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다니
입찰 팀에서 맡은 겨울의 주요 임무는 안내와 통역이었다.
오늘도 대한건설의 홍상현 부장과 함께 협력업체를 만나서 미팅을 끝내고, 머리를 식히며 베이스캠프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겨울 씨, 입찰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지? 나도 입찰이 빨리 끝나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밖에 없어.”
“저도 비슷한 마음입니다, 부장님. 근데 저희가 입찰을 따게 되면, 공사를 위해서 다시 오시는 것 아닙니까?”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더 이상 이 나라에 안 오려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과연 그럴까?”
순간, 홍상현 부장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도는 것을 겨울이 순간적으로 포착했다.
‘회사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뒷배가 든든한 사람인가?’
겨울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홍상현 부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부장님은 내일 입찰이 끝나면, 곧바로 귀국하십니까?”
“입찰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삼 일 내로 귀국하지 않을까 싶다.”
“귀국하면 좋으시겠네요. 모기에 물릴 일도 없고요.”
“하하하, 그건 그래. 운전기사한테 얘기해서 저기 보이는 호텔에 세워 달라고 해 줘.”
“약속이 있으십니까?”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있는데, 이 나라에 의료 봉사하러 왔거든. 그분과 저녁 먹고 호텔로 돌아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먼저 돌아가라고.”
“네, 알겠습니다.”
겨울의 지시를 받은 운전기사 쿠엘은 킨샤사 그랜드 호텔 출입문 앞에 자동차를 정차시켰다.
꾸르룩.
홍상현 부장을 호텔에 내려 주고 사무실로 출발하려는 순간, 겨울의 배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아욱… 쿠엘 씨, 잠깐만요.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까, 주차장에서 잠시 기다려 주실래요?”
“부지점장님, 어디 아프십니까?”
“점심 먹은 게 잘못된 것 같아요. 별것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화장실로 달려가 시원하게 볼일을 끝마치니, 아프던 것이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손을 씻고 나가려는 순간에 겨울은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과 얼굴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중국인.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쿠엘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겨울은 멈칫 자리에 섰다.
“가만… 내가 저 사람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맞아! 지난번에 펍 화장실에서 나를 넘어뜨린 사람이잖아? 참, 우연도 무슨 이런 우연이…….”
세상이 좁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며 겨울은 서둘러 이동했다.
“쿠엘 씨,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기다라는 것도 일의 일부죠, 뭐. 배는 괜찮습니까?”
“네. 다행히 괜찮은 것 같아요. 이제 사무실로 갑시다.”
그런데 쿠엘은 시동조차 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려는 순간, 쿠엘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부지점장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네. 무슨 일 있나요?”
“그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닙니다만… 저 앞에 검은색 승용차 보이십니까?”
쿠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그의 말대로 세련된 검은색 승용차 하나가 보였다.
“저 차는 화웨이 소속의 자동차입니다.”
“화웨이요? 쿠엘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난번 현장 설명회 당시에 저 차의 운전기사와 잠깐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겨울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재빨리 쿠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승용차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습니까?”
“5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5분이라…….”
겨울은 자신이 화장실에서 만난 중국 사람이 승용차의 주인이라고 가정하고,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운전기사가 중국 사람을 호텔 현관에 내려놓고…….’
묘하게 시간이 딱 맞아 떨어졌다.
‘혹시… 홍 부장을 만나려고 온 것이 아닐까?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니지… 확인해 봐서 나쁠 것은 없잖아. 쿠엘은 홍 부장이 얼굴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갈팡질팡하던 겨울은 드디어 결정을 내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겨울 씨.]
“은센기 씨, 지금 만났으면 좋겠는데, 어디쯤에 있나요?”
[어디라고 말해 줘도 모를 것 같으니까, 겨울 씨가 있는 곳을 얘기해 보세요.]
“킨샤사 그랜드호텔 주차장에 있어요.”
[아, 마침 저도 근처에 있으니까, 10분 정도만 기다려 주세요.]
“네, 알겠어요.”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비교적 시간 관념이 무딘 편이지만, 특이하게도 은센기만은 달랐다.
그는 시간 약속을 할 때마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제시간에 맞춰서 도착하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은센기는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이 손을 흔들어 위치를 알려 주자, 은센기는 바로 옆에 택시를 주차시키고 겨울의 차에 올라탔다.
“겨울 씨, 무슨 일입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어 주세요.”
겨울은 핸드폰에서 홍상현 부장과 같이 찍은 사진을 은센기에게 보여 주며 부탁의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서 저녁을 먹는다고 했어요. 사실 여부를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겨울 씨, 이 사람이 화웨이 놈들의 스파이라고 보십니까?”
묻는 은센기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께름칙한 것이 있어서 확인해 보려고요.”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차에서 내린 은센기는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윙―
약 5분 정도 지난 후, 문자가 하나 수신됐다.
겨울은 재빨리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 사진 확인 요망.
은센기가 보내온 사진을 확인한 겨울은 놀라서 눈알이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사진 속에는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있었고, 그들 모두 알고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마음이 급해졌다.
― 증거를 확보해 주세요.
윙윙―
겨울이 답장을 보냄과 동시에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은센기가 걸어온 전화였다.
겨울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은센기 씨.”
[겨울 씨, 어떻게 증거를 확보하면 될까요?]
프랑스어.
은센기는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평상시에는 영어를 사용했다.
그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는 얘기는 그와 가까운 곳에 세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겨울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물었다.
[네. 제 옆 테이블에 앉아 있어요.]
