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갑자기 빨리 흘러가는 시간
김종학 지점장은 갑자기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만 같았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최고 권력자인 바통고 대통령의 입에서 답례품이라는 얘기가 나온 이상,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준다고 덥석 받을 수는 없는 노릇.
그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심호흡했다.
“대통령님, 라면은 우리나라에서는 소울푸드이지만, 가격이 저렴한 식품입니다. 굳이 답례를 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물을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답례를 하는 게 예의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김종학 지점장은 더 사양했다가는 무례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주신다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답례품과 관련한 대화는 접견실에서 다과를 즐기면서 나누는 게 좋겠군요. 우리는 조금 있다가 갈 테니, 먼저 가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접견실.
하도진 부지점장은 대화에 동참할 일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바통고 대통령을 포함한 수행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살펴볼 시간이 있었다.
점심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바통고 대통령과 부투야 실장이 은밀하게 신호를 주고받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부투야 실장이 부정적인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순간부터 바통고 대통령의 목소리에 살짝 힘이 빠졌다.
그는 어쩌면 자신만의 착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었다.
“글쎄, 나는 전혀 모르겠던데?”
김종학 지점장의 답변을 들은 하도진 부지점장은 곧바로 겨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 역시 하도진 부지점장과 똑같이 두 사람이 은밀하게 신호를 주고받는 모습을 포착했다.
그리고 이유 또한 대충 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상의하고 있는 것이리라.
겨울은 장대산에게 받은 정보가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걱정하고 있는 하도진 부지점장을 안심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제가 어제 테슬라 자동차와 관련한 정보를 제공했는데, 사실 여부에 대한 검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 같습니다.”
“향후에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 시나리오를 얘기해 줄 수 있나?”
“저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제가 제공한 정보가…….”
하지만 겨울의 얘기는 끝을 맺지 못했다.
때마침 바통고 대통령이 부투야 실장 등과 함께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바통고 대통령은 상석에 앉은 후, 차분한 목소리로 김종학 지점장에게 말을 건넸다.
“김 지점장님,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희가 준비한 답례품은 부투야 실장이 얘기해 줄 겁니다. 약소하더라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종학 지점장은 바통고 대통령의 약소하다는 말에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결코 내색할 수는 없었다.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기겠습니다.”
“흠흠…….”
부투야 실장은 가벼운 헛기침을 통해서 입을 풀어준 뒤,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어젯밤에 한겨울 씨로부터 굉장히 중요한 정보를 취득했고, 곧바로 검증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윙윙―
그때, 정말 공교롭게도 부투야 실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핸드폰을 들고 황급히 접견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약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입가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동시에 조용한 침묵에 빠져 있던 접견실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부투야 실장, 어떻게 됐습니까?”
“대박입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바통고 대통령이 만족한다는 듯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대통령님, 정보 검증과 관련해서 긴급히 보고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알았어요. 집무실에서 대화를 나누도록 하십시다.”
바통고 대통령과 짧은 대화를 끝낸 부투야 실장은 김종학 지점장에게 말을 건넸다.
“김 지점장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30분 정도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 이상의 시간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오십시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바통고 대통령이 상석에 앉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부투야 실장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제가 방금 전에 테슬라의 패티슨 회장과 통화했는데, 한겨울 씨가 저희한테 보여 준 보고서의 내용은 모두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당연히 목표 주가도 사실이겠네요?”
결국 바통고 대통령도 돈의 노예였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상황이 다급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하게 얘기해 보세요.”
“테슬라에서 작성한 보고서가 투기 세력에 넘어간 사실이 확인됐다고 합니다.”
이 말은 즉, 조만간에 투기 세력이 테슬라의 주식을 상대로 장난친다는 뜻이었다.
“투기 세력이 행동으로 나설 시기를 언제쯤으로 예상합니까?”
“다른 투기 세력들과 투자자들을 연합군으로 끌어들이는 시간을 감안하면… 한 달은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통고 대통령은 눈을 지그시 감고 남아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테슬라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해외 은행들에 분산 예치되어 있은 비자금들을 한곳에 모으고…….’
바통고 대통령은 적어도 열흘 정도면 모든 작업을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유 모를 불안감도 엄습해 왔다.
생각을 끝낸 부투야 대통령은 감았던 눈을 뜨며 부투야 실장에게 물었다.
“투기 세력이 더 빨리 움직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완전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흐음, 큰일이군요.”
“대통령님, 저희가 목표 수익률을 조금만 낮춰 잡으면 되니까,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왠지 아까운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뭘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카손가 부총리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대통령님, 한겨울 씨한테 투기 세력의 동향을 물어보면 어떨까요?”
“흐음, 한겨울 씨가 알고 있을까요?”
바통고 대통령이 즉각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겨울 씨가 말한, 미국에 엄청난 실력자를 부모로 둔 그 지인이 투기 세력들의 동향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카반구 장관이 한 마디 보태자, 바통고 대통령은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에는 그다지 생각이 길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십시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 대한 그룹에 줘야 하는 답례품에 대해서 다시 논의해 봅시다.”
