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VIP를 구해라 (3)
죽었다가 되살아난 겨울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 회의실에서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고가는지 역시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반군 기지에 침투해서 의약품을 되찾아오지 않는 한, 수술을 필요로 하는 VIP들과 마을 주민들은 절대로 살아날 수 없었다.
이번에 의약품을 되찾으러 갈 때에는 부상당한 은둔부를 멤버에 포함시키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무리 의료진들이 그의 과거를 지켜 준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밀이 탄로 날 것이 빤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은둔부의 미래는 캄캄한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이 점은 겨울이 죽기 전에도 크게 신경 쓰이던 부분이었다.
은둔부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은센기 씨, 의료진들이 긴급회의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찾아가 봐야 불청객 소리밖에 더 듣겠어요?”
“그럼 회의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까요?”
“아니요.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찾으러 가 봅시다.”
약간의 시간을 번 겨울은 재빨리 인터넷에 접속해서 ‘자이르여 영원하라’라는 반군 단체가 있는지 검색해 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검색되지 않았다.
즉, 그놈들은 반군이라는 이름을 내건 무장 강도에 불과하다는 얘기였다.
이번에는 구글 지도에 접속해서 손가락으로 지도를 확대해 가며 마을 근처를 세밀하게 살펴봤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포장도로가 있었다.
‘찾았다, 요놈들.’
최대한 외울 수 있는 만큼 지도를 기억해 놓고, 겨울은 코비 브라이언 박사와 존 램버트 교수에 대해서 검색했다.
놀랍게도 브라이언 박사는 흉부외과, 램버트 교수는 외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명의들이었다.
그런 명의들이 아프리카 오지까지 찾아와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니.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다.
기초적인 조사를 모두 끝낸 겨울은 핸드폰 전원을 끄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은센기 씨, 이제 갑시다.”
2층 건물의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선 겨울은 은센기한테 말을 걸었다.
“저는 맨 끝에 있는 방부터 확인할 테니까, 은센기 씨는 첫 번째 방부터 확인하세요.”
“네, 알겠어요.”
“방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서로 신호해 주기로 합시다.”
겨울은 세 번째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출입문에 귀를 살짝 갔다 댔다가, 은센기가 볼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말아서 신호를 보냈다.
은센기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겨울에게 말을 붙였다.
“겨울 씨, 이 방입니까?”
“네. 그런 것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노크하고 당당하게 들어가죠.”
똑똑.
겨울이 노크하고 은센기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
겨울은 배에 힘껏 바람을 집어넣고,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브라이언 박사님, 저는 대한민국의 대한 그룹에 근무하고 있는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사람은 킨샤사에 살고 있는 비엠베 은센기라고 합니다.”
“…한겨울 씨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브라이언 박사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반응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리라.
“브라이언 박사님, 지금 VIP들과 마을 주민들을 살리기 위한 대책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렸으면 하는 마음에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때, 램버트 교수가 귓속말로 브라이언 박사에게 무언가를 한참 동안 얘기했다.
그러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활짝 펴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따뜻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겨울 씨, 은센기 씨, 제가 영웅들을 홀대할 뻔했네요. 여기 빈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눠 봅시다.”
“네, 브라이언 박사님.”
겨울과 은센기가 빈자리에 앉자, 브라이언 박사가 질문을 던져 왔다.
“한겨울 씨, 우리한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트시카파 현장에서 보내오는 의약품을 사용해서 VIP들과 마을 주민들을 수술할 생각이시라면, 그 방법은 잊어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곳과 트시카파 구간에 산사태가 발생해서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저희도 트시카파로 가다가 되돌아왔거든요.”
“아이고, 이런…….”
브라이언 박사가 실망 어린 얼굴로 탄식을 내뱉었다.
겨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현재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반군들에게 강탈당한 의약품을 찾아오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포기한 상태죠.”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들어 보시고, 가능성 여부를 확인해 주십시오.”
“좋아요, 얘기나 들어 봅시다.”
“여러분으로부터 의약품을 강탈해 간 놈들은 ‘자이르여 영원하라’라는 이름을 가진 반군 단체입니다만, 실제로는 무장 강도들입니다. 그놈들의 기지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고…….”
겨울은 은둔부에게 전달받은 지식, 죽기 전에 겪은 경험, 그리고 방금 인터넷을 통해서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필수 의약품을 회수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나갔다.
“…해서 저는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뇨?”
“놈들의 기지 근처까지 갔는데, 경계가 삼엄하면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라는 뜻입니다.”
“흐음, 그런데… 한겨울 씨는 어떻게 반군들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고 있습니까?”
누군가로부터 이런 질문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던 겨울은 그에 걸맞은 답변거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한 사람한테 반군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누구인지 말하기는 조금… 곤란합니다.”
“곤란한 이유는 뭡니까?”
“그 사람은 올해 초까지 강제로 반군 조직에 몸을 담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지면, 피해를 입은 마을 주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으음, 확실히… 한겨울 씨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혹시 모르니까, 누구냐 이야기가 나오면 총상을 입어서 치료 도중에 죽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라이언 박사님.”
“그건 그렇고, 정말 저희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인데, 모른 척하면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닙니다.”
겨울은 허세를 떨지 않겠다고 그렇게 맹세했건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한겨울, 도대체 왜 그러냐? 브라이언 박사님이 너를 뭐라고 생각하겠냐?’
겨울이 자책하고 있는 사이에 브라이언 박사가 입을 열었다.
