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획기적인 아이디어
아프리카 법인장이라니.
게다가 이사도 아닌, 상무였다.
정명훈 지점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서 그간 지나온 자신의 발자취를 조용히 반추해 보았다.
대한 그룹에 입사할 당시만 하더라도 ‘계열사의 사장이 돼서 회사를 멋지게 경영하리라’ 이런 호기로운 상상을 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희망은 점점 작아졌지만, 부장을 달기 전까지는 입사 동기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런대로 순탄하게 지냈다.
그러나 부장으로 승진하고부터는 달랐다.
아프리카에 발령받아 온 이후부터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지난 3년 동안은 임원 승진에서 번번이 밀려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올해까지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부장으로 직장 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몰린 것이었다.
하지만 천운인지, 반전이 일어났다.
신입 사원 한겨울.
그의 엉뚱한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콩고 지점은 엄청난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결과로 특별 상여금을 비롯해서 상무 승진에, 아프리카 법인장 자리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정명훈 지점장은 이 모든 것이 겨울의 덕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한겨울, 정말 고맙다.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으마.”
* * *
[겨울 씨, 이제 핸드폰 전원을 켜 놓고 있어도 되죠?]
“그래도 될 것 같아요.”
한편, 겨울은 은센기와 통화 중에 있었다.
겨울은 정명훈 지점장이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 은센기한테 전화를 걸 것을 예상하고 급히 행동에 나섰다.
때문에 은센기에게 오늘 아침까지 핸드폰 전원을 꺼 놓고 있어 달라는 다소 엉뚱한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가 핸드폰 두 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부탁이기도 했다.
[반군 기지에 침투했던 사건을 정 지점장님께 숨기려는 이유가 뭔가요?]
따지고 보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 일을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이 떠벌리고 싶은 마음이 없을 뿐이었다.
자칫 목숨까지 잃을 뻔한,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기도 한 일을 말해 봐야 허세의 일종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좋아 다행이었지, 사고라도 났다면 회사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지점장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서요.”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으면 애초부터 하지 말았어요. 어휴, 아무튼 그 얘기는 그만해요. 그러고 보니 무케나 사장님의 코발트 광산과 관련한 문제는 어떻게 됐나요?]
“어제 무케나 사장님과 통화했는데, 다음 주 안에 도로 신설 허가가 날 것 같다네요.”
[이야! 그거 정말 잘됐네요.]
은센기도 내심 걱정했는지, 기뻐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조만간에 카낭가에 갈 일이 있으니까, 은센기 씨도 같이 가시죠.”
[그때는 차가 아니라 비행기를 탔으면 좋겠는데요.]
“하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VIP 두 분은 만나 보셨나요?]
“네. 어제 병원에서 인사드렸어요.”
[그분들의 신분이 어떻게 되나요?]
“한 분은 부총리 겸 내무부 장관이었고, 또 한 분은 보건장관이었어요.”
[와… 그럼 반투야 씨는요?]
겨울은 장난을 칠까 하다가 사실대로 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바통고 대통령님의 비서실장이었어요.”
[어쩐지…….]
은센기도 부투야가 더 높은 신분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분들을 만나게 해 드릴게요.”
[제가 그분들을 만나서 뭐 하게요?]
“혹시 알아요? 그분들이 은센기 씨의 활약에 감동을 받았을지.”
[에이, 그럴 리가요. 그래도 기회가 되면 뭐, 만나 볼게요.]
“회사에 거의 도착했네요. 나중에 통화해요.”
겨울이 전화를 끊자, 운전기사인 쿠엘이 말을 붙여 왔다.
“제가 부지점장님을 기다리는 동안 지점장님의 운전기사인 샨트사와 통화했는데, 지점장님의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답니다.”
겨울은 정명훈 지점장이 왜 기분이 좋은지 대충 감이 잡혔다.
송훈석 회장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임원 승진에 대한 언질을 받았으리라.
“승진이 확실해진 게 아닐까 싶네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지점장님이 승진하시면… 콩고 지점을 떠나시겠죠?”
“으음,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새로 오시는 지점장님도 좋은 분이면 좋겠네요.”
* * *
남들보다 회사에 항상 일찍 출근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정명훈 지점장은 출근하자마자 추성민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선배님, 정말 고맙습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방금 전에 사장님한테 승진에 대한 언질을 받았습니다.]
“오오, 추 팀장도 승진하나 보구만.”
정명훈 지점장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네! 이게 꿈인지 생신지… 이 모든 게 다 콩고 지점 덕분입니다.]
“나중에 나하고 우리 부지점장한테 거하게 한턱 쏴야 하는 거 알지?”
[그럼요. 지금 당장 킨샤사로 넘어갈까요?]
“하하, 됐어. 정식으로 임원 인사 발표가 나면, 그때 한잔하는 것으로 하자고.”
[네, 선배님. 그나저나 법인장으로 누가 오는지 알고 계세요?]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 역시 모른 척 추성민 팀장에게 되물었다.
“글쎄? 나보다 추 팀장의 안테나가 더 높은 거 아니었어?”
[오늘 새벽에 회장님과 통화할 때 아무런 말씀 없으셨어요?]
“일개 법인장의 인사까지 신경 쓸 정도로 회장님이 한가하신 분은 아니잖아.”
[하긴… 그렇긴 하죠.]
그때, 창밖으로 겨울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정명훈 지점장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튼 이제 일해야 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고.”
[네, 선배님.]
서둘러 전화를 끊은 정명훈 지점장은 사무실로 들어오는 겨울을 불렀다.
“부지점장, 나하고 커피 한 잔 할까?”
겨울은 정명훈 지점장이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 이유를 단박에 알아챘다.
임원으로 승진한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리라.
당사자가 스스로 밝힐 때까지 모르고 있는 척하는 것이 예의였다.
