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부럽지 않으면 거짓말
겨울과 은센기는 번갈아 가며 킨샤사에서 카낭가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20시간을 예상했지만, 워낙 도로 사정도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콜까지 여러 번 만나는 바람에 다음 날 점심 무렵에나 목적지인 카낭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꾀죄죄한 상태로 무케나 사장을 만나러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나마 시설이 깨끗해 보이는 호텔로 들어가 깨끗이 씻고 반팔 셔츠와 정장 바지로 갈아입었다.
“후우, 좀 씻으니까 살겠네요.”
“이제 출발할까요?”
“그러죠.”
무케나 사장의 집을 향해 내비게이션도 없이 운전해 가는 은센기를 지켜보면서 겨울은 궁금증이 올라왔다.
“은센기 씨, 카낭가에 와 본 적이 있나 봐요?”
“무벰베가 시즌이 끝나면 매번 쉬러 여기에 오거든요. 그때 몇 번 와 봤어요.”
“음, 좀 예민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은센기 씨는 무벰베 선수가 부럽지 않으세요?”
“안 부러울 리가 있나요. 배가 아파 죽을 지경입니다. 겨울 씨도 조강석 선수가 부럽죠?”
감정을 가진 사람인데, 부럽지 않으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겨울은 6년 전의 교통사고로 더 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그런 감정을 조금씩 내려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그저 조강석 선수나 여타 다른 선수들이 자기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기에는 눈치가 조금 보였다.
“그렇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요즘 들어 질투가 좀 사라져 가고 있다 해야 할까요. 축구 생각이 덜 나더군요.”
“왜요?”
“겨울 씨를 만난 이후로 제 생활이 조금씩 나아져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 중입니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둘의 시야에 저 멀리 언덕에 웅장한 저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센기 씨, 저기 보이는 저 저택이 무케나 사장이 살고 있는 집입니까?”
“맞아요. 원래는 벨기에 식민지 시절에 카낭가 시장이 살고 있었는데, 무벰베가 EPL로 이적하면서 받은 계약금으로 아버지한테 사 줬다고 하더라고요.”
“세상에… 효자네요. 크기를 보니 무벰베 선수가 상당히 많은 돈을 주고 매입했겠는데요?”
“제가 듣기로는 백만 달러를 주고 매입했다고 들었어요.”
“어라? 생각보다 비싸지 않네요?”
“백만 달러가 비싸지 않다고요?”
오히려 은센기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음, 은센기 씨도 우리나라에 와 봐서 알겠지만, 웬만한 아파트들은 백만 달러가 훌쩍 넘어가거든요.”
“겨울 씨도 서울에 집이 있나요?”
“아니요. 아쉽게도 방 두 칸짜리 작은 월세방이 있을 뿐이에요.”
겨울과 은센기가 이런 맥 빠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SUV 자동차는 저택 정문에 도착했다.
무장 경비원이 즉시 그들의 차로 다가왔다.
은센기가 창문을 열고 무케나 사장을 만나러 왔다고 얘기하자, 그는 인터폰으로 누군가에게 보고한 후 문을 열어 주었다.
차를 타고 약 5분 정도 안으로 들어가니,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현관에 나와 있었다.
SUV 자동차를 주차장에 주차시킨 두 사람은 뒷좌석에서 홍삼 선물 세트 다섯 개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은센기는 마중 나온 무케나 사장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겨울을 소개시켜 주었다.
“사장님, 제가 전화로 말씀드린 대한 그룹 콩고 지점의 한겨울 씨입니다.”
“내 집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한겨울 씨.”
무케나 사장은 주저 없이 겨울에게 두툼한 오른손을 내밀었다.
겨울도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날씨가 더우니까,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 나누시죠.”
저택 내부는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지 상당히 시원했다.
무케나 사장이 소파 상석에 앉고, 좌우에 겨울과 은센기가 자리했다.
겨울은 가지고 있던 홍삼 선물 세트를 무케나 사장에게 건네면서 복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홍삼은 거의 부작용은 없지만, 체질에 따라서 몸에 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시고 복용하셔야 합니다.”
