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말썽장이들의 말로
은센기가 아니면, 바통고 대통령에게 선물 세트를 공급하는 업무를 맡길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겨울은 잔뜩 겁먹고 있는 은센기를 설득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제가 이 나라에서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은센기 씨가 유일합니다.”
“그 업무는 가쿠타 과장님이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그러면 가쿠타 과장님이 회사를 그만둬야 합니다. 한 건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업무를 수행하면 되잖아요.”
“그러고 싶지만, 우리 회사에는 겸업을 할 수 없는 법이 있어서 그럽니다.”
“저도 한 대리님의 부탁을 들어 주고 싶지만, 무역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가쿠타 과장님이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틈나는 대로 도와줄 예정입니다.”
은센기는 겨울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코발트 운송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업자 등록을 해야 하고, 그때 무역업도 추가해서 허가를 신청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바통고 대통령에게 홍삼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공급하는 업무는 가쿠타 과장의 도움을 받다가, 힘에 부치면 똘똘한 직원을 채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었다.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은센기는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좋습니다. 제가 그 업무를 대신 수행해 볼게요.”
“하하. 잘 생각하셨어요.”
“이제 자세한 비즈니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볼까요?”
“좋습니다.”
“한 대리님이 바통고 대통령님께 공급 의뢰 받은 물품의 금액은 어느 정도 됩니까?”
겨울은 홍삼 선물 세트의 가격은 알고 있었지만,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의 가격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어림잡아서 얘기해 줄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350에서 400만 달러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우와! 엄청난 금액이네요?”
“하하, 그렇죠?”
“한 대리님이 취하는 이익은 얼마 정도 됩니까?”
“각종 비용을 제외하고 20%로 합의 봤습니다.”
“그, 그럼… 80만 달러가 이익이라고요!”
은센기가 진심으로 놀랐는지, 입을 쩍 벌렸다.
“네, 대략 그 정도 될 것 같아요.”
“저한테는 얼마를 나눠 주실 생각입니까?”
겨울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말이 나온 김에 깔끔하게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50%, 은센기 씨가 30%, 가쿠타 과장님이 20% 어떨까요?”
“네?! 너무 많습니다.”
은센기와 가쿠타 과장이 똑같이 반응했다.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겨울이 70%, 은센기 20%, 가쿠타 과장이 10%를 배분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제 두 제품의 공급자가 될 호영과 통화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냐?]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제발 부탁인데, 돈이 되는 일을 시키면 안 되겠냐?]
“왜? 너네 회사, 상황이 어려워?”
[회사는 어렵지 않은데, 내 형편이 지금 말이 아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봐서, SH 무역에 입사한 후부터 지금까지 변변한 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돈이 되는 일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빨리 얘기해 봐.]
호영의 목소리에 다시 힘이 실렸다.
“내가 오늘 오후에 VIP에게 오더를 하나 받았는데, 홍삼 선물 세트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 각각 만 개씩이야.”
[얘가 더위를 먹었나?]
예상한 대로 호영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막말로 얘기해서 너희 회사를 내버려 두고, 나한테 엄청난 오더를 주는 이유가 뭔데?]
“그래서?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나?”
[야, 너는 농담도 못하냐?]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이제부터 내가하는 얘기 잘 들어.”
[넵, 바이어님. 말씀하십쇼.]
“두 물품의 납기는 6월 15일이지만, 가급적이면 5월 말까지 보내 주는데, 배가 아닌 비행기로 보내 줘.”
[그럼 운송비가 많이 상승하잖아.]
“부피가 작고, 가볍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을 거야.”
[결제 조건은 어떤데?]
“계약과 동시에 현금으로 쏴줄게.”
[진, 진짜?!]
호영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귓속깊이 파고들었다.
“나도 바이어한테 그렇게 조건을 제시받았어.”
[최종 바이어가 원하는 홍삼 선물 세트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의 규격과 가격은 어떻게 되는데?]
