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비싼 만큼 제 값을 한다
“헉헉…….”
겨울과 가쿠타 과장은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행 비행기가 계류되어 있는 A12번 게이트로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사실 두 사람은 넉넉한 시간을 남겨 두고 은실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선물을 가지고 오기로 한 김종학 지점장의 부인이 타고 있는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상황이 다급하게 꼬여 버렸다.
어찌어찌해서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건네받기는 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두 사람은 무사히 탄자니아행 비행기에 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력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헉헉…….”
A12번 게이트로 달려간 두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광판에 Delay(연착)이라는 단어가 표시되어 있었고, 승객들은 의자에 앉아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죽어라 달려왔으니.
가쿠타 과장도 허탈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울에게 말을 건넸다.
“헉헉… 괜히 죽어라… 뛰어왔네요…….”
“후우, 항공사에서 수화물을 받아줄 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후우, 미처 그 생각을 못했네요.”
한숨 돌린 겨울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찍은 사진을 호영에게 전송해 주고, 간단하게 통화를 마쳤다.
예정된 탑승 시간보다 30분 정도 지난 후, 퍼스트 클래스부터 탑승을 시작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겨울은 약속대로 문두야 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출발을 알리고,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곧바로 지친 몸을 의자에 뉘였다.
[이제 저희 비행기는 탄자니아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겨울은 승무원의 기내 방송을 듣고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팔을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켠 후, 옆자리의 가쿠타 과장을 보고 말을 건넸다.
“언제 일어났어요?”
“방금 전에요.”
겨울은 오늘 오전에 은센기와 통화한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과장님, 은센기 씨가 많이 걱정하고 있더군요. 잘 가르쳐 주세요.”
겨울이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바통고 대통령에게 납품함으로 인해서 얻는 이익은 70∼80만 달러 사이.
이 중에서 가쿠타 과장의 몫은 10%인 7∼8만 달러로 무려 8년치 연봉과 엇비슷한 금액이었다.
가쿠타 과장은 은센기한테 무역 실무를 조언해 주고 이렇게 많은 돈을 받는 것이 내심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강구해 낸 것이 있었다.
최근까지 무역 회사에 다니던 대학 후배에게 은센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해 주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당연히 인건비로 매월 500달러라는 적지 않은 돈을 지급해 주기로 약속해 줬다.
짧은 생각을 끝낸 가쿠타 과장은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 대리님, 똘똘한 제 대학 후배 하나를 은센기 씨한테 붙여 놨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겨울은 가쿠타 과장의 똑소리 나는 업무처리 스타일을 알고 있었기에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럼 제가 은센기 씨에게 따로 얘기하지 않아도 되죠?”
“에이, 그런 하찮은 일들은 보통 아랫사람들이 수행하는 겁니다.”
“으음… 과장님의 직위가 저보다 높은데, 아랫사람이라니요.”
“큼큼, 바통고 대통령님한테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납품하는 업무는 보스인 한 대리님이 하실 거잖아요?”
“하하, 그런 이야기였군요?”
“저는 한 대리님이 어디를 가시든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닐 테니까, 버릴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제가 다른 나라에 발령받아도요?”
“법인장님이 한 대리님을 다른 나라에 보낼 것 같으세요? 아마 한국으로 가실 때도 데리고 갈 거예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겨울이 그런 날이 올까 생각하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 * *
오늘은 마가 낀 날이 확실했다.
예정 시간보다 30분 늦게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한 두 사람은 문두야 부통령과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신속하게 움직여서 입국 수속을 끝마쳤다.
이제 수화물을 찾고 입국장 밖으로 나가서 심바 과장을 만나는 일만 남겨 두었는데…….
그런데 웬걸.
두 사람은 캐리어는 무사히 찾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가 담겨 있는 박스가 보이지 않았다.
겨울은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즉시 공항 관계자에게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항 관계자가 여기저기 확인해 본 결과,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가 담겨 있는 박스는 엉뚱한 곳에 가 있었다.
“네? 세관이라고요?”
“혹시… 박스에 마약 같은 것이 들어 있는 게 아닙니까?”
방금 전까지 약간이나마 친절한 모습을 보이던 공항 관계자의 목소리가 180도 돌변했다.
겨울은 그의 태도 변화가 어처구니없었지만, 실랑이를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빨리 수화물을 찾아 문두야 부통령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세관 사무실이 어디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당신은 눈도 없습니까?”
순간,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가쿠타 과장이 참으라는 의미로 신호를 보내왔다.
겨울도 공항 관계자와 언쟁을 벌여 봐야 손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심호흡을 하고 숨을 골랐다.
“세관 사무실은 우리가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그러시든지.”
세관 사무실을 찾아간 겨울은 박스가 압류당한 이유를 물었으나, 세관원으로부터 선물 세트를 가지고 입국한 목적이 의심스럽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겨울은 선물을 주기 위함이라고 설득했으나, 그들은 아예 귀를 닫고 듣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의 처분에 불만을 제기하면 강제로 출국시켜 버리겠다는 등의 협박을 늘어놓았다.
겨울은 이들이 자신들에게 협박을 가하고 있는 이유를 눈치챘다.
홍삼과 우황청심원의 가치를 알아채고 박스를 강탈할 의도임을.
겨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사용하는 것이 꺼림칙했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겨울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두야 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겨울 씨, 무사히 도착했습니까?]
“부통령님, 도착은 아까 했는데, 아직 공항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부통령님께 드릴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세관에 압수당한 상태입니다.”
[내 이놈의 새끼들을!]
뚝.
문두야 부통령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여러 명의 직원들과 함께 숨을 헐떡거리며 세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겨울을 발견하고 달려오더니,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사과했다.
