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고소하다, 이놈들아!
“실장님, 어떻게 됐습니까?”
[회장님께서 미국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조치를 취해 놨으니까,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조병석 부사장은 문득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어차피 물어봐야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 빤했지만, 혹시 모른다는 심정으로 슬쩍 질문을 던졌다.
“실장님, 미국에 살고 계시는 회장님의 지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나중에 처남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날이 있을 거야.]
“네? 제가요?”
조병석 부사장의 놀란 반응에 서동호 실장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왜? 내 말이 거짓말 같은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고. 그리고 말이야, 정 지점장의 임원 승진 얘기를 회장님께 살짝 언급했는데, 질책만 심하게 들었어.]
의외였다.
상반기 실적 75% 신장을 기록했고, 하반기에는 1억 달러짜리 의약품 수출이 대기하고 있는 중인데.
이 추세대로 간다면 연말에는 엄청난 실적을 기록할 것이 분명한데도 질책을 심하게 듣다니.
그렇다면 정명훈 지점장은 개인적인 면에서 송훈석 회장의 눈에 들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조병석 부사장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 지점장이 고지식한 면은 있지만, 회장님께 낙제점을 받을 정도는 아니야.]
“그럼 뭣 때문에 정 지점장은 임원 승진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까?”
[회장님께서는 콩고 지점이 이만한 실적을 올린 게 한겨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얘기란 말인가.
콩고 지점의 실적은 조직 구성원들의 실적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따라서 한겨울의 실적은 콩고 지점의 실적에 포함되는 것이고, 지점을 책임지고 있는 정명훈 지점장의 실적에 잡히는 것이 당연지사.
그런데 송훈석 회장은 그 사실을 부정하는 중이라니.
“실장님, 회장님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긴장 풀지 말고 하반기에도 더욱 열심히 일해서 훌륭한 성과를 내라는 채찍의 의미가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힘차게 달리는 말에게도 더욱 잘 달리라는 의미로 채찍을 휘두른다.
“으음,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입찰을 반드시 따야겠군요.”
[처남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래야 될 거야.]
“실장님, 이제 귀에 못이 박히겠습니다.”
조병석 부사장이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처남, 내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나?]
“빤하잖아요. 대한 텔레콤 사장 자리를 가지고 저한테 위기의식을 심어 주려는 거잖아요.”
[미안하지만, 회장님은 처남을 대한 텔레콤 사장에 임명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어.]
“그럼 어느 자리를 맡기겠다는 겁니까?”
[전략기획실.]
조병석 부사장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전략기획실은 대한 그룹의 두뇌에 해당하는 곳으로,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쉽게 배치 받을 수 있는 부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략기획실 실장은 대한 그룹의 실세 중에 실세가 차지하는 자리.
즉, 송훈석 회장의 눈에 들지 못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송훈석 회장은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자기에게 맡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단, 입찰에 성공했을 경우에.
이유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송훈석 회장이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날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실장님, 어떻게 해서든지 입찰을 성공시켜 보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다른 공간에서는 정명훈 지점장이 이진호 사장과 통화 중에 있었다.
“사장님, 고맙습니다.”
[나는 회장님의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드릴 말씀이 없네요.”
[입찰 결과 여부에 따라서 성과급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입찰이 끝나고 지급하는 것으로 할게요.]
입찰에 성공하면, 당연히 성과급 지급률이 높아질 것이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정 지점장,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나요?]
“네, 말씀하십시오.”
[입찰에 성공하면 콩고 지점에 돌아오는 혜택이 있습니까?]
“기지국 업그레이드에 사용되는 모든 기자재를 저희 지점이 수입해서 공급해 줘야 합니다.”
[금액이 어느 정도 될 것 같습니까?]
“아직 정확한 품목과 금액이 산출되지 않았지만, 7억 달러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렇게 많습니까?]
이진호 사장의 깜짝 놀라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금액이 많은 이유는 데이터를 저장하고 가공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 센터를 건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데이터 센터에 들어가는 장비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입찰에 성공하면, 언제부터 공사에 착수해야 합니까?]
“늦어도 10월에는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정 지점장, 우리가 입찰을 딸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정명훈 지점장은 꼬치꼬치 물어오는 이진호 사장의 의도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가능성을 언급하기는 그렇고, 중국의 화웨이와 양강 구도를 형성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정 지점장, 이번 입찰에 성공하면, 내가 회장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한이 있더라도 이사로 승진시켜 줄게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인사는 입찰에 성공하면 받는 것으로 할게요. 나중에 통화합시다.]
“네, 사장님.”
이진호 사장과 통화를 마친 정명훈 지점장은 양손을 강하게 움켜쥐며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무조건 입찰을 성공해야 해.”
* * *
보다콤 콩고 지사.
겨울은 가쿠타 과장과 함께 대강당 출입문 앞에서 현장 설명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면밀하게 체크했다.
지금까지 여러 팀들이 대강당에 입장했지만, 경쟁력을 갖춘 팀은 대한 그룹, 중국의 화웨이, 일본의 KDDI 컨소시엄 세 팀 정도였다.
그나마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2위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Orange 컨소시엄도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특히 두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가쿠타 과장님, Orange가 미친 척하고 투찰 가격을 엄청나게 낮은 가격으로 적어 내면 어떻게 될까요?”
