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소중한 자산
해외 법인의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오장식 전무는 정명훈 법인장의 인원 충원 요청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프리카 법인으로 가고 싶어 하는 대상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12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대상자들을 물색해 오고 있었지만, 요청을 받은 인원 일곱 명 중에서 이제 겨우 세 명을 선발했을 뿐이다.
“정 법인장은 태스크포스를 왜 운영하겠다고 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거야.”
그는 잔뜩 짜증 섞인 푸념을 내뱉고는 이진호 사장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이진호 사장이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내고 앉은 오장식 전무에게 말을 건넸다.
“오 전무,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프리카 법인에서 인원을 요청해 온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럽니다.”
“몇 명이나 요청해왔는데요?”
“일곱 명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작년에 그렇게 많은 직원들이 퇴사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안정혁 전 법인장과 민경진 부장만 퇴사한 상황입니다.”
“그럼 두 명만 충원해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정 법인장이 한국 직원들 다섯 명을 차출해서 태스크포스를 하나 만들어 놓은 상태입니다.”
이진호 사장은 임원 인사를 발표하는 날에 정명훈 법인장에게 태스크포스 운영과 관련한 얘기를 보고받은 기억이 났다.
그때 자기는 그의 아이디어가 신선해서 시범적으로 시행해 보라고 수락하고, 예산 지원까지 약속했다.
하지만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던 탓에 태스크포스에 한국 직원들을 몇 명 차출할 것인지 같은 세세한 내용까지는 묻지 않았다.
한국 직원이 다섯 명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지점마다 한 명씩 배치하려는 모양이었다.
“오 전무, 현재 몇 명을 확보한 상태입니까?”
“세 명입니다.”
“부족한 네 명은 어떻게 충원할 생각입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현재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으음…….”
끝말을 흐린 이진호 사장이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덕분에 사장실에는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팔짱을 풀고 이진호 사장이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이 사장님.]
“정 사장님, 커피 한잔을 같이 마셨으면 좋겠는데, 시간 괜찮습니까?”
[지금 회장님과 같이 있어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가할 때 연락 주십시오.”
[이 사장님, 회장님께서 굳이 따로 시간 내지 말고 지금 커피 마시러 오라고 하십니다.]
“아, 그렇군요. 곧 찾아뵙겠습니다.”
인사 담당 정재엽 사장과 통화를 끝낸 이진호 사장은 오장식 전무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회장님하고 담판을 지어 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네, 사장님.”
* * *
같은 시각.
송훈석 회장은 집무실에서 서동호 실장, 정재엽 사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 사장님, 이 사장이 용건을 밝혔나요?”
“아닙니다. 다짜고짜 커피 한잔 얻어 마시겠다는 말밖에 없었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이진호 사장이 가볍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정재엽 사장을 만나려고 했다면, 그 배경에는 인사와 관련해서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배경에 한겨울이 있을 것 같은 진한 예감이 들었다.
“서 실장, 부투야 실장이 이 사장한테 클레임을 제기한 것이 아닐까요?”
“클레임이라니요?”
“부투야 실장은 한겨울을 대리가 아닌 과장으로 승진시켜 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부투야 실장한테, 한겨울을 대리로 승진시킨다고 미리 언질해 놔서 그건 아닐 겁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재엽 사장은 한겨울이라는 인물을 기억해 내기 위해 모처럼 만에 두뇌를 혹사시켰다.
결국 작년 초에 두 가지 조건을 달아서 대한 그룹에 입사한 신입 사원 한겨울을 기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대한 그룹에서 대리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만 3년을 근무해야 한다는 인사 규정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거리낌 없이 입사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한겨울을 대리로 승진시켜 줬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겨울이 로열패밀리가 아닌 이상, 입사 1년 만에 대리로 승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한겨울이 아닌가?’
정재엽 사장은 속으로 혼잣말을 내뱉고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회장님께서 언급한 한겨울이 작년에 입사한 그 한겨울입니까?”
“네, 맞아요.”
“그럼… 진짜로 한겨울을 대리로 승진시켜 줬다는 말씀입니까?”
“만약에 한겨울의 경력이 3년만 됐으면, 과장으로 승진시켜 줬을 겁니다.”
“아니, 한겨울이 그렇게 뛰어난 인재라는 말씀입니까?”
“뛰어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작년에 한겨울 덕분에 우리 대한 그룹이 수주한 금액이 최소 칠팔십 억 달러는 넘었다는 겁니다.”
“에이, 회장님. 농담이 너무 심하십니다. 입사 1년도 안 된 풋내기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금액을 수주합니까?”
정재엽 사장이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 사장님, 내 말이 거짓말인지는 이진호 사장한테 물어보세요.”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진호 사장이 도착했음을 보고했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고, 커피 한잔을 내오세요.”
“네, 회장님.”
집무실에 들어온 이진호 사장은 송훈석 회장에게 목례를 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이 사장님, 한겨울 대리가 작년에 아프리카에서 어떤 성과를 얻었는지 정 사장님께 얘기해 주세요.”
비서가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진호 사장이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한겨울 씨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콩고민주공화국에 배치받은 후, 한 달이 지난 4월 말부터입니다.”
“4월 말이면… 신입 사원 수습기간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비아의 ZAHA 유통에서 가전제품을…….”
이진호 사장은 당시부터 최근까지의 사건들 중에서 굵직굵직한 것만 간추려서 풀어놓았다.
