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고마움 반, 두려움 반
겨울은 핸드폰을 들어서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30분.
장대산에게 부탁의 말을 전하고 통화를 종료한 지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겨울은 기다리고 있는 시간을 이용해서 탄자니아와 우간다 부통령과의 미팅 일정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었지만, 부투야 실장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엉뚱한 질문만 해 왔다.
“한겨울 씨는 대한 그룹에 언제까지 근무할 생각입니까?”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최대한 오랫동안 근무할 생각입니다.”
“하하하, 특별한 일이 생기면 회사에 사표를 던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뭐지?’
겨울은 마음속으로 한마디를 하고,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는 건 알고 계시죠?”
“정말 힘들게 입사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대한 그룹에서 끝을 볼 생각입니다.”
“한겨울 씨, 보기와는 다르게 꿈이 너무 작네요?”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겨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에 없던 빠른 속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네! 대산 씨.”
[그렇게 반갑나요? 제가 전화를 너무 늦게 드렸죠?]
“아, 아니에요.”
[급한 거 같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네.”
[테슬라와 관련된 극비 문서가 투기 세력에 유출된 것이 맞고, 범인이 패티슨 회장으로 밝혀졌습니다.]
“패티슨 회장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마 주가를 조기에 부양시켜서 회사 운영 자금을 확보하려는 이유였던 거 같아요.]
투기 세력이 테슬라 주식을 가지고 장난치게 된다면, 당연히 목표 주가도 달라질 것이었다.
겨울은 이 점을 언급하며 장대산의 생각을 물었다.
[제가 지금까지 파악해 본 결과로는… 연말까지 최소 600달러는 넘을 것 같습니다.]
600달러라니.
겨울은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재 장대산의 조언을 받고 테슬라의 주식을 120달러에 895주나 매입한 상태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원금을 제외하고 네 배를 벌게 될 예정이었다.
겨울은 두근대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장대산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산 씨, 투기 세력이 언제쯤 행동으로 나설 것으로 보여요?”
[주식 매입을 위해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미 확인됐고, 본격적인 행동은… 아마 다음 달 말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의외였다.
겨울도 부투야 실장의 말처럼 적어도 한 달 뒤에나 투기 세력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투기 세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를 어떻게 포착했나요?”
[테슬라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주식시장에 퍼지기 시작했고, 거래량이 평소 대비 50%이상이나 늘어났으니, 빤하죠, 뭐.]
“그들이 저가에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서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고 보면 되나요?”
[네, 정확해요.]
“쩝, 주식을 매입할 돈이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한 대리님이 원한다면, 제가 돈을 빌려드릴 수도 있어요.]
“주식 투자는 빚내서 하는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하하, 알았어요. 그건 그렇고, 저도 거꾸로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네. 얼마든지요.”
[테슬라와 관련된 극비 문서가 투기 세력에 유출된 사실은 어떻게 알았어요?]
장대산은 지금 겨울이 바통고 대통령 관저에 들어와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괜한 오해를 만들기 싫어서 겨울이 일부러 언급을 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할 때였다.
“그게… 제가 지금 콩고민주공화국의 바통고 대통령님과 같이 있습니다.”
[네? 아, 아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이분들께 테슬라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한 이유는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장대산과 통화를 끝낸 겨울은 바통고 대통령에게 현재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테슬라의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적기는 지금인 것 같다고 합니다.”
“한겨울 씨, 테슬라의 주가가 600달러가 넘는다는 말인가요?”
“최소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더 넘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끼리 잠깐 대화를 나누고 와도 될까요?”
“대통령님, 죄송한 말입니다만, 저는 이제 가면 안 됩니까?”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바통고 대통령은 겨울을 잡아놓고 수행원들과 함께 접견실을 빠져 나갔다.
잔뜩 긴장해 있던 가쿠타 과장이 그제야 편안히 자세를 바꾸고 말을 걸어왔다.
“한 대리님, 부투야 실장님이 저를 이곳에 남으라고 한 이유가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분들은 좋겠네요.”
“뭐가요?”
“한 대리님 덕분에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 예정이잖아요.”
가쿠타 과장의 표정에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상대적 박탈감.
겨울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작년 11월에 전화번호를 교환한 탄자니아의 문두야 부통령이었다.
느낌상 부투야 실장이 그에게 전화를 한 것 같았다.
“흠흠.”
겨울은 가볍게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십니까, 문두야 부통령님.”
[한겨울 씨, 우리나라는 언제 오실 예정입니까?]
문두야 부통령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겨울은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계산해 보았다.
‘이 나라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에티오피아를 경유해서 오니까, 김 지점장님의 사모님과 아이들은 내일 점심 무렵에 도착한다 가정하고, 선물을 받아서…….’
“음, 아무리 빨라도 내일 저녁이나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디로 오셔야 하는지 알고 있죠?]
탄자니아의 법률상의 수도는 중부 지역에 위치한 도도마(Dodoma)라는 곳이지만, 실질적인 수도 역할은 인도양에 인접한 최대 도시인 다르에스살람(Dares Salaam)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 문두야 부통령은 이 점에 대해서 묻고 있는 중이었다.
“제가 다르에스살람으로 가면 됩니까?”