“오, 홍삼! 몇 년 전, 제 아들이 한국에서 사다 줘서 먹어 봤는데, 그때 아주 효과가 좋더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무케나 사장은 집사가 내온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겨울 씨는 프랑스어를 전공하셨나 봐요?”
“아닙니다. 콩고민주공화국에 도착한 날로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 온 지 제법 되었나 보군요. 몇 년이나 이곳에서 지냈습니까?”
“올해 4월 초에 왔으니까, 이제 8개월째에 접어들었습니다.”
무케나 사장은 좋던 기분이 살짝 가라앉았다.
겨울이 자기에게 잘 보이려고 거짓말까지 늘어놓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언어 천재라고 해도 7개월 만에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 해 주려는 찰나, 눈치 빠른 은센기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장님, 놀랍게도 한겨울 씨의 말은 사실입니다.”
“응? 은센기, 네가 어떻게 아는데?”
“제가 한겨울 씨를 우리나라에 도착하는 날 공항에서…….”
은센기는 겨울과 처음 만났을 때의 상황과 과거의 인연, 그리고 지금도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은센기의 과한 설명은 오히려 무케나 사장의 오해를 깊어지게 만들었다.
“흐음… 한겨울 씨, 정말로 내 아들을 잘 알고 있습니까?”
무케나 사장이 굳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겨울은 무벰베 선수와의 인연을 뻥튀기해서 무케나 사장에게 환심을 사려는 욕심이 있었다.
은센기가 자기보다 먼저 선수를 쳐 버린 탓에 실패했지만.
하지만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욕심은 부리더라도 허세는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나.
“저는 무벰베 선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마 그는 저를 기억하지는 못할 겁니다.”
“흠, 8년 전에 한국에서 내 아들과 축구 경기를 했다는 말은 진짜고요?”
“네, 그렇습니다.”
“만약 사실이 아니면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겨울은 딱히 꺼리길 것이 없었기에 무케나 사장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무케나 사장은 집사를 불러서 뭔가 지시를 내렸다.
지시에 따라 잠시 자리를 비운 집사는 CD를 두 장 가지고 왔다.
“내 아들이 선수로 출전한 축구 경기를 녹화해서 틈나는 대로 시청하는 것이 내 유일한 취미입니다. 8년 전에 우리나라와 한국의 청소년 국가 대표팀과 치룬 친선 경기가 없을 것 같나요? 여기 이 CD에 저장되어 있는데, 어쩌시겠습니까?”
겨울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동의했다.
잠시 후 집사가 CD 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콩고민주공화국의 청소년 축구대표…….]
간간히 한국말이 섞여 들려왔다.
시간이 흐르자, 굳은 표정으로 축구 경기를 지켜보던 무케나 사장의 얼굴이 점점 펴지기 시작했다.
10번을 달고 뛰고 있는 한국의 선수는 겨울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상 속 그의 축구 실력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동영상 재생을 멈춘 무케나 사장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사과했다.
“흠흠, 내가 오해했군요. 예민하게 굴어 정말 미안합니다. 간혹 제 아들을 들먹이며 환심을 사려는 종자들이 있어서…….”
“아닙니다. 저도 오랜만에 제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하,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저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프로 선수로서 대성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왜…….”
“6년 전에 부상을 크게 당해서 일찍 은퇴했습니다.”
“아… 이런. 이거, 실례했습니다.”
무케나 사장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안타까워하실 것 없으실 것 같습니다. 은퇴한 덕에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사장님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그런 낙천적인 면이 보기 좋습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무케나 사장은 이제 본제로 넘어가기로 했다.
“흠, 제 운송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은센기 씨한테 택시 사업을 시작한다고만 들었습니다.”
“하하, 엉뚱한 얘기를 들었군요.”
“네? 아닙니까?”
“네, 그래요. 혹시 코발트라는 광물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기초적인 것만 알고 있습니다. 전기 자동차 배터리에 사용되는 광물이고, 콩고민주공화국에 전 세계 추정 매장량의 50% 가까이에 해당하는 340만 톤 정도가 매장되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무케나 사장은 깜짝 놀랐다.
