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네?! 제가요!
“서 실장, 어젯밤에 뭔 일이 있었나?”
송훈석 회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서동호 실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조금 골치 아픈 일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인데 그래?”
“어젯밤에 콩고민주공화국, 바통고 대통령의 비서실장인 부투야라는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서동호 실장은 부투야 실장에게 부탁받은 내용을 차례차례 보고했다.
“…코발트 광산 개발은 무조건 우리와 공동 개발을 하도록 만들어 놓겠답니다.”
“그러면 은센기 건은 우리가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
“저희는 투자자 입장이기 때문에 무케나 사장이 오케이했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계속에서 눈에 밟히는 한겨울을 떠올렸다.
겨울의 다른 입사 동기들은 이제 수습이라는 딱지를 갓 떼고 열심히 업무를 익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에 반해 천둥벌거숭이 같은 한겨울은 달랐다.
낯선 아프리카에 쫓기듯 발령을 받아 가서는 입사 10년 차쯤 된 중견 사원처럼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더니, 어느새 대한 그룹에 엄청난 이익을 안겨 주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엄청난 성과에 대한 화답으로 성과급이라도 왕창 주고 싶었지만, 최대 1,000%를 넘을 수 없다는 사규가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성과급 지급을 취소하고 다른 방안을 강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겨울은 어이없게도 열렬한 팬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 열렬한 팬인 부투야 실장은 자신들의 조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서운하다면서 노골적으로 표현해 온 것이고.
“서 실장, 그럼 우리가 한겨울에게 어떤 보상을 해야 좋다고 생각하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한겨울이 회사에 기여한 바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래그래. 그 점에는 동의하니까, 아이디어를 얘기해 봐.”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지만, 이번 기회에 사규를 신설해 보겠습니다.”
“흐음, 그렇게 해.”
* * *
겨울은 법인장으로 영전해 가는 정명훈 법인장의 업무 인수인계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런 일을 도맡아 해온 가쿠타 과장의 도움으로 별 어려움 없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가쿠타 과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부지점장님, 제가 소문…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부지점장님도 아세요?”
“소문이요? 이상한 소문이라… 글쎄요? 요 앞에 있는 술집의 안주가 갑자기 맛있어진 거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확실히 그것도 이상하긴… 아니, 아무튼 그게 아닙니다. 부지점장님이 법인장님과 함께 남아공으로 가신다는 소문 말입니다.”
“네? 제가요?”
“정말로 모르고 계셨군요.”
겨울의 머릿속에 지난 4월에 아놀드 대리에게 들었던 얘기가 스쳐 지나갔다.
아놀드 대리는 분명 지점에 발령받은 한국 사람들은 2∼3년에 한 번씩 로테이션이 이뤄진다고 했다.
그래서 겨울은 콩고 지점에서 최소 2년은 근무할 거라 생각하고 업무에만 올인하고 있었고.
그런데 발령을 받은 지 불과 8개월도 지나지 않아 인사이동에 관한 소문이 떠돌고 있단다.
겨울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저하고 법인장님이 동시에 빠지면, 콩고 지점은 어떻게 하고요?”
“부지점장님, 조직은 개인의 힘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운영되는 겁니다. 두 분이 동시에 빠지면 뭐… 얼마 동안은 불편을 겪겠지만, 금방 정상화될 겁니다.”
“그럼 이삼 년에 한 번씩 로테이션 돈다는 얘기는 뭔가요?”
“인사권자는 법인장님이십니다. 만약에 법인장님이 부지점장님을 인사이동시키겠다고 결정하면, 그게 곧 법이죠.”
그들이 민감한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남아공 법인에 출장을 간 정명훈 법인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겨울과 가쿠타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법인장으로서의 예를 갖춰 그를 맞이했다.
“법인장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어, 덕분에. 할 말이 있으니까, 두 사람은 회의실로 따라 들어와.”
“네, 법인장님.”
회의실에 들어온 정명훈 법인장은 상석에 앉자마자 먼저 시급한 사안부터 물었다.
“부지점장, 업무 인수인계서 작성은 어느 정도 완성됐나?”
“기본적인 것은 모두 완성된 상태입니다.”