“헉헉… 무례를 저질러서 정말… 죄송합니다.”
겨울은 세관원들에게 당한 모욕을 생각하면 사무실을 들어 엎고도 남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문제를 삼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부디…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
“문두야 부통령님이 저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압수당한 물품을 빨리 되돌려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탄자니아 세관으로부터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가 들어 있는 박스를 되돌려 받은 겨울과 가쿠타 과장은 잔뜩 쫄아 있는 세관 직원들한테 눈빛을 한 번 쏘아 주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액땜했다고 생각해야죠, 뭐.”
“과장님도 액땜이라는 단어를 알고 계세요?”
“제가 올해로 대한 그룹 입사 11년 차라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되죠. 저 한국말도 곧잘 합니다.”
“맞아, 그랬죠.”
겨울은 문두야 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부통령님께서 신경 써 주셔서 선물 상자를 무사히 되찾았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후우… 한겨울 씨, 세관 직원들의 무례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이미 공항 책임자에게 사과를 충분히 받았습니다. 굳이 부통령님께서 사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두야 부통령은 그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을 물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문제.
“그나저나 제가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저녁 6시 30분까지 정부 청사의 부통령 집무실로 오시면 됩니다.]
“부통령님, 죄송합니다만… 급하게 오는 바람에 정장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하하,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입는 것보다는 편안한 옷을 입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
이 말은, 즉 겨울이 하도진 부지점장에게 빌려 입은 양복이 작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저어… 혹시 부투야 실장님께 들었습니까?”
[20살 먹은 청년이 10살짜리 꼬마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해 보였답니다.]
“아이고…….”
겨울이 창피한 마음에 과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아무래도 문두야 부통령은 겨울을 달래 주기 위해 이렇게 말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 배려가 고맙게 느껴진 겨울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부통령님께서 이렇게 신경 써 주시는데, 화가 안 풀릴 리가 없죠. 감사합니다.”
[하하하, 그럼 나중에 봅시다.]
“아차. 부통령님, 저희 회사 직원 두 명을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입국장에서 마중 나온 심바 과장을 만난 겨울과 가쿠타 과장은 시간이 별로 없는 관계로 호텔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정부 청사로 향했다.
“심바 과장님, 운전기사한테 정부 청사로 가자고 해 주세요. 그곳에서 문두야 부통령님을 만날 예정입니다.”
“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심바 과장이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겨울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가쿠타 과장님께 아무런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네에… 지금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러자 가쿠타 과장이 긴장을 풀라는 뜻으로 가볍게 말을 건넸다.
“크흠, 심바 과장. 그럼 회의록은 누가 작성할 건데?”
“어어… 꼭 회의록을 작성해야 하는 겁니까?”
“그럼 나보고 작성하라는 말이야?”
“가쿠타 과장님도 참석하시는 겁니까?”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나?”
“부통령님을 만나러 가는 데… 차림새가 이래도 될까요?”
“문두야 부통령님께 양해를 구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윙윙―
차 안이 한바탕 소란으로 정신이 없을 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실행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호영이 걸어온 전화였다.
“너, 내일 출근 안 하냐?”
[갑자기 뭔 소리야?]
“지금 한국은 새벽 1시 30분쯤 아니야?”
[뭐라는 거야? 취했냐?]
순간, 겨울은 아차 싶었다.
콩고민주공화국과 이곳 탄자니아의 시차를 착각하고 있음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아아, 미안. 내가 시차를 생각 못했네.”
[응? 지금 콩고민주공화국 아니야? 어딘데?]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하여간… 여기저기 빨빨거리면서 잘도 돌아다닌단 말이지.]
“아무튼. 뭐 때문에 전화했어? 우황청심환 때문에?”
[어. 네가 사진 찍어서 보내 준 우황청심원의 가격을 알아봤는데, 장난이 아니게 비싸더라.]
“얼마 정도 하는데?”
[한 알에 20달러 정도.]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에 모두 열 알이 들어 있으니까, 200달러 정도 한다는 얘기였다.
“왜 그렇게 비싼지 알아봤어?”
[사향노루한테서 채취한 사향이 함유되어 있단다.]
“값싼 우황청심원은 사향이 들어간 게 아니라는 말인가?”
[사향 고양이한테서 채취한 영묘향이라는 게 함유되어 있대.]
“음, 약효는 어떤데?”
[비싼 만큼 제값을 한다고 하더라.]
“오… 그럼 저렴한 거는 얼마 정도해?”
[글쎄다? VIP들한테 선물할 만한 거면 아무리 싸도 한 알에 10달러는 하겠지.]
바통고 대통령이 1만 세트를 주문했으니까, 정확하게 100만 달러 차이가 발생한다.
그들이 돈이 없어서 값이 저렴한 우황청심원을 찾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호영아, 비싼 걸로 지르자.”
[화끈해서 좋네. 오케이, 내일 중으로 견적서 보내 줄게.]
아프리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은센기가 신규로 사업자를 내려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걸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호영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빤한데, 이상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겨울은 그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으음, 그게 말이야… 제조 회사 측에 알아봤는데,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물량이 얼마 안 된다고 하더라.]
“선 매입에 들어가겠다는 얘기야?”
[다른 방법이 있으면 얘기해 봐.]
“1만 세트를 확보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아무리 빨라도 두 달은 걸릴걸?]
“우리가 사정이 생겨서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수입하지 않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너를 우리 회사에 스카우트한 비용으로 퉁 쳐야지, 뭐.]
“아, 진짜… 징그럽다, 징그러워.”
겨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전화를 끊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