기초적인 것만 안다길래 코발트에 대해서 전혀 모를 것이라 예상한 그였다.
하지만 의외로 겨울의 입에서 술술 정보가 흘러나오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군요.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습니까?”
“저희 콩고 지점에서 코발트를 매입해 대한 그룹으로 수출하고 있어서 이런 기초적인 것은 늘 숙지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한 무케나 사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말을 다시 이어 나갔다.
“몇 년 전, 제 아들이 번 돈으로 코발트가 매장되어 있을 만한 산을 매입했어요. 꾸준하게 탐사한 끝에 몇 달 전 코발트 광맥을 발견할 수 있었지요.”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하하, 고마워요. 그래서 내년부터 코발트 상업 생산에 돌입해서 전량 해외로 수출할 예정에 있어요. 그리고 채석한 코발트를 마타디 항까지 운송하려면 대형 트럭이 필요하죠.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즉, 당장 트럭이 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겨울은 살짝 실망감이 몰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엉뚱하다면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코발트를 상업 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것으로 압니다만… 죄송한 말씀이지만, 충분한 자금은 확보해 놓은 상태입니까?”
“지금 중국의 투자자와 협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 제가 알 수 있습니까?”
“흠, 알고 싶어 하는 이유를 먼저 얘기해 줄 수는 없나요?”
“사실 저희 회사도 코발트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대한 그룹도 투자할 수 있다는 뜻이라 들리는데, 내 말이 맞습니까?”
사실 그 문제는 멋대로 결정할 수 없었지만, 겨울은 일단 저지른 뒤 해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네, 물론입니다.”
“중국의 투자자는 코발트 생산이 끝날 때까지 국제 시세 대비 30% 할인해서 수입해 가는 조건을 제시한 상태입니다. 만약에 대한 그룹에서 중국의 투자자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장님, 코발트가 어느 정도 매장되어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프랑스의 지질 회사가 조사한 결과로는…….”
겨울은 무케나 사장한테 알고 싶은 내용을 물어 하나하나 꼼꼼하게 파악했다.
잠시 뒤, 겨울은 양해를 구하고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를 보고했다.
“…이런 상황입니다. 지점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깐 무케나 사장님과 통화할 수 있을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겨울은 즉시 무케나 사장한테 동의를 받고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웃음을 섞어 가며 10분이 넘어서야 전화를 끊었다.
무케나 사장은 핸드폰을 겨울에게 돌려주며 통화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했다.
“…해서 다음 주에 정 지점장님을 만나러 킨샤사에 가기로 했습니다.”
“부디 비즈니스가 잘 진행됐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될 겁니다.”
무케나 사장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에 겨울도 그를 따라 미소를 얼굴에 띠웠다.
이 정도 진척률이면 이번 방문에서 겨울은 선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겨울은 무케나 사장과 더 대화를 나눌 것이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주섬주섬 소지품들을 챙겼다.
이를 지켜보던 무케나 사장은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제가 저녁 식사를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시간이 많지 않아서 일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킨샤사에서 다시 만납시다.”
“네. 그때 뵙겠습니다.”
은센기는 자동차의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겨울에게 사과부터 했다.
“겨울 씨,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줘서 정말 미안해요.”
겨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잘된 상황이었다.
대한 그룹이 코발트 광산에 투자하게 되면 트럭, 중장비, 기타 등등의 제품을 자연스럽게 판매할 기회도 생길 것이기 때문에.
겨울은 이런 점을 입에 담으며 미안해하는 은센기의 말을 끊었다.
“하하,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오늘은 차에서 노숙하지 말고, 호텔에서 자면 좋겠는데요.”
“올 때처럼 한꺼번에 운전하지 않으려면, 오늘 조금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킨샤사로 가는 길에 트시카파라는 곳에서 하룻밤 자는 건 어떨까요?”
은센기의 제안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중간에 운전을 교대해야 하니까, 먼저 좀 쉴게요.”
의자를 뒤로 젖힌 겨울은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잠에 빠져들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