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기대를 초월한 성과
“감사합니다, 사장님!”
정명훈 지점장이 보호자 대기실이 떠나갈 듯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 지점장, 컨펌은 회장님께서 하셨습니다.]
“네? 회장님이요?”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나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확실히… 사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회장님과 통화할 때 감사하다고 하세요.]
일개 지점장과 그룹 회장의 격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아무리 출세에 눈이 먼 놈이라도 회장과 통화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정명훈 지점장도 송훈석 회장과 통화하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와 통화하다가 말실수를 하거나 묻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충분히 상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회장님과 반드시 통화해야 하는 겁니까?”
[회장님께서는 한겨울 씨가 부투야 실장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는지 상당히 궁금해 하셨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이 싫다는 뜻을 에둘러 전달했지만, 단칼에 거부당했다.
이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정면 돌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여간 수고했습니다. 내일 다시 통화하죠.]
“아, 사장님. 지금 당장 주무시려는 건 아니시죠?”
정명훈 지점장이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이진호 사장을 불러 세웠다.
[왜요? 내가 또 컨펌해 줘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까?]
“네. 카반구 보건장관이 저희에게 줄 선물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선물이 뭔지는 모르고요?]
“네.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연락주세요.]
“네, 사장님.”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에게 통화내용을 간단하게 언급해 주고 다시 병실로 향했다.
“이제 카반구 보건장관의 선물을 받으러 가 보자고. 예상한 것이어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러게요.”
병실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부투야 실장에게 방금 전에 이진호 사장에게 컨펌받은 내용을 전달했다.
“부투야 실장님, 대한 그룹 송훈석 회장님께서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의 제안을 조건 없이 수용해 주셨습니다.”
부투야 실장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자기가 SUV 자동차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명훈 지점장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대한 그룹 총수의 구두 결재까지 받아 냈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2박 3일이 걸려도 끝내지 못할 일을, 대한 그룹에서는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서 깔끔하게 정리해 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는 서둘러 상념을 거둬들이고 입을 열었다.
“정 지점장님, 정말로 대한 그룹 회장님께서 조건 없이 수용해 주셨습니까?”
“네, 실장님.”
“하여간 한국의 업무 처리 속도를 따라갈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어디도 없을 거예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SUV 자동차 건은 내일 오전 중에 언론을 통해서 공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부투야 실장이 언론을 동원하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챘다.
도요타 자동차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고육지책이리라.
이 문제는 콩고민주공화국과 도요타 자동차의 문제였기 때문에 자기가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부투야 실장님, 본 계약은 언제 체결할까요?”
“가급적이면 이번 달을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SUV 자동차는 늦어도 내년 상반기에는 우리나라에 도착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서둘러 보겠습니다.”
“이제 다른 얘기를 해 볼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이제 카반구 보건장관이 주려는 선물에 대해서 언급할 모양이었다.
“네, 말씀해 보십시오.”
“우리나라는 의료 시스템이 형편없이 낙후되어 있어서, 많은 국민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에볼라 바이러스, 에이즈, 홍역 등 전염병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죠. 그런 이유로 몇 년 전부터 킨샤사, 루룸바시, 카낭가 등의 주요 도시에 전염병 전문 치료 병원을 설립해서 운영할 계획이었습니다만,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예산 부족 때문입니다.”
부투야 실장이 길게 설명한 뒤, 목이 마른지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에 겨울이 병상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물을 잔에 따라 그에게 건넸다.
정명훈 지점장은 부투야 실장이 일부러 말을 끊었다고 판단했다.
이유는 보나마나 빤했다.
간 보기.
그의 계획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상부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부투야 실장은 물을 마시면서 정명훈 지점장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면밀하게 살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
즉, 자신의 의도를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그가 부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면서, 부투야 실장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내년부터 이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예정이고, 1차로 킨샤사에 병원을 설립할 예정입니다. 이 병원들을 대한건설에서 시공해 주십시오.”
“이것 참… 저희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선물이라는 표현보다는, 거래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싶네요.”
정명훈 지점장은 거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의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음을 눈치챘다.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이진호 사장에게 보고해서 컨펌을 받기로 결정했다.
“실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전염병 전문 치료 병원과 관련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한도에서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무엇보다도 전염병 전문 치료 병원 건설 비용을 어떤 방법으로 상환해 줄 것인가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속 보이는 것 같아서 일단 말을 아꼈다.
“실장님, 저희가 그 병원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한 자료를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부투야 실장은 마치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정명훈 지점장에게 건네주었다.
정명훈 지점장은 USB를 받아 겨울에게 건네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병원들의 공사 금액은 어느 정도 됩니까?”
“킨샤사의 경우에는 7억 달러 정도 되고,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4에서 5억 달러 규모입니다.”
정명훈 지점장 자신은 비록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에 소속되어 있지만, 대한건설의 제3의 멤버라고 할 정도로 이런 종류의 입찰에 많이 참여했다.
따라서 이제는 공사 금액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힐 정도로 전문가 수준에 올라와 있었다.
