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VVIP와의 만남
모든 비즈니스에는 Give & Take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된다.
겨울이 콩고민주공화국의 VIP들의 생명을 구한 것이 Give라고 한다면, SUV 자동차 수출과 전염병 전문치료 병원 프로젝트 수주를 Take라고 볼 수 있었다.
겨울은 이미 Give & Take를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더 이상 받을 선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종학 지점장은 자신에게 무언가 잔뜩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이미 수주해 놓은 일감도 산더미일 텐데, 또 다른 일감을 소화할 수 있는 여력이 되실까?’
겨울이 마음속에 의문을 가지고, 김종학 지점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지점장님께 반드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고마워.”
겨울은 콩고 지점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의아한 장면을 목격했다.
직원들이 근무하는 파티션 위에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직위와 이름표가 붙어 있다.
당연히 지난주에 이곳으로 발령받은 홍성훈 부장과 신대환 차장의 이름표가 그곳에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지점장님, 홍 부장님과 신 차장님은 외근 나가셨습니까?”
김종학 지점장은 두 사람을 생각하니, 갑자기 울화가 치솟아 올랐다.
콩고 지점에 발령받은 두 사람은 남아공을 출발하기 직전인 지난주 수요일 밤에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연락을 취해 왔다.
그들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가는 것이 이치상 맞았지만, 정명훈 법인장에게 받은 지시 때문에 공항에 픽업하러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두 사람은 오후가 되도록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해 볼까 하다가, 삐쳐서 그러는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다행히 두 사람은 금요일 아침에는 회사에 출근했다.
그런데 와서 하는 말이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서, 휴가를 내고 곧장 퇴근해 버렸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또다시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어이도 없어서 전화를 걸어 보려는 순간에 홍성훈 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주말을 이용해서 세계 3대 폭포인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하러 잠비아에 왔다가, 비행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얘기였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참을 인(忍)자 세 개를 속으로 그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제법 긴 상념을 끝낸 김종학 지점장은 허탈하게 웃으며 지난주부터 오늘 오후까지 있었던 사연을 겨울에게 얘기해 주었다.
“…현재 이런 상황이야.”
겨울은 김종학 지점장의 화난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일개 대리인 자기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은 없었다.
자존심 싸움은 레벨이 맞는 당사자들끼리 직접 해결하는 것이 맞으니까.
“지점장장님, 두 분에게 어떤 업무를 맡길 생각이세요?”
“두 사람하고 면담해 보고 결정해야지.”
“두 분이 콩고 지점에 빨리 적응했으면 좋겠네요.”
“자, 재수 없는 인간들 얘기는 그만하고, 3월에 있을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 보자고.”
우간다 유전 지대와 탄자니아 탕가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 공사는 예정대로 지난주에 국제입찰 공고가 떴다.
송훈석 회장은 대한 그룹 전략기획실 주관으로 입찰에 참여하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였고.
“우리가 중국의 CNOOC의 방해를 무릅쓰고 입찰을 딸 수 있을까?”
겨울은 히든카드를 사용하면 적어도 30% 정도의 승산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저녁때 부투야 비서실장을 만나려는 것이고.
하지만 돌발 변수 때문에 히든카드 얘기는 어느 누구한테도 언급할 수 없었다.
결국 겨울은 원론적인 수준의 답변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전략기획실에서 대책을 수립하고 있을 겁니다.”
“작년 8월의 화웨이 경우처럼 이번에도 중국의 건설사를 박살내 주라고.”
하도진 부지점장은 예정대로 오후 4시에 정장을 가지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겨울의 체구가 하도진 부지점장보다 약간 컸기 때문에 정장이 꽉 끼긴 했으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겨울이 정장을 갈아입고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하도진 부지점장이 말을 걸어왔다.
“한 대리, 좀 작은 것 같은데, 괜찮아?”
“그렇긴 합니다만,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바통고 대통령님을 만나러 가는데, 선물은?”
“갑작스럽게 초대를 받은 상황이라서… 아직 준비하지 못했어요.”
“잠깐만 기다려 봐.”
하도진 부지점장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 가방을 겨울에게 건네주었다.
“부지점장님, 이게 뭡니까?”
“꺼내 봐.”
종이 가방 안에는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포장된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겨울은 이것이 무엇인지 대충 감 잡았다.
“부지점장님, 혹시 우황청심원입니까?”
“맞아. 바통고 대통령님께 선물로 드려.”
“감사합니다, 부지점장님.”
“한 대리, 시간 괜찮으면, 회의실에서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럼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회의실에 들어간 두 사람은 각자 편한 자리에 앉았다.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나하고 지점장님을 위해서 부탁 하나만 들어줘.”
“네, 말씀하십시오.”
“바통고 대통령님, 또는 부투야 실장님께 부탁해서 새로운 일거리 하나만 따 줬으면 좋겠어.”
겨울은 하도진 부지점장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재 콩고 지점은 일거리가 넘쳐나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는 중인데, 뭐가 부족해서 새로운 일거리를 따 달라고 하는 것인지.
겨울은 이유가 무엇인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지점장님과 나는 올해 승진 대상자에 올라 있어. 문제는 우리 지점은 일은 엄청나게 많지만…….”
겨울은 두 사람의 절박한 심정을 이제야 이해했다.