“출력해서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쿠타 과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겨울은 이때다 싶어서 부투야 실장과의 일을 보고했다.
“법인장님, 제가 그저께 오전에 은센기 씨와 함께 부투야 실장 등을 병문안 갔습니다. 그때 부투야 실장이 은센기 씨에 대한 보상 방안을 제시해 왔습니다.”
겨울은 부투야 실장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사실 그대로 보고했다.
“흐음, 우리는 문제가 없다지만, 무케나 사장이 동의해 줄까?”
“그저께 오후에 부투야 실장한테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저희 쪽은 서동호 비서실장님께 컨펌을 받았고, 무케나 사장한테도 동의를 이끌어 냈답니다.”
“무케나 사장이 우리 회사가 아닌 다른 투자자와 계약을 체결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되면 코발트 광산까지 도로 개설은 불가능하다고, 부투야 실장이 무케나 사장한테 못을 박아 놓겠다고 했습니다.”
“은센기 씨는 뭐라고 했나?”
“자기가 그 사업을 꼭 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알았어. 업무 인수인계서에 그 내용을 첨가시켜.”
“네, 법인장님.”
잠시 후, 가쿠타 과장이 업무 인수인계서를 출력해 가지고 들어왔다.
업무 인수인계서를 받아든 정명훈 법인장은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면서 수정과 첨가를 지시했다.
“…코발트 광산 공동 개발 건은 신임 지점장이 추진할 예정이니까, 자료를 첨부해 놓도록 하고.”
“법인장님은 무케나 사장을 만나러 못 가십니까?”
“지금 대한건설에서 자료 검토 중에 있는데, 빨라야 12월 중순에 올 수 있다고 하더라고.”
“네, 알겠습니다. 제가 신임 지점장님과 함께 코발트 광산 개발 업무를 추진하겠습니다.”
“부지점장은 이제 그 업무에서 손 떼.”
“…….”
겨울은 그제야 인사이동설이 소문이 아니라 사실임을 눈치챘다.
“…저도 법인장님을 따라가는 겁니까?”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는 인사이동 발표가 날 때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우리 법인에서는 내년에 태스크포스를 운영할 예정이야. 각 지점에서 수행하는 세 번째 업무, 즉 대한 그룹과 협업해야 하는 업무를 태스크포스가 전담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겨울은 지난 8월 초에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 과정에서 생긴 일을 기억에 떠올렸다.
당시에 자신과 정명훈 법인장이 입찰 업무에 동원되는 바람에 지점 업무는 거의 손을 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정명훈 법인장한테 볼멘소리를 했더니만, 자신의 얘기를 귀담아 듣고 태스크포스를 추진한 것 같았다.
“법인장님, 제가 태스크포스에 합류하는 겁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
정명훈 법인장이 확답을 주자, 겨울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정명훈 법인장은 가쿠타 과장에게도 말을 건넸다.
“가쿠타 과장, 태스크포스에는 각 지점에서 현지 직원들이 한 명씩 차출될 예정이야. 콩고 지점에서는 가쿠타 과장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가쿠타 과장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법인 사무실이 위치하고 있는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자신에게 있어 꿈과 같은 도시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비싼 물가 수준, 더불어 딸린 식구들 문제까지.
산적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좋은 기회임은 분명했으나 섣부르게 결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정명훈 법인장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태스크포스에 합류하면 연봉은 지금보다 30% 인상시켜 줄 예정이고, 숙소도 제공해 줄 거야.”
“가족들은…….”
“크지는 않지만 사택을 제공할 거니까, 같이 갈 수 있을 거야.”
“그럼! 크흠, 그럼 저도 태스크포스에 합류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기존에 맡고 있던 업무는 싱쿰바 대리한테 인계해 주고.”
“알겠습니다.”
가쿠타 과장이 잔뜩 상기된 표정을 한 채 문을 열고 나가자, 두 사람은 다른 주제를 입에 올렸다.
“부지점장, 지금부터 하는 얘기도 당분간 비밀을 준수해야 할 거다.”
“네.”
“부지점장은 내년 1월 1일에 대리 승진이 될 거야. 확정된 사안이니까 알아 두고.”