내용이 제법 많았기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40억 달러에 이르는 전염병 치료 전문 병원 프로젝트를 계약한 상태고, 코발트 광산 공동 개발 건은 이달 안으로 계약을 체결할 예정입니다.”
“정 사장님, 이래도 내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아,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정 사장님의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그냥 넘어가는 것으로 합시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재엽 사장과 짧게 대화를 끝낸 송훈석 회장은 이진호 사장한테 말을 건넸다.
“코발트 광산의 경제성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프랑스의 지질 회사가 조사한 바로는 약 15만 톤 정도가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략 50억 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흐음, 계약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코발트 광산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저희가 모두 부담하고, 코발트를 국제 시세 대비 35%를 할인해서 수입하는 조건입니다.”
“우리 회사의 이익은 얼마 정도 됩니까?”
“최소 10억 달러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달 안에 계약이 완료될 수 있도록 독려해 주세요.”
“네, 회장님.”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서동호 실장이 입을 열었다.
“이 사장님, 정 사장님께 무슨 부탁을 하려 했습니까?”
“사실은 12월 중순에 아프리카 법인에서 인원을 일곱 명을 충원해 달라고 했는데, 현재 세 명밖에 선발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정 사장님께 인원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려고 했던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때, 송훈석 회장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사장님, 아프리카 법인에서 인원을 일곱 명을 요청한 이유가 뭡니까?”
“두 명이 퇴사하는 바람에 자동 결손이 발생한 상황이고, 다섯 명은 태스크포스에 참여한 상태입니다.”
“태스크포스의 역할이 뭡니까?”
“저도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지금 정 법인장한테 직접 보고받는 게 어떻겠습니까?”
“알았어요. 전화해 보세요.”
이진호 사장은 정명훈 법인장한테 전화를 걸어 연결한 후, 핸드폰을 송훈석 회장에게 건네주었다.
송훈석 회장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사람들을 고려해서 스피커폰으로 전환시켜 놓고 통화를 시작했다.
“정 법인장, 내가 방금 전에 이 사장한테 아프리카 법인에서 진행할 태스크포스에 대해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태스크포스의 역할을 나한테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네, 회장님. 태스크포스에 대한 아이디어는 작년 7월에 한겨울 대리가 제안한 겁니다. 당시에 저희는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팀의 업무를 도와서…….]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송훈석 회장은 겨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콩고 지점의 고유 업무를 수행하기도 벅찬데, 그 바쁜 시간을 쪼개서 입찰팀까지 도와야했으니.
자기가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도 다른 대안을 생각해 냈을 법했다.
만약에 겨울이 태스크포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법인 직원들의 고충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아이디어를 제공한 겨울에게 대견함을 느끼면서, 정명훈 법인장의 설명에 집중했다.
[…팀명은 For The Africa이고, 줄여서 FTA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인원은 한국인 직원이 다섯 명, 현지 직원이 다섯 명입니다.]
“올해 FTA팀의 수주 목표는 얼마입니까?”
[최소 50억 달러는 넘겨 볼 생각입니다.]
송훈석 회장은 정명훈 법인장이 이렇듯 자신하는 이유를 단숨에 알아챘다.
머릿속에 떠오른 추측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즉시 물었다.
“흐음, 혹시 FTA팀에 한겨울 대리도 포함되어 있나요?”
[그게… 그렇습니다.]
“한 대리 혼자서도 50억 달러를 충분히 달성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
농담을 빙자한 의미심장한 말에 정명훈 법인장이 당황했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송훈석 회장은 아차 싶어서 재빨리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정 법인장, 농담인 거 알고 있죠?”
[하, 하하. 저는 회장님께서 진담으로 말씀하신 줄 알고 당황했습니다.]
“한 대리는 우리 회사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너무 혹사시키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아프리카 법인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들은 최우선으로 보내 줄게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중에 통화합시다.”
정명훈 법인장과 통화를 끝낸 송훈석 회장은 핸드폰을 이진호 사장에게 돌려주며 말을 건넸다.
“이 사장님, 다른 법인들의 상황도 아프리카 법인과 마찬가지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만약에 FTA팀의 성과가 확연히 드러나면, 모든 법인에 확대 운영할 수 있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정재엽 사장한테 시선을 옮기며 말을 건넸다.
“정 사장님은 이 사장님과 상의해서 이번 주 안으로 다섯 명을 선발하도록 하세요.”
“회장님, 이 사장님이 세 명을 선발해 놨다고 하지 않았나요?”
“FTA팀에 인원을 한 명 더 배치하도록 하세요.”
서동호 실장은 송훈석 회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송훈석 회장은 분명 지금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리라.
만약에 자기가 이 자리에서 언급하면 송훈석 회장의 계획이 탄로 날 수도 있었다.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회장님,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FTA팀장이 지점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럽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때, 서동호 실장이 할 말이 있다는 듯 발언권을 요청했다.
“회장님, 이왕이면 열 명을 채워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두 명을 추가로 보내자고요?”
“네. 인사담당에 잉여 인력이 몇몇이 발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사담당 박철헌 전 사장 밑에서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른 임직원들이 아직도 회사에 여러 명 남아 있었다.
이들에게 징계위원회를 열어서 자진 퇴사를 권유했으나, 이 중 몇 명은 퇴사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서 죄질이 무거운 두 명을 아프리카로 발령을 내고, 두 사람이 가지 못한다고 버티면 지시 불이행으로 퇴사시켜 버리자는 말이었다.
“서 실장, 생각해 놓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송훈석 회장의 말은 단호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