현재 콩고 지점이 수행하고 있는 업무는 작년에 자신과 정명훈 법인장이 수주한 일거리를 뒤치다꺼리 하고 있는 것처럼 비쳐졌으니까.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점에 대해서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는 모양이었고.
“올해가 가기 전에 최선을 다해서 새로운 일거리를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부장으로 승진하면, 한 대리한테 어떻게든 보답할게.”
“나중에 꼭 저한테 거하게 한번 쏘셔야 합니다.”
“하하하, 알았어.”
그때, 겨울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이고. 내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구나.”
“왜? 무슨 일인데?”
“바통고 대통령님께 우황청심원을 선물해야 하는데, 효능과 부작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거든요.”
“잠깐만 기다려 봐.”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하도진 부지점장의 손에는 바인더가 들려 있었다.
“그게 뭔가요?”
“우황청심원의 효능과 부작용을 프랑스어로 간단하게 정리해 놓은 자료야. 이 자료를 바통고 대통령님께 전해 주면 될 거야.”
“이런 것까지… 고맙습니다, 부지점장님.”
겨울이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인사했다.
“회사를 위해 수고하는 후배를 위해서 이 정도 서비스는 해 줘야 하지 않겠어?”
* * *
“한 대리님, 부투야 실장님께 저도 참석한다고 미리 언질을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뒷좌석에 가득 쌓인 라면 상자 때문에 조수석에 앉은 가쿠타 과장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러지 않아도 가쿠타 과장님도 참석한다고 미리 전달했어요.”
“휴우, 정말 다행이에요.”
가쿠타 과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겨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가쿠타 과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부투야 실장님이 저한테 하신 말씀을 전달해 드릴 테니까. 참고하고 계세요.”
“네, 말씀하세요.”
“저희와 바통고 대통령님과의 저녁 식사는 비공식 일정이랍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비밀로 해 달라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겨울은 바통고 대통령을 만났을 당시에 있었던 일과 저녁 만찬 예절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한 대리님, 꼭 그렇게까지 해서 바통고 대통령님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은센기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게요. 그럼 차를 돌릴까요?”
“이것 참,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면 어떻게 해요?”
“하하하.”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대통령 관저 정문에 도착한 세 사람은 경비원들로부터 신체와 소지품, 그리고 자동차 내부까지 철저하게 검문검색을 받았다.
바통고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절차였기에 그들은 과하다 싶은 조치에도 묵묵히 따랐다.
“한겨울 씨, 이제 입장하셔도 됩니다.”
경비원이 거수경례하며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은센기가 운전하는 택시가 대통령 관저 입구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비서진들과 함께 부투야 실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한겨울 대리님, 어서 오십시오.”
“부투야 실장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그럼요. 무탈하게 잘 있었습니다.”
부투야 실장은 경직된 모습으로 서 있는 은센기, 가쿠타 과장과도 허물없이 인사를 나눈 후,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대리님, 저 택시에 실린 상자들이 전부 라면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렇게 많을 필요는 없을 텐데…….”
부투야 실장이 묘하게 끝말을 흐렸다.
겨울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재빠르게 파악하고 순발력을 발휘했다.
“부투야 실장님, 택시의 트렁크가 고장 나는 바람에 뒷자리에 상자를 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랬군요.”
그리고 겨울은 비서들이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부투야 실장에게 속삭였다.
“나중에 주소를 문자로 보내 주십시오. 트렁크에 있는 상자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라면 상자는 비서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갑시다.”
접견실로 안내 받은 겨울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과 마주쳤다.
부상이 심하던 카손가 부총리와 카반구 보건장관.
겨울은 두 사람에게 정중한 자세로 인사하고 말을 건넸다.
“부총리님, 장관님, 내일 퇴원하시는 게 아니셨습니까?”
“한 대리님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오늘 오후에 퇴원했습니다.”
겨울은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바통고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유리하니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살짝 밑밥부터 깔았다.
“제가 두 분을 위해서 퇴원 선물을 따로 준비해 놓았는데, 어떻게 하죠?”
“혹시 홍삼 선물 세트입니까?”
어지간히 홍삼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손가 부총리가 두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왔다.
“홍삼만큼 좋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주 궁금한데요?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바통고 대통령님과 저녁 만찬이 끝난 후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알았어요.”
두 사람이 은센기, 가쿠타 과장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 60대로 보이는, 풍채 좋은 사람이 부투야 실장과 함께 접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바나 바통고 대통령이었다.
부투야 실장의 소개로 바통고 대통령과 인사를 나눈 겨울은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시작했다.
“한겨울 씨, 부투야 실장에게 들었는데, 귀한 선물을 가지고 오셨다면서요?”
부투야 실장에게 우황청심원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니, 바통고 대통령은 라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통령님께서는 라면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얼마 전에 조연석 대사께서 라면을 선물해 줘서 먹어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카손가 부총리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통령님, 한겨울 씨가 저희의 퇴원 선물로 굉장히 좋은 선물을 준비해 놓고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그 선물도 무엇인지 아주 궁금한데요?”
돌발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겨울은 저녁 만찬 도중에 바통고 대통령에게 자연스럽게 선물 얘기를 꺼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카손가 부총리가 선물 얘기를 생각보다 너무 이른 시간에 꺼내 버리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겨울은 머리를 혹사시켜서 난감한 상황을 대처할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대통령님, 혹시 우황청심원이라는 약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