“네?! 제가요?”
겨울은 손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 그룹에서 대리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입사해서 만 3년 동안 근무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데도 입사 11개월 만에 대리로 초고속 승진을 시켜 준다고 하니, 놀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일 것이었다.
“왜? 못 믿겠나?”
“네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부지점장이 콩고 지점, 아니, 아프리카 법인에 와서 8개월 동안에 이룬 성과에 비하면, 대리 승진은 오히려 약소하지.”
겨울은 진짜로 꿈을 꾸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 허벅지를 슬쩍 꼬집어 보았다.
짜르르.
고통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절대로 꿈은 아니었다.
“지난 8개월간 근무하면서 정들었던 직원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서운하네요.”
“한 대리가 태스크포스에서 담당해야 할 지역이 콩고 지점이야. 이 나라를 뻔질나게 들락날락거릴 거니까, 그렇게 가슴 아파할 필요는 없어.”
“저는 언제 법인으로 가면 됩니까?”
“12월 초에 사원 인사이동이 발표되면, 그때 움직여.”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오전.
토요일이었지만, 겨울은 공항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은센기와 함께 카낭가에 살고 있는 무케나 사장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움직인 결과, 무사히 카낭가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겨울 씨, 바쁜데 굳이 직접 만나서 작별 인사를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겸사겸사 하는 거죠. 기왕이면 얼굴을 마주보고 인사하는 편도 좋고요.”
은센기는 겨울이 무케나 사장을 만나러 가는 이유가 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케나 사장으로부터 부투야 실장이 제안한 아이디어에 대한 확답을 받아 주기 위해서.
은센기는 고맙다는 말을 다른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나중에 킨샤사에 오면 저한테 반드시 연락해야 하는 거 알죠?”
“그럼요. 남아공에서 출발하기 전에 전화할게요.”
“겨울 씨가 승승장구해서 아프리카 법인장이 되기를 바랄게요.”
“하하하! 그럼 한 20년 만 기다려 주세요.”
“푸흡, 그렇게나 오래 걸려요?”
“아마도요.”
카낭가 공항에 무사히 도착한 겨울과 은센기는 무케나 사장의 저택으로 가기 위해 택시 승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몇 발자국 걷지 않았을 때, 놀랍게도 두 사람 앞에 무케나 사장이 나타났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는 두 사람을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아니, 무케나 사장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아들의 친구들이 온다고 하는데, 당연히 나와 봐야죠.”
“고맙습니다, 사장님.”
“자자, 인사는 됐고, 혼잡하니까 빨리 밖으로 나갑시다.”
무케나 사장의 차를 타고 대저택에 도착한 세 사람은 시원한 음료와 에어컨 바람으로 땀을 식혔다.
그러고는 곧바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은센기, 내 광산에서 채굴한 코발트를 마타디 항까지 제대로 운송해 줄 수 있겠나?”
“그럼요. 저를 믿어 주십시오.”
“사장님, 은센기 씨의 성실함과 책임감은 제가 보증합니다. 코발트 운송 사업권을 맡기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겨울이 적극적으로 은센기를 지원 사격했다.
“한 부지점장님, 걱정 마세요. 제 광산에서 코발트를 채굴하기 위해서라도 은센기에게 운송 사업권을 줄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하, 그렇습니까?”
겨울이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는 사이, 무케나 사장은 눈을 반짝이며 겨울에게 물었다.
“그보다 부투야 실장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사장님, 제가 말씀드릴게요.”
겨울보다 은센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은센기로부터 겨울의 얘기를 들은 무케나 사장은 부투야 실장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코발트 운송 사업을 꼼꼼하게 챙기는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생명을 구해 주었으니, 이렇듯 성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무케나 사장이 짧게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은센기의 설명도 끝이 났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다른 내용들은 사장님이 알고 있어 봐야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숨겼습니다.”
“알았네.”
“만약에 사장님께서 사업하시는 데 어려움이 발생하면, 저한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부투야 실장님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서라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호오, 정말 그래 줄 수는 있고?”
은센기의 허세가 바로 먹혀드는 순간이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