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VIP를 구해라 (2)
반군들에게 강탈당한 의약품을 되찾아오기로 결정되자, 유일하게 군대 경험이 있는 겨울을 중심으로 대책 회의가 시작됐다.
“은센기 씨, 반군 기지 근처까지 운전해 줄 수 있습니까?”
“당연한 말씀이죠.”
“은둔부 씨, 반군 기지 내부 상황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종이에 그려 가며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잠시 후, 램버트 교수가 A4 종이 몇 장과 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설명해 보세요.”
“반군 기지는…….”
은둔부는 반군 기지 내부의 경계 초소와 건물들의 위치를 A4지에 그려 가며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희를 반군 기지 안에 위치하고 있는 창고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다리를 다쳐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겨울은 그가 걸을 때 다리를 절뚝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아, 제가 깜빡했군요. 반군들의 경계 상태는 어떻습니까?”
“마지못해서 경계를 서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때, 램버트 교수가 씨익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오늘은 평소보다 경계 상태가 더 엉망이겠네요?”
은둔부는 램버트 교수가 어떤 의도로 이 말을 꺼냈는지 금방 이해했다.
탈취당한 음식과 술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은둔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아닐 겁니다. 탈취해 간 술과 음식들은 경계를 서는 하급 병사들에까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럼 그 많은 술과 음식들을 간부들이 다 먹어 치운다는 겁니까?”
“네. 그래도 양이 제법 되니 오늘밤에 모두 먹어 없애지는 않겠죠.”
“그렇군요…….”
램버트 교수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면에 겨울은 두 사람이 어떤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가난을 몸에 달고 살고 있는 중이다.
당장 식량 사 먹을 돈도 부족한 상황인데, 어떻게 술이 언급된다는 말인가.
평소 같았으면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봤겠으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탓에 물어보지 못했다.
“박사님,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저희가 챙겨야 하는 의약품 종류를 알려 주십시오.”
램버트 교수는 자신의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는 의약품들의 사진을 보여 주며, 이것저것을 설명해 주었다.
“마취할 때 사용하는 리도카인…….”
* * *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고, 출발만 남겨 두고 있었다.
환자들을 돌보고 있던 브라이언 박사를 포함한 의료진들이 격려차 겨울을 찾아왔다.
“한겨울 씨, 그냥 돌아와도 아무런 원망을 하지 않겠습니다.”
“브라이언 박사님, 저도 제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위험해지면 곧장 돌아올 테니,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 램버트 교수가 그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브라이언 박사님, 저희가 의약품을 무사히 되찾으면 전화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자정 무렵, 겨울, 은센기, 램버트 교수, 그리고 은둔부는 의료진의 배웅을 받으며 반군 기지로 출발했다.
반군 기지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겨울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 하나를 램버트 교수에게 풀어놓았다.
“박사님, 제가 먼저 반군 기지에 침투해서 창고 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그 후에 다시 박사님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와서 모시고 들어가겠습니다.”
“네? 번거롭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램버트 교수가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겨울은 이미 머릿속에 작전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제가 먼저 반군 기지에 침투하려는 이유는 창고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침투로를 개척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안전한 곳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다면 할 수 없죠.”
반군 기지는 마을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도 전기 사정이 좋지 못한 모양인지, 반군 기지 내부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은센기 씨, 제가 한 시간 내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두 분을 모시고 마을로 돌아가세요.”
“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화들짝 놀란 은센기가 곧바로 반응했다.
“제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얘기는 반군들에게 붙잡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쟁터에서는 현장 지휘관의 말이 곧 법입니다. 제 말을 따르세요.”
“…알겠어요.”
은센기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 사람과 인사를 나눈 겨울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폭우가 쏟아지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반군 기지는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군데군데 끊어진 곳이 여럿 있었다.
“우리나라 군대 같았으면, 야단법석을 떨었을 텐데.”
혼잣말을 남긴 겨울은 은둔부가 알려 준 개구멍을 찾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폭우로 인해서 소음에 따른 행동 제약은 없었으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기에 쉽사리 전진할 수도 없었다.
번쩍!
우르릉 쾅쾅!
그때, 멀리서 울리던 천둥 번개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겨울은 번개가 치는 찰나의 순간을 이용해서 조금씩 전진했다.
잠시 후, 마침내 목표로 정한 창고가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다.
겨울은 창고 문까지 조심스럽게 접근한 뒤, 배낭에서 절단기를 꺼내고 숨죽여 기다렸다.
우르릉 쾅쾅!
탈칵!
겨울은 천둥소리에 맞춰 절단기로 열쇠고리를 잘랐다.
그러고는 다음 천둥소리를 기다렸다.
우르릉 쾅쾅!
하늘이 찢어질 듯 울리는 굉음과 동시에 겨울은 쪽문을 열고 안으로 잽싸게 뛰어 들어갔다.
쪽문을 닫은 겨울은 손전등을 키고, 창고 내부 여기저기를 비췄다.
은둔부에게서 창문이 없다는 정보를 취득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가 있었다.
창고 내부에는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크기가 제각각인 나무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으면 상자들의 내용물을 확인해 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겨울은 반군들이 탈취해 간 의약품 상자들을 먼저 찾았다.
그 상자들은 창고 출입문 근처에 비에 젖은 채 쌓여 있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제일 중요한 의약품이 뭐라고 했지?”
겨울은 기억을 떠올리며 상자 안을 이리저리 뒤져서 리도카인이나 승압제, 항생제로 보이는 것부터 배낭에 가득 집어 넣었다.