“네, 알겠습니다.”
회의실.
어느새 출근한 아만다가 커피를 가져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정명훈 지점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새벽에 회장님과 통화한 건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나한테 임원 승진에 대한 언질을 해 주셨어.”
“이사로 승진하신 겁니까?”
“아니. 상무로 특별 승진했어.”
“네!?”
겨울이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내질렀는지, 가쿠타 과장을 비롯한 여타 직원들이 회의실 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물어볼 정도였다.
그런 직원들을 손짓으로 내보낸 정명훈 지점장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보다 더한 일도 겪었으면서,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겨울은 정명훈 지점장이 어떤 의도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의약품을 되찾으러 반군 기지에 침투했던 사실을 알아낸 것이리라.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은센기 씨가 아니면, 방법이 없을 줄 알았나?”
“혹시 부투야 실장님이 얘기해 주셨나요?”
“아니. 코비 브라이언 박사님이 알려 줬어.”
“어? 지점장님이 어떻게 그분을 알고 계세요?”
“그렇게 유명한 분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겨울은 정명훈 지점장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챘다.
카낭가 출장 보고 당시에 겨울이 국경 없는 의사회를 만났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브라이언 박사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때 정명훈 지점장은 브라이언 박사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 알고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언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 봐야 백해무익하기 때문에.
“뭐, 아무튼 내가 아까 상무로 승진한 것까지 얘기했나?”
“네, 상무님.”
“하하하! 부지점장한테 상무라는 얘기를 들으니까, 이제야 실감이 좀 나는 것 같은데?”
정명훈 지점장이 기쁘다는 듯 선홍색 잇몸을 보이며 밝게 웃었다.
“상무로 승진하셨으니까, 이제 콩고 지점을 떠나시겠네요?”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아.”
“어디로 가시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부지점장이 놀라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면 얘기해 줄 수도 있지.”
순간, 겨울은 촉이 강하게 왔다.
“혹시… 아프리카 법인장 자리로……?”
“어라? 알고 있었어?”
“네?! 정말이었습니까?”
“어? 어어… 맞아.”
“법인장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직속상사가 상무로 승진해서 법인장으로 영전해 간다고 하는 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줄이라는 것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부탁할 게 있어서야.”
“네,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내일 임원 인사 발표가 나면, 아마 내가 정신없이 바빠질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대신 콩고 지점의 미결 업무를 챙겨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음, 혹시 나한테 바라는 건 없나?”
겨울은 지난번에 가쿠타 과장과 대화를 나누면서 들었던 얘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현지 직원들 중에서 유능한 직원을 시범적으로 부지점장 역할을 맡겨 보는 건 어떨까요?”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의 아이디어에 격하게 공감했다.
각 지점에 근무하는 현지 직원들 중에는 한국 사람들보다 유능한 직원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도 있었다.
“지점에 근무하는 우리나라 직원들이 반발하지 않을까?”
“그럼 부지점장을 두 명을 두는 게 어떨까요? 그렇지 않아도 콩고 지점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일이 많습니다.”
“알았어. 이번 사원 인사 때 시범적으로 도입해 볼게.”
“제 의견을 수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기는 뭘. 이제 업무 얘기 좀 잠깐 하지.”
“네, 말씀하십시오.”
“먼저 부투야 실장한테 전화해서 방문해도 좋겠는지 물어봐.”
“네, 법인장님.”
짧게 대답한 겨울은 즉시 부투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정명훈 지점장의 의견을 전달하고 약속 시간을 정했다.
“오후에는 중요한 일이 있다고, 가급적이면 오전에 와 달랍니다.”
“좋아. 조금 있다가 출발하자고.”
“아, 부투야 실장을 만나러 갈 때, 가쿠타 과장도 같이 데리고 같으면 좋겠습니다.”
“음? 가쿠타 과장? 왜?”
“제가 어제 기회가 되면 부투야 실장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거든요.”
“그럼 그렇게 해. 홍삼 선물 세트도 챙기고. 남은 거 전부 가져다주자고.”
“네, 법인장님.”
“회의실을 나가는 순간부터 지점장인 거 알고 있지?”
“그야 물론입니다.”
* * *
킨샤사 국립대학 병원 VIP 병실.
겨울과 가쿠타 과장의 손에 들려 있는 홍삼 선물 세트를 본 부투야 실장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정 지점장님, 이 많은 홍삼을 저한테 모두 주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번 기회에 어머님께 왕창 효도하십시오.”
“하하하, 정말 고맙습니다.”
부투야 실장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겨울과 가쿠타 과장은 들고 있던 홍삼 선물세트를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정명훈 지점장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동행한 가쿠타 과장을 부투야 실장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윙윙―
그때, 정명훈 지점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부투야 실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옆쪽에 따로 마련된 보호자 대기실로 이동했다.
겨울은 이때다 싶어서 아침에 은센기와 나눈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시간이 괜찮으시면, 다음에 은센기 씨와 함께 병문안을 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전해 주세요.”
잠시 후, 누군가와의 전화를 끝낸 정명훈 지점장이 다가와 부투야 실장에게 말을 건넸다.
“부투야 실장님, 전염병 전문 치료 병원 설립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대한 그룹 회장님께 정식으로 보고서가 올라갔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묻는 부투야 실장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저희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대한 그룹에서 병원 설립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판단하면 됩니까?”
“네, 그렇습니다.”
“후우, 정말 다행이네요.”
부투야 실장은 이번 일에 사활을 건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 정명훈 실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답례를 하라고 지시하셨고, 저는 콩고민주공화국 국민들에게 혜택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정기적으로 기초 의약품을 지원하자고 제안한 상태입니다. 실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장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부투야 실장은 일고의 고민도 없이 즉시 결정을 내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