“홍삼 선물 세트는 작년 11월에 나한테 보내 준 것과 동일한 제품으로 하고, 우황청심원 세트는 내일이나 모레쯤에 사진을 찍어서 보내줄게.”
[홍삼 선물 세트는 그렇다하더라도, 우황청심원은 의약품인데 문제없이 통관이 이뤄질 수 있을까?]
겨울도 그 점이 걱정돼서 부투야 실장에게 물어 보았으나, 이번에 한해서만 통관시켜주기로 확답을 받아 놓았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조치를 취해 놓을게.”
[뭐, 그렇다면 할 말이 없고. 우리 마진은 얼마를 책정할까?]
“바가지만 씌우지 않으면 돼.”
겨울은 호영에게 실무를 담당할 은센기와 가쿠타 과장과도 통화를 시켜 주고,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은센기 씨가 사업자 등록을 빨리 내면 물품 공급시기가 앞당겨 질 수도 있어.”
[두 가지 물품을 미리 구입해 놓아야겠네?]
“그래주면 더욱 좋고.”
* * *
같은 시각.
김종학 지점장도 정명훈 법인장과 통화 중에 있었다.
“법인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회장님께 구두 승인을 받았다고, 사장님께서 방금 전화해 주셨어.]
“하하, 알겠습니다.”
[김 지점장, 하여튼 수고했어.]
“저는 한 대리가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놓았을 뿐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입장이니까, 그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고.]
“네, 법인장님.”
[그나저나…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트린 거 아니야?]
그 점에 대해서는 김종학 지점장도 정명훈 법인장과 생각이 같았다.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8∼10월에 크게 한 방을 터트려서, 인사권자의 눈에 드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1월 중순.
그러나 겨울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이런 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임원 인사시기가 다가오면, 사장님께 조금만 어필해 주십시오.”
[알았어. 최선을 다해 볼게.]
“법인장님, 한 대리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런 고급 정보를 입수했을까요?”
[김 지점장, 쓸데없는 호기심은 생명 단축의 지름길이라는 말을 모르나?]
즉, 괜한 호기심을 보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죄송합니다. 법인장님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한 대리를 보호해 줄 필요가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한 대리는 어디에 있나?]
“부투야 실장이 할 말이 있다면서, 남아 있으라고 했습니다.”
[송유관 건설 공사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았어.]
“아차차. 오늘 저녁때 한국 식당에서 한 대리와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기로 했습니다. 식사 비용을 지원해 주십시오.”
[삼겹살 말고, 소고기로 질러.]
“흐흐흐, 알겠습니다.”
* * *
한국 음식점.
겨울과 김종학 지점장, 하도진 부지점장은 급작스럽게 마련된 소고기 파티를 즐기며 오늘의 피로를 날려 버리는 중이었다.
“지점장님, 1월이 지나려면 아직 보름이나 남았는데, 남은 기간은 어떻게 버티시려고 무리하시는 겁니까?”
“오늘 식사 비용은 법인장님께서 지원해 주기로 하셨어.”
“그렇다면… 허리띠를 풀고 본격적으로 먹어도 되겠네요?”
“그렇게 해. 오늘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우리 건배 한 번 할까?”
“네, 좋습니다.”
“건배!”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소고기 한 점을 씹어 삼킨 겨울은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점장님, 사모님하고 아이들은 내일 몇 시쯤에 도착할 예정입니까?”
“점심 무렵에 도착할 예정인데, 왜?”
“제가 내일 저녁때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서 문두야 부통령과 마사카 우간다 부통령을 만나기로 약속했거든요.”
“공항에서 홍삼 선물 세트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건네받아서 곧바로 가겠다는 건가?”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알았어. 나하고 공항에 같이 나가자고.”
“네, 지점장님.”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서 하도진 부지점장이 입을 열었다.