“됐어. 돌아가자.”
배낭을 짊어진 겨울은 천둥소리와 함께 창고를 빠져나와, 왔던 길을 더듬어 반군기지를 무사히 탈출했다.
SUV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일행들이 반갑게 겨울을 맞이했다.
겨울은 배낭 속에 들어 있는 약을 꺼내 놓으며, 반군 기지에 같이 침투할 램버트 교수에게 내부 사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기지 내부가 매우 어둡습니다. 제 뒤를 바짝 쫓아와 주십시오.”
겨울과 램버트 교수는 등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다시 반군 기지 안으로 침투했다.
이미 한 번 왕복한 루트라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창고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천둥소리와 함께 창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배낭을 내려놓고, 즉시 작업에 돌입했다.
겨울은 램버트 교수가 건네주는 수술에 필요한 의약품들과 도구들을 배낭에 옮겨 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램버트 교수가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는 배낭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의약품을 가득 쓸어 담고도 부족했는지, 바지를 벗어서 양쪽 끝을 묶고 나머지 의약품을 구겨 넣었다.
겨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램버트 교수와 똑같이 바지를 벗어서 끝을 묶고 의약품을 그 속에 쓸어 담았다.
“겨울 씨,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이제 가시죠.”
“네, 박사님.”
등에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의약품이 들어 있는 바지를 든 두 사람은 탈출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램버트 박사가 먼저 움직였다.
그런데.
덜커덩!
“어이쿠!”
램버트 교수의 발이 창고 문턱에 걸리면서 그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었다.
“뭐야!”
우르르.
어디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는지,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경비병들이 나타나서 겨울과 램버트 교수를 에워쌌다.
겨울은 들고 있었던 짐을 툭 떨어뜨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램버트 교수도 겨울과 함께 절망스런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곧 저승사자가 찾아왔다.
탕!
머리에 총알을 맞은 겨울의 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땅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 * *
“으악!”
겨울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천장에 걸려 있는 LED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
이상했다.
분명히 자기는 램버트 교수와 함께 반군 기지 창고에서 의약품을 챙겨 가지고 나오다가, 반군들에게 발각돼서 머리에 총을 맞았다.
그런데 꿈이라고?
지난 1월에 대한 그룹에 면접을 보던 날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다시 살아난 건가? 아니면 진짜로 꿈이었나?’
“겨울 씨, 악몽을 꿨나 보네요?”
‘뭐야! 꿈이 아니잖아?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건가? 어떤 방법으로? 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많은 의문이 생겨났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은센기의 질문에 대답할 때였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겨울은 죽기 전에 대답한 것과 똑같이 답변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으… 너무 피곤해서 가위에 눌린 것 같아요.”
“저도 가위에 눌린 적이 제법 많았어요.”
여기까지 똑같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해 보기로 했다.
“여기 있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어디로 갔나요?”
“글쎄요? 조금 전에 긴급회의가 있다면서 어디론가 몰려갔어요.”
이 정도면 빼박팩트였다.
겨울은 과거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겨울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봐야 시간 낭비일 테니까.
“램버트 교수님이 은센기 씨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나요?”
“어? 겨울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분이 뭐라고 했는지도 내가 얘기해 볼까요?”
“네, 뭐… 얘기해 보세요.”
“램버트 교수님이 떠나기 전에…….”
겨울의 입에서 쏟아지는 얘기에 은센기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램버트 교수가 자신에게 한 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겨울이 똑같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은센기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겨울은 이 놀라운 경험을 말하려다 말았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말한들 어느 누가 믿어주겠는가.
직접 경험한 자기도 믿어지지 않는데.
결국 겨울은 거짓말도, 진실도 아닌 말을 늘어놓았다.
“제 꿈에 은센기 씨가 나타나서 그렇게 말했어요.”
“네? 그럼 악몽이라는 건…….”
“아무튼 이제 그분을 찾으러 가 보죠.”
“아, 네. 근데 문제가…….”
“램버튼 교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모른다는 거죠?”
“네에…….”
“우리가 비를 피하면서 쉬고 있던 2층 건물 기억나요? 아마도 그곳에 계실 것 같아요.”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겨울은 죽기 전에 그곳에서 램버트 교수를 만났다고 얘기할 수는 없어서, 두뇌를 혹사시킨 끝에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아까 주민들을 구출할 때 마을을 둘러봤는데, 느낌상 그곳이 마을 회관 같아서요.”
“마을 회관? 마을 회관이라는 게 뭔데요?”
순간, 겨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마을 회관은 한국에나 있는 것이지, 콩고민주공화국의 이런 오지에는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설명해 줄까 하다가 인터넷에서 찾아보기 위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겨울 씨… 여기는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오지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죠?”
“후후, 과연 그럴까요?”
겨울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인터넷에 접속해서 마을 회관을 검색하고, 은센기에게 말뜻을 읽어 주었다.
“마을 회관은 마을 주민들을 위해서 세워진 공공건물로…….”
겨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은센기는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분명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오지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니.
그리고 그런 사실을 겨울이 어떻게 안 것인지 은센기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역시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해 보았다.
“어? 되네!”
“우리가 왜 여기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지, 이유를 설명해 줄까요?”
“네.”
“국경 없는 의사회 때문이에요. 아무래도 인터넷과 핸드폰을 사용할 일이 많아서 그런지, 무선통신 중계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얘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요.”
“아, 어쩐지… 이제 램버트 교수님을 만나러 그 마을회관? 이라는 곳에 가 볼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