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패배를 예상하고 전쟁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다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남선욱의 이번 업무는 통역이었다.
통역 업무가 대부분 그렇듯, 콩고민주공화국 사람들과 만나서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눌 때는 아주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그다지 필요 없는 인력으로 전락한다.
조금 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팀원들의 업무를 도와주기 위해서 회의실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마냥 회의실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던 그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숙소로 슬그머니 올라왔다.
하지만 오늘 오후에 있던 일이 머릿속을 헤집는 바람에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서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언제 호출받을지 모르니 비상대기를 해야 했다.
“호텔 정원이라도 산책해야지, 답답해서 미치겠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로비로 내려간 그곳에서 그는 우연찮게 겨울과 마주쳤다.
“어라? 겨울 씨, 지금 퇴근하는가 봐요?”
“네, 선배님. 어디 가시려고요?”
“방에 있기 답답해서 바람 쐬러 잠깐 나왔어요.”
말 못할 사연이 있다는 듯 그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겨울은 그 사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음, 시간 괜찮으시면, 저하고 한잔하실래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윗분들이 부르면 달려가야 하기 때문에 술은 어려울 것 같네요.”
“괜찮을 거예요. 이 나라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밤늦게 외국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요. 그리고 가볍게 마시면 되죠. 윗분들께 호출받아도 금방 달려갈 수 있게 말이죠.”
남선욱은 겨울의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출장 온 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저녁식사를 제외하고 늦은 시간에 이 나라 사람들과 미팅을 가진 적은 없었으니까.
“그럼 호텔 바에서 가볍게 한잔할까요?”
“호텔 바는… 다른 입찰팀원들은 일이 끝나지 않아서 조금 별로일 것 같습니다.”
그는 아직 일하고 있는 팀원들을 떠올리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술 마시다 팀원들 눈에 띠어 봐야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따로 아는 술집이 있어요?”
“걸어서 5분 거리에 펍이 하나 있습니다.”
“펍은 위험하다고 하던데요?”
“여기 곰베 지역은 칸샤사에서 치안이 가장 안정된 곳이에요. 중국 손님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다른 외국 손님들도 상당히 많거든요.”
“알았어요. 그곳에서 한잔합시다.”
* * *
“겨울 씨의 말이 맞는 것 같네요.”
펍의 구석자리를 차지한 남선욱은 중국 사람들로 가득 들어찬 펍의 내부를 휘휘 둘러보며 한마디 했다.
“여기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술집도 거의 마찬가지예요.”
“중국 사람들이 이 나라에 많은 이유가 있나요?”
“선배님도 중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정책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그럼요. 들어는 봤죠.”
“저들은 일대일로 정책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 온 중국 근로자들입니다.”
“어휴, 이 나라 사람들은 중국 놈들의 엉큼한 속셈을 알고나 있을까요?”
중국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게 돈을 팍팍 쏟아붓는 가장 큰 이유는 자원 수탈을 원활히 하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 남선욱은 그 점을 언급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들이 입 다물고 있는 이유는 뇌물 때문인가요?”
“아마도요.”
“하긴… 돈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들 하니까.”
남선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님, 이런 씁쓸한 얘기 말고, 일단 한잔하시죠.”
“그럽시다.”
겨울은 웨이터를 불러서 유창한 프랑스어를 사용해 콩고민주공화국의 명물인 스콜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돌아가자, 남선욱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겨울에게 보냈다.
“겨울 씨는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했나 봐요?”
“아닙니다. 저는 사회체육을 전공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어는 언제 배웠어요?”
“얼마 안 됐어요. 이 나라에 발령받은 후부터 배우기 시작했으니까요.”
남선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짧은 기간에 대학교 4학년에 프랑스 어학연수를 다녀온 자신만큼 프랑스어를 구사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겨울 씨,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불과 4개월 만에 프랑스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지는 못해요.”
“하하, 아마 이곳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어쩔 수없이 터득하다 보니 빨리 익히게 되었나 봐요.”
“생존 프랑스어치고는 발음이 상당히 좋은데요?”
“정통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과외 선생님한테 배워서 그래요.”
“과외 선생님을 두고 있어요?”
겨울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남선욱에게 말 못할 사연을 듣는 것은 포기해야만 한다.
겨울은 은센기와 관련된 얘기를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 나라에 발을 디뎠을 때 만난 택시 운전기사인데, 저하고 과거에 인연이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겸사겸사 프랑스어 과외 선생님으로 삼아 버렸어요.”
“인연이요? 그 사람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데요?”
“음, 그게… 사실 저는 6년 전까지만 해도 축구 선수였습니다.”
겨울은 은센기와 얽힌 인연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서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습니다.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관련된 정보도 그 선생님께 들은 거고요.”
“한마디로 얘기해서 과외 선생님이자 정보원인 셈이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웨이터가 병에 들어 있는 스콜 맥주와 안주를 내왔다.
시원한 스콜 맥주를 단숨에 꿀꺽꿀꺽 마신 남선욱이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아! 시원하다.”
“선배님, 맥주가 입에 맞나 보네요?”
“깊은 호프 맛이 살아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심심한 맥주와는 완전히 다른데요?”
“하하, 이 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술이 바로 스콜 맥주예요.”
“TV 광고에도 스콜 맥주가 엄청 많이 나오던데, 다 이유가 있었네요.”
술자리가 무르익어 감에 따라 남선욱이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하아… 겨울 씨, 우리가 중국의 화웨이를 상대로 입찰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겨울은 예의 그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선배님,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전쟁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어요.”