[네, 맞습니다.]
“돌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출발하기 전에 미리 연락드리겠습니다.”
[가급적이면 내일 오시면 좋겠는데…….]
“혹시 서두르는 이유를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마사카 우간다 부통령이 내일 저녁때 우리나라로 오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한겨울 씨, 부투야 실장이 저한테 설레발을 엄청나게 치던데, 사실이라고 보면 됩니까?]
“어디까지 말씀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내일 봅시다.]
“들어가십시오, 부통령님.”
겨울이 문두야 부통령과 통화를 끝내는 것과 동시에 바통고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비어 있는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탄자니아의 문두야 부통령과 통화했습니까?”
“네. 방금 전에 했습니다.”
“부디 원하는 목표를 이뤘으면 좋겠네요.”
바통고 대통령도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겨울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알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대한 그룹이 공사를 수주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말씀만이라도 정말 고맙습니다.”
“이제 한겨울 씨기 회사로 복귀하지 못하게 한 이유를 부투야 실장이 얘기해 줄 겁니다.”
부투야 실장은 겨울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바통고 대통령님께서는 매년 생신 때마다 지지자들에게 소정의 선물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올해는 한국산 홍삼 선물 세트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지지자들에게 선물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홍삼 선물 세트는 작년 11월에 제가 받았던 것과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는 대통령님께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가격대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희가 필요한 수량은 각각 만 세트이고, 아무리 늦어도 6월 중순에는 우리나라에 도착시켜 주셔야 합니다.”
즉, 5개월의 납기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해운 운송은 빠듯할지 모르겠지만, 항공 운송을 통하면 충분히 가능한 납기였다.
“최선을 다해서 납기를 준수해 보겠습니다.”
“전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홍삼 선물 세트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는 한겨울 씨가 자체적으로 저희한테 공급해 주셔야 합니다.”
겨울은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대한 그룹에는 겸업 금지라는 사규가 있었다.
만약에 사규를 어기고 이 일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통고 대통령이 일부러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고민을 알고 있다는 듯 부투야 실장이 말을 걸어왔다.
“한겨울 씨, 혼자서 해결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을 이용하면 어떨까요?”
겨울은 그제야 부투야 실장이 가쿠타 과장을 남아 있으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쿠타 과장을 통해 홍삼 선물 세트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를 공급하라는 뜻.
하지만 그도 대한 그룹 직원이기 때문에 겸업 금지를 위반해야 하는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겨울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또 다른 대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맞아. 은센기 씨를 이용하면 되겠네. 일단 말이나 꺼내 봐야겠다.’
겨울은 은센기를 염두에 두고, 부투야 실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가장 중요한 결제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계약과 동시에 선급금으로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제가 돈을 떼어먹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한겨울 씨가 알려 준 정보로 우리가 벌게 되는 수입이 얼마인데요. 그 정도 액수의 돈은 달라고 해도 그냥 줄 수 있습니다.”
“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적으로 한겨울 씨가 싫다고 하면, 대통령님께서는 다른 물품을 구입하실 겁니다.”
즉, 이 일은 겨울에게만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대한 그룹이 아니라.
“정말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이익률은 몇 %를 책정하면 되겠습니까?”
“통관 비용과 각종 세금을 제외하고 20% 어떻습니까?”
“네? 너무 많은 게 아닙니까?”
“제가 방금 전에 뭐라고 했는지 알고 계시죠?”
“하하,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결론 내서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
대통령 관저를 빠져 나온 겨울은 즉시 은센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한 대리님.]
“은센기 씨, 지금 어디에요?”
[한 대리님이 어디에 있는지 얘기해 주는 편이 빠를 것 같네요.]
“대통령 관저 정문에 있습니다.”
[이 시간까지 그곳에 계셨다고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넉넉잡고 20분 정도 걸릴 거예요.]
겨울이 통화를 끝내자, 가쿠타 과장이 말을 걸어왔다.
“한 대리님, 혹시 은센기 씨한테 그 역할을 맡길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아쉬워하는 가쿠타 과장의 표정.
“섭섭하십니까?”
“뭐, 그런 점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저희 회사에 겸업 금지 사규가 있는 건 알고 계시죠?”
“알고는 있지만, 저는 최악의 경우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지 말고, 은센기 씨한테 무역 실무를 가르쳐 주고, 수당을 받는 것은 어떨까요?”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은센기는 뭐가 그렇게 급한지 10분이 조금 지나서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과 가쿠타 과장이 택시에 타자, 은센기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로 모실까요?”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가까운 커피숍으로 갔으면 좋겠네요.”
킨샤사 인터내셔널 호텔 커피숍.
겨울이 시원한 아이스티를 한 모금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곳도 오랜만에 오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센기 씨, 이제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 주세요.”
“빨리 얘기해 보세요.”
“제가 바통고 대통령으로부터 제안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 제안은…….”
겨울의 얘기를 들은 은센기는 고마움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겨울이 자신을 위해서 신경 써 준 것은 진심으로 고마웠지만, 불행하게도 자기는 무역의 ‘무’자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겨울은 막무가내로 그 일을 맡기려하고 있었지만.
“한 대리님,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시키면 안 될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