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VVIP의 초대
[한 대리님, 방금 전에 계약서에 사인 완료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은센기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잔뜩 실려 있었다.
대한 그룹과 무케나 사장이 공동으로 개발하는 코발트 광산의 상업 생산 협상은 12월 중순에 시작됐지만, 워낙 논의할 것이 방대한 탓에 한 달이 다되어 가도록 계약서에 사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덩달아 은센기의 코발트 운송 사업 시작 시기도 하염없이 지연되고 있었고.
따로 겨울에게 고충을 털어놓지 않았지만, 그는 은센기의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드디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것이었다.
은센기의 기뻐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진심으로 축하해요.”
[고마워요, 한 대리님.]
“이제부터 정신없이 바빠지겠네요?”
[코발트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려면 최소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하니까, 바빠지려면 시간이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6개월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갈 거예요.”
[하하하, 그렇겠죠?]
“오늘 같은 날에 축하주를 마셔 줘야 하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쉬울 따름이네요.”
[이쪽으로 오시면 되잖아요.]
“저도 당장 가고 싶지만, 마땅한 출장 건수가 없네요.”
[흐흐, 제가 건수를 만들어 드릴까요?]
“정말요? 어떻게 만들어 주실 건데요?”
[카손가 부총리와 카반구 보건장관이 내일 오전에 퇴원한다고 하더라고요.]
부투야 실장을 포함한 세 명의 VIP가 반군들에 의해서 총상을 입은 시기는 지난 11월 초.
다리에 총상을 입었던 부투야 실장은 12월 중순에 퇴원했지만, 부상이 상당히 심한 두 사람은 이제야 퇴원하게 된 모양이었다.
콩고 지점에 있을 때에는 병문안을 핑계 삼아 들락날락거리며 친분을 쌓았지만, 남아공으로 발령받은 이후에는 통화조차 힘든 상태였다.
겨울은 VIP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놓은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팀장님께 말씀드려 보고, 컨펌이 떨어지면 곧바로 출발할게요.”
[몇 시에 도착하는지 미리 전화 주세요.]
겨울은 곧바로 고영규 팀장한테 저간의 사정을 보고했다.
“…겸사겸사 콩고 지점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퇴원 선물이라도 가지고 가야 하지 않나?”
겨울은 작년 11월에 VIP들에게 병문안 갔을 당시를 기억에 떠올렸다.
병문안 선물로 홍삼 선물 세트를 받은 그들이 크게 만족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팀장님, 요하네스버그에 홍삼을 판매하는 마트는 없습니까?”
“으음, 8년째 여기에 살고 있는데,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따로 준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VIP들의 퇴원 선물은 제가 알아서 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리고 출장은 가쿠타 과장과 함께 갔으면 합니다.”
“음,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다녀와.”
흔쾌히 승낙을 받아 낸 겨울은 출장 준비를 서둘렀다.
* * *
“한 대리님, 고마워요.”
공항으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가쿠타 과장이 겨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 왔다.
사실 가쿠타 과장은 생활환경이 쾌적한 요하네스버그에 가족과 함께 이사를 오려고 했다.
하지만 남아공 정부에서 가족들의 비자 발급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급한 대로 혼자 올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겨울은 외로울 것이 분명한 그에게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 동행을 요청한 것이었다.
“뭘요. 우리가 한 팀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가쿠타 과장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괜히 부끄러워진 겨울은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음, 퇴원하는 분들께 어떤 선물을 해 주면 좋아할까요?”
“돈이 최고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액수가 적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고… 이것 참, 난감하네요.”
“돈이라…….”
겨울은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겨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쿠타 과장은 말없이 기다렸다.
그동안 꾸준히 지켜본 결과, 겨울은 힘든 상황에 처하면 처할수록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조금만 기다리면, VIP들이 만족할 만한 선물을 찾아낼 것이 분명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생각을 정리했는지 겨울이 가쿠타 과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VIP들은 당연히 돈이 많겠죠?”
“그럴 겁니다. 아마 저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을 거예요.”
“그렇게 돈이 많은데도, 돈을 받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요?”
“한 대리님은 돈이 싫어요?”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돈이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가치를 모르는 애기들밖에 없을 거예요.”
“알았어요. VIP들에게 퇴원 선물로 돈을 주죠.”
“네? 진짜로요?”
의외의 결정이라는 듯 가쿠타 과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가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려는 거예요.”
“어떻게요?”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겨울은 액정에 떠 있는 번호를 가쿠타 과장에게 보여 준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지점장님.”
[한 대리, 오늘 콩고 지점으로 온다며?]
“VIP들이 내일 병원에서 퇴원한다고 해서 겸사겸사 가 보려고 합니다.”
[미안한데,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네, 말씀하십시오.”
[이곳으로 올 때, 라면 좀 사다 줘.]
콩고민주공화국의 유일한 수출입항구인 마타디 항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반면에 남아공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인 더반(Durban)은 인도양 연안에 위치하고 있고.
따라서 한국에서 수출하는 공산품의 경우에는 해운 운송기간이 일주일 정도 짧은 남아공이 훨씬 저렴했다.
그런 이유로 아프리카 내륙 국가에 살고 있는 교민들은 상대적으로 공산품 가격이 저렴한 남아공에서 쇼핑을 많이 해 가는 편이고.
김종학 지점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라면을 사 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사 가면 될까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급한 대로 한 박스만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 * *
콩고민주공화국 은질리 국제공항.