비교적 덤덤하게 말하는 겨울과는 달리, 남선욱은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늘 오후에 조병석 부사장이 입찰을 주관하고 있는 보다콤의 고위 관계자를 만나고부터 생겨난 증상이었다.
그는 조병석 부사장한테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은 중국의 화웨이가 가져갈 것이 확실하다면서 헛수고하지 말라고 조언해 왔다.
차마 그 말을 통역해 줄 수 없어서 열심히 해보라는 뜻으로 순화해서 전달해 주었지만.
입찰을 진행하는 측에서 이미 승자를 결정해 놓고 있다는데, 자신들이 최선을 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선욱은 오늘 오후에 있던 일을 겨울에게 사실 그대로 털어놓았다.
“그래서 지금 답답해 죽겠습니다.”
겨울은 남선욱의 표정이 어둡던 이유를 듣고 마음이 좋지 못했다.
그의 답답한 심정을 시원하게 풀어 주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세 가지 이유를 털어놓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밀로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겨울은 비밀을 털어놓는 대신, 조금 낯부끄럽지만 지난 4월 말에 있던 일을 얘기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선배님, 지난 4월에 저희가 잠비아의 바이어한테 가전제품을 수출하기 위해서 비즈니스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법인장님께서 가격 조건이 너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저희가 올린 결재를 부결했습니다.”
겨울은 당시에 있던 사건을 비교적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이렇게 해서 저희 콩고 지점은 대박을 쳤습니다.”
“심판이 휘슬을 불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건가요?”
“정확한 예시네요. 네. 저희는 아직 경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어요.”
“…조언 고마워요.”
뜬금없는 감사 인사에 쑥스러워서 겨울은 주섬주섬 일어서며 말했다.
“아고,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볼일을 보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던 겨울은 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중년 남자와 부딪혔다.
퍽!
쿠당탕!
대비를 하고 있었으면 피했을 텐데, 무방비 상태에서 부딪히다 보니 겨울은 볼썽사납게 화장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중년 남자는 바닥에 넘어진 겨울에게 중국어로 한마디 내뱉고, 급하게 양변기가 설치되어 있는 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미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겨울은 순간적으로 치솟은 짜증을 겨우 가라앉혔다.
일어나서 옷에 묻어 있는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 겨울 씨,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픈 표정으로 옆구리를 쥐고 앉는 겨울을 향해 남선욱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웬 중국 사람이랑 부딪혔어요.”
“사과는 받았어요?”
“중국어로 뭐라 뭐라 하기는 하더라고요.”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네요.”
“사과라도 받아서 다행이죠.”
“내일은 정말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내일은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과 관련해서 현장 설명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겨울과 남선욱, 그리고 정명훈 지점장은 통역이라는 막중한 역할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컨디션 저하는 곤란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흠흠, 겨울 씨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술값은 내가 계산했어요.”
“아, 제가 계산해야 하는데… 잘 먹었습니다, 선배님.”
“하하, 입사 후배한테 술을 얻어먹는 선배가 어디 있어요.”
“하하하, 그런가요?”
남선욱을 호텔까지 데려다준 겨울은 집으로 가기 위해서 택시 승강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윙윙―
그때, 은센기가 전화를 걸어왔다.
겨울은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생각하며 마침 잘됐다 싶었다.
“네, 은센기 씨.”
[겨울 씨, 혹시 집인가요?]
“아닙니다. 이제 퇴근하려고 호텔을 나서던 참입니다.”
[10분만 기다려 주실래요? 제가 바람처럼 달려갈게요.]
“네? 어… 네, 알겠습니다. 오다가 사고 나면 안 되니까, 천천히 오세요.”
[하하하, 염려 마세요.]
은센기는 뭐가 그리 급한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경적을 울리며 겨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승차 인원이 많을 경우를 제외하고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절대로 조수석에 승객을 태우지 않았다.
하지만 은센기와 친분이 두터워진 겨울은 아무 거리낌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무슨 일 있어요?”
“제가 30분 전쯤에 우리나라 사람과 중국 사람을 태웠는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심상치 않아서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데 그래요?”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한테…….”
은센기의 말을 듣고 있던 겨울은 큰일 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만약에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한 그룹은 하늘이 반쪽으로 갈라진다고 하더라도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을 따낼 수 없었다.
겨울은 심하게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급하게 질문부터 던졌다.
“그 중국 사람, 아니면 콩고민주공화국 사람의 이름과 직위를 들으셨습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중국 사람은 위양 이사라고 했고, 우리나라 사람은 바캄부 치프 매니저라고 했습니다.”
“인상착의를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사진을 보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겨울은 은센기에게 두세 가지 질문을 더 물어보고, 곧바로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부지점장.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지점장님, 제가 방금 전에 엄청난 정보를 하나 취득했습니다.”
[엄청난 정보? 얘기해 봐.]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의 목소리에서 심각성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가 평소 알고 지내던 택시기사와 대화를…….”
겨울은 은센기에게 들은 얘기를 사실 그대로 보고했다.
[이 나라 사람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부캄부라고 했습니다.”
[부캄부라…….]
정명훈 지점장은 끝말을 흐리며 말을 중단했다.
겨울은 그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없이 기다렸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잔뜩 긴장한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호텔로 돌아오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넉넉잡고 20분이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택시 기사와 함께 호텔 로비에서 만나자고.]
“네, 알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