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잘못 알고 있는 VIP 정체
“후아… 이제 살겠네.”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배낭을 벗어서 자동차 트렁크에 내려놓은 램버트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다는 반증이이리라.
겨울도 램버트 박사처럼 땅바닥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교수님, 이곳은 반군 기지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안전한 곳으로 최대한 빨리 떠나야 합니다.”
“아, 그렇죠.”
램버트 박사는 겨우 몸을 일으켜 차에 올라탔다.
그때, 은센기가 겨울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차 키 주세요.”
“제가 운전해도 됩니다.”
“겨울 씨는 제 본업이 택시 운전기사라는 사실을 깜빡깜빡하는 것 같네요.”
“하하, 알겠어요.”
은센기는 반군들에게 들킬 것을 우려해서,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라이트를 켜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가로등도 없고 폭우가 내리는 캄캄한 밤길을 운전하다 보니, 자연히 속도를 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던 도중, 겨울이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어서 고개를 뒤로 돌려 램버트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교수님, 브라이언 박사님께 빨리 전화해 주세요.”
“아차차.”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램버트 교수는 전원을 키고, 브라이언 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는 연결되었다.
송신음이 겨울의 귀에 들리는 것으로 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려는 것 같았다.
[램버트 교수, 성공했습니까?]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브라이언 박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네. 방금 전에 반군 기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한겨울 씨와 은센기 씨에게도 내가 정말 고마워한다고 전해 주세요.]
“지금 박사님과 스피커폰으로 통화하고 있어서 두 사람도 들었습니다.”
[아, 목소리가 울리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군요?]
“네, 박사님. 아마 이 속도대로 가면 20분 정도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수술 준비를 해 놓고 있을게요.]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브라이언 박사와 통화를 끝낸 램버트 교수는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두 분들도 브라이언 박사님의 얘기 들었죠?”
“네, 들었습니다.”
“두 분의 희생 덕분에 생명이 위중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은센기가 말문을 열었다.
“교수님, 반군 기지 창고에 남아 있는 의약품은 어떻게 회수하죠?”
“VIP들이 알아서 하겠죠.”
“네? 의사 분들이 어떻게요?”
“음? 의사 분들이라뇨?”
램버트 교수가 은센기의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생명이 위독한 VIP들이 동료 의사들 아닙니까?”
“하하하, 아닙니다. 그분들은 이 나라의 정부 고위 관료들입니다.”
“네?!”
은센기가 진심으로 깜짝 놀랐는지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왜 그렇게 놀라죠?”
“저는 고위 관료들이 이런 오지를 다닌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어서요. 그나저나 이런 곳까지 온 이유가 뭐랍니까?”
“사실은 어제 오후에 국경 없는 의사회의 현장 사무소 개소식이 예정되어 있었어요. 이를 축하하기 위해서 정부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것이고요.”
조금 전까지 겨울은 VIP들이 이 지역의 명망 있는 유지들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부 고위 관료들이란다.
VIP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자기도 일조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뿌듯한 겨울이었다.
겨울은 그들이 누군지 몹시 궁금했다.
당장 VIP들의 신분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겨울이 적당한 시기를 찾고 있는 도중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예정되어 있었다는 말씀은… 현장 사무소 개소식을 못했다는 말인가요?”
“네. 폭우가 너무 심해서, 오늘 오전으로 개소식을 연기했습니다. 고위 관료들은 킨샤사로 되돌아갔다가 올 수 없어서 마을에서 하룻밤 묵기로 결정했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초대해서 마을 잔치를 벌이려던 순간에 반군 놈들이 쳐들어온 겁니다.”
“아, 그래서 사람들이 많았던 거군요?”
“그렇죠.”
“그런데… 교수님, 반군 놈들이 어떻게 제시간에 맞춰서 마을을 습격했을까요?”
“사실 저희도 그게 의문이긴 합니다.”
겨울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은둔부가 반군에 가담하고 있던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실수로 그 얘기를 흘려서 이런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은둔부도 VIP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겨울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교수님, 정부 고위 관료들을 굳이 VIP라고 지칭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 그분들은 항상 반군들의 테러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 신분을 숨긴 겁니다.”
“보통 VIP분들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니면, 오히려 반군들의 눈에 더 많이 노출될 수 있어서 비밀리에 운전기사 정도만 데리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고위 관료 생활하는 것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 보이네요.”
“하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희도 VIP분들의 신분을 알려고 하면 안 되겠네요?”
“글쎄요? 본인들한테 직접 듣는 게 낫지 않을까요?”
램버트 교수의 말에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VIP들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수술에 들어가면, 적어도 몇 시간은 걸릴 것이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하더라도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이고, 면회가 가능하려면 적어도 하루 이틀은 더 걸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겨울과 은센기는 날이 밝으면 킨샤사로 떠날 예정이었기에 VIP들을 만날 가능성은 없다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지금 램버트 교수는 VIP들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겨울은 잔뜩 궁금함을 담아서 램버트 교수에게 물었다.
“음, 아무래도 VIP분들을 병문안한 뒤에 킨샤사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싶네요.”
“그런가요… 언제쯤 병문안이 가능할까요?”