“네, 대통령님.”
“그래서 말인데…….”
바통고 대통령의 얘기를 듣고 있던 부투야 실장은 기막힌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대통령님,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얘기해 보세요.”
“가쿠타 과장, 또는 은센기 씨를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 * *
같은 시각.
접견실에서도 답례품과 관련한 대화가 오고가는 중이었다.
“한 대리, 바통고 대통령님이 우리한테 어떤 답례품을 줄까?”
“제가 제공한 정보의 가치가 싸구려가 아니기 때문에 아마 지점장님이 만족하실 만한 답례품일 겁니다.”
“나한테 얘기해 준 정보 말고, 또 다른 정보가 있다고 보면 되나?”
“네, 그렇습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내용인가?”
겨울은 테슬라의 주가와 관련된 정보를 알려 줄까 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점장님, 나중에 한가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그건 그렇고… 답례품이 1억 달러 정도의 가치는 있겠지?”
“아마도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하여튼 고마워. 내가 임원으로 승진하면 크게 한턱 쏠게.”
“으음, 그때까지 배를 쫄쫄 골아가며 기다리다가는 굶어 죽을 것 같습니다만…….”
“하하하! 알았어. 오늘 쏠게.”
“오랜만에 한국 식당에 가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마시고 싶습니다.”
“오, 그거 괜찮네. 삼겹살에 알싸한 소주라… 벌써 군침이 도는데?”
잠시 후, 바통고 대통령이 일행들과 함께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석에 앉은 바통고 대통령이 따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 지점장님, 늦어서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바통고 대통령으로부터 신호를 받은 부투야 실장이 입을 열었다.
“김 지점장님, 한겨울 씨한테 취득한 정보는 테슬라 자동차와 관련된 정보였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완벽하게 사실로 확인된 상태입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시고, 답례품을 상향 조정하셨습니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주시든 감사하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길게 끌지 않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광물 운송용으로 사용할 25톤 덤프트럭 1,000대를 공급해 주십시오.”
김종학 지점장은 기쁜 마음에 바통고 대통령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25톤 덤프트럭은 대당 최소 15만 달러가 넘는 고가의 차량이었다.
총 1억 5,000만 달러가 넘는 답례품을 입찰이 아닌, 수의계약 형식으로 받게 되었는데,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허허허, 한겨울 씨가 준 선물에 비하면, 너무 약소할 따름입니다. 나머지 얘기는 부투야 실장과 계속 대화를 나누도록 하세요.”
바통고 대통령이 그 말을 끝으로 물러나자, 부투야 실장이 입을 열었다.
“김 지점장님, 덤프트럭은 상하반기로 나눠서 500대씩 공급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덤프트럭 구입 대금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광물로 대체해서 지급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어떤 광물을 공급해 주실 생각입니까?”
“구리를 국제 가격 대비 25% 할인해서 공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종학 지점장은 25% 할인 조건이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자기의 결정권 밖에 있는 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회사에 보고한 후에 컨펌받아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부투야 실장님, 덤프트럭과 관련한 비즈니스는 누구와 진행해야 합니까?”
“우마 키푸야 광업 장관과 하시면 됩니다. 그에게 김 지점장님의 연락처를 미리 전달해 놓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후에도 김종학 지점장은 궁금한 점을 부투야 실장에게 꼼꼼하게 물었고, 그 또한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김종학 지점장과 긴 대화를 끝낸 부투야 실장은 시선을 돌려 겨울에게 물었다.
“한겨울 씨, 이 시간 이후에 약속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어젯밤에 한 약속은 기억나십니까?”
부투야 실장은 이번 주 안으로 탄자니아와 우간다 부통령을 만나게 해 준다고 약속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잠깐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네, 좋습니다.”
김종학 지점장은 부투야 실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재빨리 감 잡고 눈치껏 행동했다.
“부투야 실장님, 저하고 하도진 부지점장은 오후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그러는데, 먼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저희가 괜히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지금 일어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럼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가쿠타 과장도 이때다 싶어 일어났다.
“부투야 실장님, 저도 일어나겠습니다.”
“가쿠타 과장님은 한겨울 씨와 같은 팀원이 아닙니까?”
즉,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김종학 지점장과 하도진 부지점장이 떠나자, 부투야 실장이 신중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겨울 씨, 제가 아까 통화한 사람은 테슬라의 CEO인 패티슨 회장이었습니다.”
부투야 실장은 패티슨 회장과의 통화 내용을 겨울에게 설명해 주면서 부탁의 말도 함께 들이밀었다.
“…투기 세력들의 동향을 지인한테 물어봐 줄 수 있습니까?”
“일단 전화는 해 보겠습니다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겨울은 장대산에게 전화를 걸어서 부투야 실장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을 말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산 씨, 저한테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