“한겨울 씨의 제안을 수용한다고 하면, 저희는 무엇을 도와드리면 됩니까?”
“먼저 어떤 의약품이 필요한지 리스트를 저한테 적어 주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이전처럼 램버트 교수가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브라이언 박사님, 제가 한겨울 씨하고 동행하겠습니다.”
겨울이 죽었던 이유는 램버트 교수의 무리한 욕심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램버트 교수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안 됩니다.”
“한겨울 씨, 반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램버트 교수님이 욕심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행여 강탈당한 의약품을 모두 챙겨 오자고 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하하하.”
램버트 교수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브라이언 박사를 포함한 모든 의료진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뒤, 웃음소리가 잡아들자, 겨울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반쯤은 농담입니다, 램버트 교수님. 그래도 욕심을 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하하, 괜찮습니다. 알겠어요. 욕심 부리지 않고 필수 의약품만 챙겨 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램버트 교수의 동의를 받아 낸 겨울은 거침없이 자신의 구상을 설명해 나갔다.
“…출발은 11시 30분에 하겠습니다.”
“하필이면 왜 11시 30분입니까?”
겨울은 창고에서 의약품을 챙겨 나올 때, 그토록 빠르게 무장 경비병들에게 발각된 이유를 폭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램버트 교수와 자기가 창고 밖으로 나왔을 당시에는 분명 무섭게 쏟아붓던 폭우가 그쳐 있었다.
아마도 놈들은 폭우가 내릴 때에는 초소 안에 피해 있다가, 폭우가 멈추자 밖으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 사이, 램버트 교수가 문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소리를 낸 것이고.
때문에 폭우가 내리는 동안에 작전을 끝내려면 출발 시간을 30분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런 속사정을 브라이언 박사한테 미주알고주알 얘기할 수는 없어서, 다른 핑계거리를 만들어 냈다.
“제가 일기 예보를 확인해 본 결과, 새벽 1시 이후에는 폭우가 그칠 거라더군요.”
“아,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알겠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의약품을 찾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정확히 11시 30분이 되자, 겨울, 은센기, 그리고 램버트 교수가 마을을 출발했다.
운전대는 길을 알고 있는 겨울이 잡았다.
한편,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은센기는 무장 강도들의 소굴에 자기가 따라 가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무작정 몰아붙이는 겨울에게 휘둘려 얼떨결에 옆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회의실에서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기회만 엿보고 있던 것이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겨울에게 물었다.
“겨울 씨… 미안한 말이지만, 굳이 제가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사실 처음에 겨울은 은센기를 데리고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꿔 먹은 이유는 다름 아닌 램버트 교수 때문이었다.
필수 의약품만 챙겨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겨울은 막상 그가 창고 안에 들어가 의약품들을 마주하면 돌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마음이 제일 잘 맞는 은센기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은센기에게 얘기를 꺼내 보고 싫다고 하면, 램버트 교수와 둘만 반군 기지에 침투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은센기 씨와 같이 가자고 한 이유는…….”
겨울은 은센기에게 이런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의약품을 최대한 많이 가지고 나오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배낭을 세 개나 실었던 건가요?”
“맞아요.”
“으음, 저도 겨울 씨를 돕고 싶지만, 겁이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동행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보탬이 되니까요.”
은센기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정면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VIP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램버트 교수가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은 VIP들 및 마을 주민들과 전혀 상관없는 제삼자에 불과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의약품 탈환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겠다고 해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겨울은 마치 자기 가족의 생명을 구해야 하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반면에 자기는 뭐란 말인가.
마을 주민들은 적어도 같은 콩고민주공화국의 국민들이 아닌가.
‘에라이, 어차피 한 번 죽는 인생, 화끈하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결심을 굳힌 은센기가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저와 램버트 교수님의 안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주실 수 있죠?”
“저도 죽기 싫습니다.”
“알겠어요. 저도 따라갈게요.”
“고마워요. 이제 5분 정도만 더 가면 놈들의 소굴입니다. 이제부터는 반드시 제 말을 따라 주셔야 합니다.”
“네! 보스.”
뒷좌석에 앉아 있던 램버트 교수가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당한 위치에 차를 주차시킨 겨울은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 등에 메고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제 뒤를 따라와 주십시오.”
“네, 보스.”
비록 칠흑 같은 어둠에 쌓여 있었지만, 죽기 전에 두 번이나 침투했던 루트였기 때문에 겨울은 손쉽게 창고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전에 한 것과 마찬가지로 천둥소리에 맞춰서 절단기로 쪽문의 열쇠고리를 끊고, 재빨리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램버트 교수는 겨울의 예상대로, 전과 같은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잔뜩 쌓여 있는 의약품 상자를 보더니만,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결국 세 사람은 제법 큰 배낭이 터질 정도로 의약품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러기를 잠시.
그들은 창고를 떠나기 위해 문가로 다가섰다.
겨울은 죽기 전의 장면을 기억에 떠올리며 신신당부했다.
“창고 문턱이 제법 높으니까 넘어지지 않게 주의하세요. 제가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겨울이 먼저 천둥소리에 맞춰서 쪽문을 열고 재빨리 창고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램버트 교수, 은센기가 창고 밖으로 나왔고,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던 겨울이 쪽문을 닫고 흔적을 지웠다.
곧이어 세 사람은 왔던 길을 거슬러 폭우가 쏟아지는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