카 최대의 이동통신 회사)도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나이지리아는 세계 7위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고, GDP도 아프리카에서 제일 높은 27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제력과 인구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핸드폰 사용자들도 상당히 많을 뿐만 아니라, 4대 이동통신 회사들이 가입자 유치를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동통신 회사들 중에서 MTN이 40%, 글로바컴(Globacom)이 26%, 에어텔이 25%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선도 기업인 MTN이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기지국 증설에 나선다면, 후발 기업들도 맞대응하고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고영규 팀장님도 알고 계시겠죠?”
“아마도 그럴 겁니다.”
“올해는 중국의 화웨이와 맞붙어 싸울 일이 엄청나게 많을 것 같네요.”
“작년처럼 오만한 화웨이 놈들을 박살냈으면 좋겠네요.”
“우리한테 한 방 얻어맞았기 때문에 올해는 만만치 않을 거예요.”
“흐흐, 그럼에도 우리가 놈들을 박살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하하하!”
* * *
탄자니아 정부 청사 부통령 집무실에서는 문두야 부통령과 우간다의 마사카 부통령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두야 부통령님, 저를 급하게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콩고민주공화국의 부투야 실장에게 들은 얘기가 없습니까?”
“오늘 귀인을 만나게 될 거라는 얘기 말입니까?”
문두야 부통령은 아무 정보도 없이 이곳을 방문한 마사카 부통령에게 겨울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제공할 필요를 느꼈다.
괜히 마사카 부통령이 겨울에게 무례를 범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마사카 부통령님이 만나게 될 귀인은 한국의 대한 그룹 직원입니다.”
“대한 그룹이라…….”
마사카 부통령이 끝말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문두야 부통령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고 있었지만,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카사 부통령이 생각을 끝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한 그룹 직원이 저희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가 송유관 공사 입찰 때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런… 저는 그 직원이 애처롭게 느껴지기까지 하는군요.”
“네? 애처롭다니요?”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는 이미 토탈의 쟝 뿌요네 회장과 CNOOC의 텐궈리 회장 사이에 밀약을 체결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이건 또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송유관 건설 공사는 토탈과 CNOOC가 입찰을 주관하고 있지만, 송유관이 자국의 영토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탄자니아도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두 회사는 자국에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라고 하는 것이었다.
비록 자국이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한 지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와 우간다는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과 관련해서 아무런 의견을 제시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토탈과 CNOOC는 저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척은 하겠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우간다는 발언권을 행사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문두야 부통령님, 참으로 딱하십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나라가 송유관 건설 공사와 발언권을 행사하지 않는 조건으로 CNOOC 측에서 우리나라의 요웨리 루군다 대통령님께 거액의 뇌물을 주기로 했습니다. 탄자니아의 카심 마자리 대통령님도 CNOOC 측으로부터 똑같은 제안을 받지 않았을까요?”
“하아…….”
돌이킬 수 없는 일임을 자각한 순간, 문두야 부통령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마사카 부통령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문두야 부통령님, CNOOC 측에서 저희에게도 자그마한 선물을 준다고 하니까, 더 이상 문제를 야기하지 마십시다.”
“…그래야지, 별수 있습니까.”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겨울이 도착했음을 보고했다.
“어서 안으로 모시고, 킬리만자로 커피를 내오도록 하세요.”
“네, 부통령님.”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겨울을 마주한 마사카 부통령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자신들에게 로비하러 온 사람치고는 나이가 어려도 너무 어려 보였기 때문에.
‘뭐야? 대한 그룹의 후계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문두야 부통령이 말을 걸어왔다.
“마사카 부통령님,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한 그룹의 한겨울 씨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우간다에서 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는 음발리 마사카라고 합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악수하자는 의미로 겨울에게 두툼한 오른손을 내밀었다.
겨울 역시 오른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동행한 가쿠타 과장과 심바 과장을 두 사람에게 인사시켰다.
잠시 후, 비서가 서빙한 커피를 마시면서, 가벼운 대화를 나무며 대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한겨울 씨, 가지고 오신 게 뭡니까?”
“부피가 큰 것은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홍삼 선물 세트이고, 작은 것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입니다. 간단하게 두 특산품의 효능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홍삼은 기력이 떨어진…….”
겨울은 약 1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 가며 홍삼과 우황첨심원의 효능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모든 약이 그렇듯 몸에 맞지 않으면 백해무익합니다. 복용하시기 전에 반드시 주치의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한겨울 씨, 이렇게 귀한 선물을 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겨울이 겸연쩍다는 듯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문두야 부통령이 세워놓은 계획은 겨울과 저녁 식사를 끝내고, 술자리 장소에서 부투야 실장이 언급한 선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사카 부통령에게서 이미 송유관 건설 공사가 결론이 났다는 정보를 취득했기 때문에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한겨울 씨, 이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식사를 하는 게 어떨까요?”
“저희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한겨울 씨가 부투야 실장에게 우리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만, 미안하게도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부투야 실장님이 문두야 부통령님께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제가 알 수 있습니까?”
“한겨울 씨가 우리한테 근사한 선물을 선사할 거라고 하면서, 송유관 건설 공사를 대한 그룹이 수주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 달라고 하더군요.”
겨울은 부투야 실장이 오버해도 한참 오버했다고 판단했다.
문두야 부통령의 오해를 풀어 주지 않으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겨울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두 분께 선물을 건네준 대가로 저희 대한 그룹이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저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있겠죠?”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에 탄자니아와 우간다가 직접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우리를 만나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닌 평평한 운동장에서 싸우기 위함입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