“한 대리, 나하고 지점장님께 큰 선물을 줘서 정말 고마워.”
“부지점장님, 어떻게 하다가 얻어걸린 거니까, 크게 마음에 두지 마세요.”
“나하고 지점장님이 승진하면, 한 대리 덕으로 알고 있을게.”
“그런데, 덤프 트럭 수출 건에 대해서 컨펌은 받으셨나요?”
겨울이 쑥스러운 마음에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사장님까지 보고가 올라가서 이미 컨펌을 받아놓은 상태야.”
“네? 벌써요?”
“우리가 바통고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지, 벌써 6시간이나 지났는데 뭐.”
“하여간 스피드 하나는 끝내주네요.”
윙윙―
그때, 김종학 지점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겨울이 하도진 부지점장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다.
“오늘 오후에 홍성훈 부장이 전화를 걸어왔거든.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업무상 재해의 사전적 의미는 근로자가 근무 시간 중에 발생하는 사고를 의미하며, 사용자는 각종 보상을 이행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업무상 재해는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적용되는 편이지만, 휴일에 발생하는 사고는 당연히 적용되지 않는다.
홍성훈 부장과 신대환 부장은 휴일에 놀러갔다가 콜레라에 걸렸기 때문에 명백히 업무상 재해에 해당되지 않는다.
두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빤하지만, 이렇듯 생떼를 부리고 있는 이유는 어마어마하게 발생한 병원 치료비 때문일 것이었다.
겨울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하도진 부지점장에게 물었다.
“빤하지, 뭐.”
“지점장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두 사람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 주려면, 허위 보고를 할 수밖에 없어. 나중에 감사를 받고 이 사실이 드러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하여간 조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이네요.”
“나도 한 대리 말에 동감이다.”
잠시 후, 김종학 지점장이 털레털레 걸어와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점장님, 또 홍 부장님이 걸어온 전화입니까?”
“이놈의 핸드폰 전원을 꺼 놓든지 해야지. 신경 쓰여 죽겠네.”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만약을 대비해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아야 할 것 같아.”
“안전장치라뇨?”
“악에 받친 인간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하긴… 지점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인간들이 콩고 지점에 발령받아서 한 짓거리와 관련한 보고서를 부지점장이 작성해 줬으면 좋겠어.”
“보고서는 언제까지 작성하면 됩니까?”
“늦어도 내일까지는 사장님께 보고가 올라가야 할 것 같아.”
“그럼 술은 더 이상 마시면 안 되겠네요?”
“아무래도. 부탁해.”
다음 날, 아침.
겨울이 콩고 지점에 근무하고 있었더라면 벌써 출근하고 남았을 시간이지만, 지금은 출장자의 입장이었다.
그런 이유로 출근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김종학 지점장은 통화 중에 있었고, 다른 직원들 모두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겨울은 이틀간 입었던 정장을 하도진 부지점장에게 돌려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부지점장님, 감사히 잘 입었습니다.”
“고맙기는 뭘.”
“지점장님은 누구와 통화하고 계십니까?”
“사장님.”
이 말은 즉, 하도진 부지점장이 작성한 보고서가 벌써 이진호 사장에게 보고되었다는 의미였다.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여기서 얘기해 주기는 곤란하고, 회의실에서 얘기해 줄게.”
회의실로 들어온 하도진 부지점장은 귀동냥으로 들은 통화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업무상 재해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인정받기 어려울 것 같아.”
“병원비가 장난이 아닐 텐데, 두 사람은 죽어나겠네요.”
덜컥.
그때, 김종학 지점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점장님, 사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시 불이행, 근무 태만, 허위 주장 등을 이유 삼아서 사표를 받으라고 하더라고.”
“권고사직도 거부한 사람들이 순순히 사표를 낼까요?”
“나한테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떤 카드인데요?”
“병원 치료비를 부담하는 조건.”
결국 말썽쟁이 두 사람은 퇴사가 확정되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