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국경 없는 의사회
링링링―
교대를 위해서 맞춰 놓은 핸드폰 알람이 요란한 소리를 토해 냈다.
눈을 감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야말로 세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등받이를 세운 겨울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트시카파라는 도시로 한창 달려가고 있어야 할 차가 마치 고장이라도 난 듯 제자리에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고장이라도 났다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이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은센기에게 물었다.
“혹시… 고장났습니까?”
“아니에요. 폭우 때문에 앞에서 산사태가 일어난 것 같아요. 보세요.”
겨울이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차들이 미등을 켜 놓은 채 서 있었다.
밖에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것으로 봐서 은센기의 말이 사실인 듯 보였다.
“산사태라… 오늘밤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 사태를 해결해야할 공무원 놈들은 아마 산사태가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을 걸요.”
즉,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마냥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럼 지나온 곳들 중 가까운 데서 하룻밤을 묵어 갑시다.”
“그럴까요. 한 시간쯤 거리에 불룬구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거기서 휴식을 취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이제 제가 운전할 테니까, 은센기 씨는 좀 쉬세요. 온 길을 되돌아가면 되죠?”
자리를 바꿔 앉은 겨울은 차를 돌려서 불룬구를 향해 출발했다.
조수석에 앉은 은센기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길을 따라 약 30분 정도 갔을 무렵.
탕!
탕, 타탕!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에 놀랐는지 은센기도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차! 멈추세요! 아니, 도로변에 주차시키고 시동을 꺼 버리세요.”
은센기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변해 있었다.
“총소리가 언제부터 들리기 시작했어요?”
“정확하지는 앉지만, 이삼 분 정도 된 것 같아요.”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겨울은 풀이 무성한 도로가 안쪽 깊숙이 차를 세웠다.
그러고도 불안감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여기서 벗어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우리가 가는 길목에서 정부군과 반군이 교전을 벌이고 있으면 어떡하려고요. 총격전이 끝날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는 편이 나을 거예요.”
은센기의 말이 백번 옳았다.
머나먼 아프리카에서 결혼도 못해 보고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겨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함이 치솟아 올랐다.
반군들은 르완다, 부룬디와의 접경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이곳, 중부 지역에 출몰했다는 말인가.
겨울의 물음에 은센기는 의외의 답변을 꺼내 놓았다.
“반군들이 출몰하지 않는 지역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다만, 무장 병력 수가 동부 지역의 반군들보다 적을 뿐이죠.”
“그럼 반군보다는 무장 강도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놈들은 곧 죽어도 반군이라고 주장하더라고요.”
“은센기 씨는 반군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글쎄요. 모르긴 몰라도 제가 태운 손님들 중에 반군도 상당히 있었을 겁니다.”
“그놈들이 킨샤사에도 출몰한다는 말인가요?”
“5년 전, 연말에 반군들의 테러로 인해서 40명이 죽은 적도 있어요.”
“아… 그렇군요.”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교전이 벌어지면 최소한 한두 시간 이상은 소요될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폭우까지 내린 깜깜한 밤이었다.
그런데 요란한 총소리는 불과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쥐죽은 듯 가라앉았다.
“…은센기 씨,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요?”
“정부군과 반군이 총격전을 벌이는데…….”
겨울의 말을 듣고 있던 은센기는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교전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숨어 있던 반군들이 마을을 습격해서 약탈을 자행한 것이리라.
“에이, 나쁜 새끼들.”
“네?”
“제 생각에는 반군들이 민간인 마을…….”
하지만 그의 설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트럭의 엔진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겨울과 은센기는 재빨리 몸을 숙이고 고개를 살짝 들어 바깥을 주시했다.
찰나의 시간에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샛길에서 트럭 세 대와 십여 대가 넘는 소형차가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겨울이 타고 있던 SUV를 스쳐 카낭가 방향으로 사라졌다.
만약에 트럭이 자신들이 타고 있는 차를 발견했더라면 영락없이 저세상으로 갈 뻔한,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겨울이 은센기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혹시 모르니까, 5분 정도 기다렸다가 카낭가로 출발합시다.”
“반군들이 민간인 마을을 약탈할 때 주민들을 죽입니까?”
“약탈에 협조하는 주민들은 살려 주고, 반항하는 주민들은 그 자리에서 쏴 죽여 버리는 게 보통이죠. 그리고 여자들은 성폭행당하는 경우도 많고요.”
“에이, 나쁜 놈들…….”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은센기가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반군들에게 약탈당한 마을은 어떻게 되나요?”
“글쎄요. 아마도 아비규한 상태겠죠.”
“음…….”
끝말을 흐린 겨울은 브레이크를 밟으며 SUV의 시동을 걸었다.
부릉, 부릉, 부르릉!
“겨울 씨, 아직 5분 지나지 않았잖아요?”
은센기가 화들짝 놀라서 만류했다.
“은센기 씨, 우리는 불룬구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군에게 약탈당한 마을로 가는 겁니다.”
“거기 가서 뭐 하시게요?”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면서요? 가서 도와줍시다.”
겨울은 막무가내로 우기며 액셀러레이터를 강하게 밟았다.
은센기는 멍하니 그런 겨울을 쳐다볼 뿐이었다.
마을 입구에 진입하니, 은센기의 말대로 아비규한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겨울은 SUV 자동차를 마을 한쪽 공터에 주차시켜 놓고, 은센기와 함께 필사적으로 그 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희미한 조명 속에 피를 흘리며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주민들을 본 두 사람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피를 흘리는 사람들을 근처 천막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키고, 반쯤 무너진 집의 잔해물을 걷어 내며 주민들을 구출했다.