“아무리 늦어도 내일 중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분들을 만나 뵙고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마을에 도착한 겨울 일행은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의료진들에게 의약품이 가득 들어 있는 배낭을 트렁크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램버트 교수는 의료진들과 함께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
겨울과 은센기는 국경 없는 의사회 측이 마련해 준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의료진들이 사용하는 샤워 시설을 찾아 빗물에 섞인 피와 땀을 씻어 낸 후, 차에서 가지고 온 캐리어를 열어서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두 사람이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텐트에 뉘었을 때에는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 * *
“헉!”
악몽을 꾼 겨울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텐트 안이었다.
‘휴우, 꿈이었구나. 다시 돌아가지 않아 정말 다행이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겨울은 일어나 앉으며 옆자리에 누워 있는 은센기의 상태를 살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자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겨울은 은센기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텐트 지퍼를 내리고 밖으로 나갔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굳어진 몸을 풀어준 뒤, 바지에서 핸드폰을 꺼내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부지점장. 어디쯤 오고 있나?]
“지점장님, 킨샤사로의 복귀는 하루 이틀 정도 늦어질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어?]
어젯밤에 있었던 사건을 보고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을 것이 분명했다.
겨울은 킨샤사에 복귀해서 자세하게 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있긴 합니다만, 주요한 내용은 어제 내린 폭우로 산사태 때문에 도로가 통제되어서 이동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군. 여기도 도시가 잠겨서 난리인데, 그곳도 마찬가지인가?]
“네, 그렇습니다.”
[알았어. 조심해서 오고, 월요일에 보자고.]
겨울은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겨울은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서 이리저리 발걸음이 닿는 대로 움직였다.
천만다행으로 집들은 예상보다 반군들의 피해를 많이 입지 않은 듯했다.
문득 겨울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마을에는 어린아이들만 보일 뿐이고, 어디에도 어른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지나가던 한 아이에게 물어봤더니, 어젯밤에 죽은 사람들을 땅에 묻기 위해서 마을 뒤편으로 몰려갔다고 했다.
겨울도 따라가서 뭐라도 돕고 싶었지만, 이번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결국 발걸음을 돌려 텐트로 향하는 도중, 어젯밤에 자신의 피를 뽑은 안젤리카 간호사와 마주쳤다.
“한겨울 씨, 여기에 계셨군요. 브라이언 박사님께서 한겨울 씨를 찾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은센기 씨와 같이 가겠습니다.”
“은센기 씨는 이미 브라이언 박사님한테 가셨어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브라이언 박사의 진료 공간은 커다란 천막 중에 하나였다.
겨울이 들어가니 그곳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브라이언 박사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겨울을 반겼다.
“한겨울 씨, 어서 오세요. 이쪽에 앉으세요.”
겨울은 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박사님, 수술은 잘 끝났습니까?”
“겨울 씨가 큰 도움을 준 덕분에 수술은 무사히 끝난 상태입니다.”
“반군 기지에서 의약품을 되찾아온 사람은 저 말고도 램버트 교수님과 은센기 씨도 있습니다만…….”
“하하, 두 분께는 이미 인사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오늘 아침에 킨샤사로 떠나려고 했다는 얘기를 램버트 교수한테 들었습니다.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만… 저희가 남아 있어 봐야 방해만 될 것 같기도 하고, 일이 있다 보니 떠나려 한 겁니다.”
브라이언 박사는 보통의 사람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겨울에게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반군 기지에서 의약품을 되찾아온 세 사람의 공적의 순위를 따진다면, 겨울이 무조건 1순위였다.
하지만 겨울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보상과 비슷한 그 어떤 얘기도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브라이언 박사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음, 저도 사람인데 대가가 있으면 당연히 좋겠죠. 하지만 국경 없는 의사회는 무보수로 의료 혜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봉사 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상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염치없는 일 같습니다.”
겨울의 얘기를 들은 브라이언 박사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겨울 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도록 하죠. 만약 우리 국경 없는 의사회의 의술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곳이 어디든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도록 할게요.”
겨울은 아프리카의 의료 환경이 상당히 열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브라이언 박사의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박사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화번호 교환이 필수겠죠?”
겨울은 브라이언 박사 등을 포함한 여러 의료진들과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브라이언 박사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겨울 씨, VIP들은 모두 세 명입니다. 그중에 두 분이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당분간 면회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VIP분들의 생명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정말 다행이네요.”
브라이언 박사는 또다시 호기심을 느꼈다.
설사 VIP들이 죽더라도 겨울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마치 자신의 일인 듯 커다랗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있는 것이었다.
브라이언 박사는 그 이유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젯밤에 박사님께서 VIP들이 사망하기라도 한다면, 국경 없는 의사회가 이 나라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전개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맞아요.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요.”
“박사님, 나머지 VIP 한 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다행히 그분은 총알이 허벅지를 관통하는 총상만 입었습니다.”
“그럼 그분만 면회하고 킨샤사로 떠나겠습니다.”
“겨울 씨, 킨샤사로 떠나기 전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이제 와서 또 무슨 부탁이란 말인가.
하지만 겨울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네. 말씀해 보십시오.”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VIP께서 급히 킨샤사로 돌아가야 한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그분을 겨울 씨의 차에 태웠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