땅값이 매우 저렴한 이 나라에서 7억 달러짜리 공사라면, 상당히 규모가 큰 병원을 건설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7억 달러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 의료 장비까지 공급하고 설치해 달라는 뜻이구나.’
정명훈 지점장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즉각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부투야 실장님, 턴키 베이스 방식(Turn―key Method)이라고 생각하면 됩니까?”
“네,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상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제일 중요한 돈 얘기를 꺼낼 때가 되었다.
“비용은 어떤 방법으로 결제해 주실 예정입니까?”
“미안하지만, 지하자원으로 상환했으면 좋겠습니다.”
설마가 역시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실망한 표정을 숨기는 것에는 도가 튼 정명훈 지점장이었다.
“코발트로 상환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콜탄(Coltan)으로 상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부족하면 코발트를 추가해서 상환했으면 합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지금도 콜탄을 콩고에서 매입해서 대한전자로 수출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콜탄은 핸드폰 및 컴퓨터에 꼭 들어가는 금속 물질로 전 세계 매장량의 90% 이상이 콩고민주공화국에 매장되어 있었다.
문제는 콜탄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 밀림 지대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 밀림과 수많은 야생동물들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어 여러 환경보호 단체가 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에 콜탄 채굴을 중단해 달라고 여러 번에 걸쳐서 권고했지만, 허공에 대고 외치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부투야 실장님, 결제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코발트와 마찬가지로 국제가격의 25%를 할인해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언제까지 결정해 드리면 좋을까요?”
“적어도 내년 상반기에는 병원 착공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본사 사장님께서 제 전화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깐 통화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보호자 대기실로 이동한 정명훈 지점장은 이진호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부투야 실장에게 제안받은 내용을 보고했다.
“제가 USB에 들어 있는 자료를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정 지점장, 전염병 전문 치료 병원은 전국에 몇 개가 설립될 예정이라고 합니까?]
정명훈 지점장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제일 중요한 내용을 파악하지 않았다니.
후회했지만, 이때야말로 임기응변을 발휘할 때였다.
“사장님, 부투야 실장에게 건네받은 USB에 들어 있는데, 아직 열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하, 알았어요. 콜탄의 국제 시세가 얼마 정도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까?]
“1㎏에 600달러 선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상당히 비싸네요?]
“콜탄은 대체재가 없기 때문에 수요가 많아지면 가격이 더 상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한전자에서 콜탄을 얼마나 필요로 합니까?]
“1년에 1,500톤 정도 수입해 가고 있습니다만, 양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겁니다.”
[1,500톤이라…….]
이진호 사장이 하던 말을 멈추고 생각할 것이 있는지 끝말을 흐렸다.
정명훈 지점장은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이진호 사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정 지점장, 이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지금 바로 회장님께 보고할 테니, 부투야 실장에게는 최대한 빨리 답변을 준다고 하세요. 단, 긍정적인 방향으로요.]
“네, 알겠습니다.”
병실로 돌아온 정명훈 지점장은 이진호 사장과의 통화 내용을 전달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서 답변해 드리겠다고 합니다.”
“후우, 정말 다행이네요.”
제안이 거부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지, 부투야 실장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명훈 지점장은 이 정도면 부투야 실장한테 받을 선물은 모두 받았다고 판단했다.
이제 무케나 사장에게 부탁받은 내용을 꺼내는 일만 남아 있었다.
부투야 실장을 병문안 온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다.
“저희가 실장님께 부탁할 것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어렵지 않은 부탁이면,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한겨울 씨.”
정명훈 지점장이 겨울을 호명한 뒤, 뒤로 물러났다.
겨울은 목을 풀어주기 위해서 가볍게 헛기침한 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투야 실장님, 지난번에 트시키파로 이동하던 도중에 무케나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기억하고 계십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코발트 광산 개발과 관련한 내용이었잖아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코발트 광산 개발이 좌초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태입니다.”
“네?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무케나 사장님이 소유하고 있는 광산까지 진입하기 위해서는…….”
부투야 실장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로 신설 허가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뇌물로 요구하다니.
부투야 실장은 자국 공무원들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창피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공무원들이 박봉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100만 달러의 뇌물 요구는 해도 해도 너무한 처사였다.
부패한 공무원 놈들 때문에 자신의 나라가 창피를 당했다 생각하자, 부투야 실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으득.
‘내가 그놈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사람이 아니다.’
부투야 실장이 그렇게 각오를 다지는 동안에 겨울의 설명이 끝이 났다.
“…해서 도로 신설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무케나 사장이 후사하겠다고 합니다.”
“한겨울 씨, 제가 무케나 사장과 직접 통화해서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투야 실장님!”
부투야 실장은 겨울이 과할 정도로 감사를 표현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코발트 광산 개발은 반드시 대한 그룹과 같이 진행하라고 얘기해 놓을게요.”
“그렇게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겨울과 정명훈 지점장은 계획했던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부투야 실장의 병실을 나섰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