“설령 Orange가 최저 가격으로 투찰한다고 해도, 보다콤에서 온갖 트집을 잡아서 계약서에 사인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럼 Orange가 현장 설명회에 참석한 이유는 뭘까요?”
“경쟁사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 아닐까요?”
“하긴… 그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이제 올 사람들은 모두 온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현장 설명회는 정확하게 오후 3시에 시작되었다.
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무대 중앙로 이동해서 객석을 향해 정중한 자세로 인사하고 마이크 전원을 켰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보다콤의 콩고 지사에서 근무라고 바캄부 치프 매니저입니다. 이제부터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 현장 설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저희 보다콤은 빠르게 변화하는 무선통신 시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바캄부 치프 매니저는 입찰 추진 배경과 개요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해 나갔다.
“…입찰 조건은 최저가이고, 입찰 마감 시간은 8월 3일 오후 5시입니다. 투찰 가격은 입찰 마감 즉시 현장에서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장 공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겨울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송훈석 회장이 약속대로 화웨이의 꼼수를 분쇄시킨 증거이기 때문에.
그는 즉시 화웨이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해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려 그들의 표정부터 살폈다.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넋이 나간 듯한 허망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고소하다, 이놈들아.’
겨울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사이, 멍하니 화웨이 사람들을 바라보던 겨울을 향해 옆자리에 앉은 남선욱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겨울 씨, 그쪽에 무슨 일 있어요?”
입찰 팀에서 화웨이의 꼼수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일곱 명.
조병석 부사장이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어 봐야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며 함구령을 내린 결과였다.
그러니 통역을 담당한 남선욱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은 뭐라고 변명할지 짧게 고민한 후, 남선욱과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의 맞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해 본 거예요.”
“겨울 씨도 의외로 싱거운 면이 있네요?”
“하하, 그런가요?”
“그나저나 우리는 오늘 통역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이번 현장 설명회에서 겨울과 남선욱의 임무는 통역 업무였다.
통역은 발언자의 의중까지 곁들여 의사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고난도의 스킬이 필요한 업무였다.
겨울과 남선욱은 그저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안다는 이유로 통역에 선발된 것이기 때문에 여간 부담스러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바캄부 치프 매니저는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현장 설명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다행이죠, 정말.”
“이하동문입니다.”
두 사람이 속닥대는 동안에도 바캄부 치프 매니저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기지국 업그레이드는 내년 8월까지, 데이터 센터는 3년 안에 공사를 완료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질문 받겠습니다.”
가운데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고 입을 열었다.
“데이터 센터가 가동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전기가 필요한데, 전력 수급 계획은 수립되어 있습니까?”
“데이터 센터가 설립될 인근에 대형 화력발전소를 건설되고 있습니다. 내년 말에 완공될 예정이기 때문에 전기는 문제없을 것이라 봅니다.”
“핸드폰 기지국과 데이터 센터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자재를 수입해야 하는데, 거기에 관세를 책정할 예정입니까?”
“콩고민주공화국 정부와 협의된 결과를 말씀드리면, 저희한테 신고한 기자재에 대해서는 무관세 처리해 주기로 했습니다. 단, 저희한테 신고한 기자재보다 많이 수입한 경우에는 보복관세가 부여될 예정입니다.”
즉, 신고된 것만 하고 헛짓거리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 후에도 바캄부 치프 매니저는 객석에서 쏟아져 나온 질문들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더 이상 질문이 없는 것 같으니, 이상으로 현장 설명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바캄부 치프 매니저가 직원들과 함께 대강당에서 퇴장하자, 참석자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명회도 끝났으니 이제 8월 3일에 실시하는 입찰만 남겨 두게 되었다.
대한 그룹 입찰 팀은 베이스캠프인 킨샤사 인터내셔널호텔로 복귀해서 마무리 회의를 진행했다.
“윤성한 상무와 하제훈 상무는 현장 설명회에서 언급된 얘기들을 취합해서 최적의 견적을 산출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정명훈 지점장은 물류비용을 포함한 부대비용을 정확하게 산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을 제외하면 입찰 마감일까지는 불과 3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화웨이를 보란 듯이 꺾어 버립시다.”
“네, 부사장님!”
회의 참석자들의 목소리에는 굳은 결기까지 엿보였다.
그때, 윤성한 상무가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KDDI 컨소시엄과 Orange 그룹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까?”
“음, Orange 그룹은 경쟁사인 보다콤의 정책을 염탐하러 왔기 때문에 입찰에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
“Orange 그룹이 입찰에 참여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보다콤 쪽에서 전쟁하자는 의미로 해석하고 강력하게 대응하겠죠.”
“그렇겠군요.”
“KDDI 컨소시엄은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진행하는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에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제 느낌에는 다른 나라에서 진행하는 입찰에 대비해서 견학차 현장 설명회에 참석한 것 같습니다.”
“입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저희들처럼 적어도 2주 전에는 베이스캠프를 차려야 하는데, 그들은 그저께 이 나라에 입국한 것이 확인됐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부연 설명을 통해 그의 의견에 쐐기를 박아 버렸다.
조병석 부사장은 정명훈 지점장에게 고맙다는 신호를 보내 주고 말을 이어 나갔다.
“화웨이가 우리 회사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전방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정보 유출이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네, 부사장님.”
이제 피 말리는 3일간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