“그 사람들이 은센기 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가능성이 없을까요?”
[지금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는 신경을 1도 쓰고 있지 않아요.]
“은센기 씨,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습니까?”
[네.]
“그럼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을까요?”
[흐흐흐, 그렇지 않아도 이미 촬영하는 중이에요.]
순간, 겨울은 은센기의 핸드폰이 두 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중요한 얘기가 흘러나오면, 촬영한 동영상을 보내 주세요.”
[알았어요.]
“아, 그리고 그곳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겨울은 만약을 대비해서 은센기에게 세세하게 작전 지시를 내렸다.
[저… 이곳의 음식값이 매우 비싼 편인데…….]
은센기가 의도적으로 끝말을 흐렸다.
즉, 밥값을 내달라는 의미였다.
“영수증은 물론 나중에 저한테 청구해 주시고요.”
[하하, 알겠습니다.]
은센기와 통화를 끝낸 겨울은 즉시, 정명훈 지점장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윙윙―
아니나 다를까.
불과 30초도 지나지 않아서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지점장님.”
[부지점장, 지금 어디에 있나?]
“세 사람이 저녁 먹는 호텔의 주차장에 있습니다.”
[사진은 어떻게 촬영했어?]
“지금 은센기 씨를 레스토랑에 들여보낸 상태입니다.”
[증거를 수집하러?]
“네. 그렇습니다.”
[지금 즉시 임원들을 불러 모으면 되나?]
“그 점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대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뭔가?]
“제가 판단하기로는…….”
겨울은 자신의 생각을 상세하게 밝혔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군.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조치할게.]
“저는 사무실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직원들은 모두 퇴근시켜.]
“네, 지점장님.”
* * *
콩고 지점 사무실.
윙―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킨 겨울이 한숨 돌리려는 찰나, 문자가 하나 수신됐다.
은센기가 보내온 동영상임을 확신한 겨울은 지체 없이 작업을 진행해서 노트북에 이미지 파일을 저장시켰다.
모든 만반의 준비가 끝날 무렵, 정명훈 지점장이 먼저 도착하고, 곧이어 조병석 부사장, 강대화 부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조병석 부사장은 빠른 걸음으로 겨울에게 다가와서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다.
“부사장님, 회의실에서 말씀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회의실.
노트북에 연결된 빔 프로젝터를 통해서 사진 하나가 스크린에 비춰졌다.
사진을 본 조병석 부사장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입찰 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홍상현 부장, 화웨이의 위양 이사, 그리고 이름 모를 중국인이었다.
사진만으로도 느낌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겨울에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었다.
“홍상현 부장과 협력업체…….”
겨울은 호텔에서부터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했다.
“…해서 은센기 씨가 보내온 동영상은 아직 내용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동영상을 재생시켜 보세요.”
“네, 부사장님.”
짧게 대답한 겨울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홍상현 부장과 화웨이의 위양 이사, 그리고 중국인 한 명이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거의 식사가 끝나가자, 홍상현 부장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튀어나왔다.
[제가 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얼마를 주실 생각입니까?]
[100만 달러, 어떻습니까?]
[위 이사님, 털도 안 뽑고 드시려는 것 아닙니까?]
[으음, 그럼 150만 달러 어떻습니까?]
[그러지 마시고 200만 달러로 합의합시다.]
[…좋습니다.]
홍상현 부장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서 위양 이사에게 건네주었다.
위양 이사는 서류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내서 숫자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역시 맞군요.]
[위 이사님, 계좌번호는 제가 지난번에 알려 준 것과 같습니다.]
이 장면으로 인해서, 조병석 부사장은 입찰 팀에 화웨이의 스파이가 또 있다는 것과 홍상현 부장이 위양 이사와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뒷거래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런 생각은 자신만 한 것이 아니었다.
“부사장님, 저놈들한테 매수된 사람이 또 누구일까요?”
강대화 부장의 질문을 받은 조병석 부사장은 스파이가 누구인지 유추해 보기 시작했다.
투찰 가격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여덟 명.
자기를 포함한 임원 다섯 명과 강대화 부장, 홍상현 부장, 대한텔레콤의 성동수 부장.
임원들 중에서 하제훈 상무와 윤성한 상무는 자기와 알고 지낸 지가 20년이 넘었기 때문에 범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대한 건설의 주영석 이사, 대한텔레콤의 전해수 이사, 성동수 부장 중에 한 명으로 좁혀진다.
조병석 부사장은 이런 자신의 생각을 강대화 부장에게 밝혔다.
“부사장님, 성동수 부장은 스파이가 아닐 겁니다.”
“그 근거는?”
“성 부장은 저하고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었습니다.”
“그럼 두 이사 중에 한 명이겠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윙윙―
그때, 겨울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겨울은 지체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은센기 씨.”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회사 사무실에 있는데, 왜 그러십니까?”
[레스토랑에 또 다른 한국인이 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빠져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입니까?”
[지난번에 조병석 부사장님의 스위트룸에서 본 사람입니다.]
즉, 임원들 중에 한 명이라는 얘기였다.
“인상착의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사진 찍었으니까, 곧 보내 줄게요.]
“알겠어요. 우리 회사가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죠?”
[그럼요. 지금 출발할게요.]
윙―
은센기가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를 보내왔다.
겨울은 곧바로 이미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인물은…….
“주영석 이사… 내가 고양이 놈들한테 생선을 맡겼다니…….”
조병석 부사장의 허탈한 표정이 그의 씁쓸한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