겨울과 은센기에게서 흐르는 땀과 다친 사람들의 피로 얼룩진 옷은 한창 쏟아 붓듯이 내리는 굵은 빗줄기에 씻겨 나갔다.
잠시 뒤, 잠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2층 건물의 출입구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자신들만 폭우를 피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들도 희미한 조명을 찾아서 폭풍처럼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하아… 은센기 씨, 다른 곳으로 갈까요?”
“다른 곳에 가 봐야 마찬가지일 겁니다. 여기서 그냥 쉽시다.”
“모기한테 물리면 어떻게 하죠?”
“차에 말라리아 치료제 있잖아요.”
“에라, 모르겠다.”
겨울이 계단에 털썩 주저앉자, 은센기도 옆에 조용히 앉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정신을 수습한 은센기가 말을 걸어왔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해서 돕는다고 하지만, 겨울 씨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필사적으로 돕는 겁니까?”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 국적이 뭐가 중요합니까?”
“…….”
“이유 같은 건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에요.”
“…겨울 씨, 정말 고마워요.”
나지막이 말하는 은센기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 있었다.
겨울은 비와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그의 옷을 털어 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은센기 씨가 고마워할 것 없어요. 당연한 행동을 한 거니까요. 사람이 죽어 가는데, 가만히 있는 게 이상한 거죠.”
“제가 언젠가 은혜를 갚을 날이 있을 겁니다.”
겨울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조금 전, 마을 주민들을 도와줄 때 흰색 가운과 청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카당가에 있는 병원에서 소식 듣고 왔다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았다.
카당가에서 이곳까지 차로도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
그곳에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 역시 아닐 것이었다.
더구나 체구가 제법 큰 백인들도 여러 명 있었다.
왠지 그들이 말로만 듣던 국경 없는 의사회(MSF, Médecins Sans Frontières) 소속 사람들일 것 같다는 생각에 은센기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마 맞을 겁니다. 반군 녀석들도 약탈하러 온 게 아니라 국경 없는 의사회 때문에 온 것 같고요.”
“반군들도 국경 없는 의사회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나 보네요.”
“아무래도 국경 없는 의사회가 보유하고 있는 의약품을 노린 것 같아요. 암시장에 내다팔거나 다른 곳에 강매를 하면 제법 돈이 되니까요. 언젠가 그런 돈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무기류 구입도 한다고 들은 적이 있네요.”
겨울은 나지막히 한국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
“하아,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죠. 이게 다 우리나라가 개떡같아서 그래요.”
겨울과 은센기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랜턴을 든 누군가가 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둘이 앉아 있는 희미한 조명 밑까지 오자, 겨울은 그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온몸에 시뻘건 피를 묻힌 40대의 백인 남자.
두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경 없는 의사회의 닥터 존 램버트(John Lambert)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노고와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두 분의 성함을 제가 알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에서 온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저는 비엠베 은센기입니다.”
“아시겠지만, 조금 전에 반군들의 습격을 받아서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입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두 분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
너무도 지쳐 있었기에 부탁이라는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때문에 겨울은 그의 부탁이 먼저 어떤 것인지 들어 보기로 했다.
“지금 부상당한 환자들이 많아서 헌혈이 급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혹시 헌혈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 당연히 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저하고 같이 가실까요?”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기에 둘은 승낙한 뒤, 램버트 교수를 따라갔다.
램버트 교수가 그들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넓은 공터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천막이었다.
그곳에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여러 명이 있었다.
겨울은 램버트 교수가 이끄는 대로 비어 있는 병상에 걸터앉았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간호사가 채혈하러 올 겁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다른 헌혈자를 찾기 위함인지, 급하게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잠시 기다리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간호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 잔을 건네주며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젤리카라고 합니다. 따듯한 물을 드시고 일단 몸을 녹이세요.”
“고맙습니다.”
꼬르륵.
잔을 건네받는 순간, 배꼽시계가 배고프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카낭가의 호텔에서 간단하게 먹은 후, 지금까지 먹고 마신 거라고는 무케나 사장의 집에서 마신 음료수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 소리를 들은 안젤리카가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구해 왔는지 먹음직한 샌드위치를 가져와 겨울과 은센기에게 건네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뭘요. 이만큼 도와주시는데, 샌드위치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먹으면서 들어 주세요. 헌혈을 원활하기 위해서는…….”
안젤리카 간호사는 둘에게 헌혈에 필요한 절차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고, 제일 중요한 말을 나중에 꺼냈다.
“…일반 성인의 경우 1회 채혈은 400㏄를 초과할 수 없지만, 지금 O형의 혈액이 매우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600㏄ 저도를 채혈해도 될까요?”
“네.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그렇게 해 주세요.”
“고맙습니다. 바늘이 들어갈 때 조금 따끔할 수 있습니다.”
헌혈을 끝마치고 병상에서 일어나던 겨울은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600㏄ 헌혈은 튼실한 겨울의 몸에도 제법 무리였던 모양이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러는데, 조금만 누워 있어도 될까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것 같아요.”
“담요 드릴 테니까, 편안하게 누워서 쉬세요.”
“고맙습니다.”
안젤리카 간호사가 가지고 온 담요를 덮은 겨울은 병상에 눕자마자,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헉!”
겨울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