겨울과 가쿠타 과장이 밀고 오는 카트를 본 은센기는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카트 위에 잔뜩 쌓여 있는 라면 상자 때문이었다.
은센기는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어버리고, 겨울에게 급히 다가와서 물었다.
“한 대리님, 이제는 라면 장사를 할 생각이에요?”
“하하, 그냥 여기저기에 선물하려고요. 그나저나 라면 상자들… 택시에 모두 실리겠죠?”
“뭐어… 어떻게든 실어 봐야죠.”
겨울 일행은 택시 트렁크와 뒷좌석에까지 라면 상자를 구겨 넣고, 콩고 지점이 위치하고 있는 곰베 시내로 출발했다.
“콩고 지점에 먼저 들렸다가 병원으로 가요.”
“그렇게 할게요. 그나저나 라면은 왜 이렇게 많이 구입한 거예요?”
“콩고 지점에 근무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라면을 선물해 볼까 해서요.”
“제 몫도 있나요?”
“그야 물론이죠.”
윙윙―
액정에 찍힌 전화번호를 본 겨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은센기 씨, 혹시 제가 온다고 VIP들에게 알려 줬나요?”
“네? 아니요.”
“그럼 어떻게…….”
“왜 그러시는데요?”
“부투야 실장님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세상에… 일단 전화부터 받아 보세요.”
겨울은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한겨울입니다.”
[하하, 한 대리님. 제가 전화할 줄은 몰랐죠?]
“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 저도 그 시간에 공항에 있었거든요. 우연히 뒷모습을 봤어요.]
“아, 그런 거였군요.”
[그나저나 어쩐 일이세요?]
“카손가 부총리님과 카반구 보건장관님이 내일 퇴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겸사겸사 입국했습니다.”
[역시 훌륭하십니다.]
사실 겨울이 콩고민주공화국에 출장을 온 이유는 VIP들을 병문안하러 온 것도 있지만, 부투야 실장을 만나기 위한 목적이 컸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참에 심중에 둔 얘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실장님, 한번 뵀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괜찮습니까?”
[하하하, 카트에 가득 담겨 있던 상자를 주시려고요?]
겨울은 라면을 부투야 실장에게 줄 계획은 없었다.
선물치고는 너무 저렴한데다 그들이 라면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가 카트 위에 가득 쌓여 있는 라면 상자를 본 것에 있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정공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부투야 실장님, 혹시 라면을 알고 계십니까?”
[오오, 카트에 실려 있던 것이 라면이었습니까?]
놀라는 강도로 봐서는 라면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네, 그렇습니다.”
[매콤한 한국의 라면 맛을 보고 싶으니까, 저녁 6시에 대통령 관저에서 보는 게 어떨까요?]
“네?!”
화들짝 놀란 겨울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바통고 대통령님께서 한 대리님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셨어요.]
“저어… 반드시 대통령님을 만나 봬야 합니까?”
[네, 꼭이요.]
부투야 실장의 단호한 대답에 겨울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오실 때 은센기 씨도 데리고 오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투야 실장과 통화를 끝낸 겨울은 은센기에게 급히 물었다.
“은센기 씨, 집에 정장 있죠?”
“왜요?”
“바통고 대통령님이 오늘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네요.”
끼이익!
깜짝 놀란 은센기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제가 농담을 왜 해요?”
“아이고.”
“라면을 선물하기로 했으니까, 차에서 내려놓지 마세요.”
“알겠어요.”
“저는 먼저 콩고 지점에 가 있을 테니까, 적당한 시간에 옷을 갖춰 입고 데리러 와 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은센기와 대화를 끝낸 겨울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가쿠타 과장에게 말을 건넸다.
“가쿠타 과장님도 집에 정장 있죠?”
“네?! 저도요?”
가쿠타 과장도 은센기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솔직하게 얘기하면 가쿠타 과장님은 저녁 식사에 초대받지 않았지만, 대화 내용을 기록할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무슨 말씀인지 알았어요.”
“사무실에 올라가지 말고, 집에 가서 정장을 입고 오세요.”
“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 대리님은 정장을 어디서 구하려고요?”
“지점장님이나 부지점장님한테 빌려 봐야죠.”
“일단 알았어요.”
콩고 지점.
겨울이 라면 한 상자를 들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김종학 지점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 주었다.
“한 대리, 어서와.”
겨울은 라면 상자를 김종학 지점장 책상 옆에 내려놓고 인사를 건넸다.
“지점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아니. 과로사하기 일보 직전이야.”
“그렇게 일이 많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직장 생활하면서, 이렇게 바쁜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올해 임원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시겠네요?”
“만약에 나를 이사로 승진시켜 주지 않으면, 내가 본사로 쳐들어가서 농성하려고.”
“저도 동참할게요.”
“하하하, 알았어. 서서 얘기하지 말고, 회의실에서 편안하게 얘기하자고.”
“네, 지점장님.”
오랜만에 아만다가 서빙한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겨울이 말을 꺼냈다.
“지점장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얘기해 봐.”
“제가 바통고 대통령으로부터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는데, 입고 갈 정장이 없습니다.”
“대통령?! 그게 정말이야?”
김종학 지점장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공항에서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바통고 실장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겨울과 대화를 중단한 김종학 지점장은 하도진 부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하 부지점장이 4시까지 정장을 가지고 오기로 했어.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네, 충분합니다.”
“이젠 내가 부탁할 것이 있는데, 반드시 들어줘야 해.”
“말씀해 보십시오.”
“오늘 바통고 대통령님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비즈니스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나한테 전화 한 통화만 해 줘.”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