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중국의 아성을 무너트리는 법 (1)
“부사장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차창 밖의 풍경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조병석 부사장은 그제야 차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 지점장, 이 나라에도 중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중국의 디지털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항해서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을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디지털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는 중국의 화웨이 등 정보통신기술(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ies) 기업이 아프리카의 각 나라에 진출해 무선통신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사업을 말한다.
정명훈 지점장도 이 점 때문에 입찰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단, 겨울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는 겨울이 해 준 얘기를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리고 조병석 부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부사장님,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중국놈들과 한번 붙어 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뭔가 근거라도 있나요?”
“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세 가지씩이나 된다고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조병석 부사장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명훈 지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중국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디지털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미국이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다는 점이 첫째 이유입니다.”
“색안경이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미국은 중국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통신망을 장악해서 그들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여기고 있답니다.”
“흠, 근거를 제시해 줄 수 있나요?”
정명훈 지점장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겨울에게 얘기로만 들었지 따로 근거 자료를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괜히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가 망신살을 뻗치느니,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부사장님, 죄송합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사실 세 가지 이유는 저희 부지점장인 한겨울 씨의 입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한가한 시간에 당사자한테 직접 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조병석 부사장은 실망감이 몰려왔다.
입사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신입 사원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여기저기서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취합해 보고한 것이 빤할 텐데.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에 잠깐이나마 희망을 가진 자신과 괜히 희망을 불어넣은 정명훈 지점장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정 지점장, 그 얘기는 듣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조병석 부사장은 또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링링링―
그때, 조병석 부사장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요란스런 벨소리를 토해 냈다.
액정에 떠 있는 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실장님. 조병석입니다.”
[그래, 조 부사장. 콩고민주공화국은 잘 도착했나?]
“네. 지금 호텔로 이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흠? 거기 시간으로 2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호텔에 도착하지 못했단 말인가?]
“비행기는 공항에 제시간에 도착했는데…….”
조병석 부사장은 입국 심사대에서 있던 사건을 간략하게 보고하면서 자신의 의견까지 덧붙였다.
“…중국놈들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저희가 입찰을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그런 소리 말아. 이번 입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만… 현실이 너무 암울해서 그럽니다.”
[지금 주위에 누가 있나?]
“저하고 콩고 지점의 정명훈 지점장밖에 없습니다.”
[내가 조 부사장을 입찰 팀 책임자로 선발한 이유를 알고 있나?]
조병석 부사장도 그 점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한국에서 서동호 실장에게 그 이유를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그는 빙그레 웃기만 했을 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제야 그 이유를 얘기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알고 있었으면 물어봤겠냐’하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조병석 부사장이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지금 회장님께 시험받고 있는 중이야.]
“네? 시험이라뇨?”
[회장님은 내년에 자네를 대한 텔레콤의 CEO를 맡길 생각을 가지고 있네.]
“그럼… 이번 입찰 성공 여부에 따라서 제 운명이 결정된다는 말입니까?”
[잘 알고 있군그래.]
조병석 부사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숨겨진 내막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죽어도 입찰 팀 책임자 자리를 떠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입찰을 실패할 것이 빤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미 버스는 저 멀리 떠나간 뒤였다.
그런 생각에 꽂히자, 조병석 부사장은 성질이 뻗쳐서 자신도 모르게 실수를 저질렀다.
“매형, 하나밖에 없는 처남한테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있던 정명훈 지점장은 화들짝 놀랐다.
입찰 팀의 책임자가 부사장급으로 결정된 이유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서동호 실장이 굳이 처남인 조병석 부사장을 사지로 몰아넣은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물어보겠다고 생각하면서 두 사람의 통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뭘 너무했다는 거야? 처남은 우리 회사가 입찰에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나?]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흠, 나는 처남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 회사가 입찰에 성공할 확률이 적어도 30%는 된다고 생각하네.]
“확률을 너무 높게 잡은 것 아닙니까?”
[처남, 내가 4월 말에 콩고 지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까?]
“네? 그게 지금 이 일이랑 무슨 관계가…….”
[일단 들어 봐. 콩고 지점에서 잠비아의 ZAHA라는 유통회사에 가전제품을 수출하기…….]
서동호 실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조병석 부사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무거운 가전제품을 화물 전세기를 임대해서 운송할 생각을 했다니.
신입 사원이기 때문에 이런 엉뚱한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도 있다고 쳐도, 유통업계에서 닳고 닳은 싱칼라 회장이 겨울의 아이디어를 덥석 수용한 것도 몹시 의아했다.
조병석 부사장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서동호 실장의 얘기는 계속됐다.
[…해서 한겨울 씨의 아이디어 덕분에 콩고 지점은 상반기에 75% 신장이라는 놀라운 실적을 달성했네.]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내가 처남한테 이런 얘기를 해 준 이유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서야.]
조병석 부사장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동호 실장이 이처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데, 성질 뻗치는 대로 비관적인 얘기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매형. 최선을 다해서 입찰에 임하겠습니다.”
[그래. 회장님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좋은 결과 기대하고 있겠네.]
서동호 실장과 통화를 마친 조병석 부사장은 뒤늦게 정명훈 지점장을 의식하고 당부의 말을 꺼냈다.
“크흠, 나하고 서동호 실장님의 관계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물론입니다. 반드시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부지점장? 한겨울 씨가 얘기한 세 가지 이유는 따로 시간 내서 들어 볼게요.”
* * *
킨샤사 인터내셔널호텔 회의실.
자리에서 일어난 정명훈 지점장은 입찰 팀 모두에게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 콩고 지점을 맡고 있는 정명훈이라고 합니다. 공항에서 공지사항을 전달해야 했으나, 워낙 혼잡한 바람에 부득이 이곳에서 전달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숙소 배정표와 생활 안내문은 공지사항 전달이 끝나고, 한겨울 씨가 여러분께 나눠 드릴 예정입니다. 참고로 호텔 객실은 1인 1실을 배정했습니다.”
그때, 입찰 팀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강대화 부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정 지점장님, 그렇게 되면 회사의 출장 규정에 위배되지 않습니까? 예산이라든가 말입니다.”
“이 나라는 공산품을 제외한 물가 수준이 워낙 낮기 때문에 배정된 예산보다 훨씬 적게 들어갈 겁니다.”
“아, 그렇다면 문제없겠군요.”
“계속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나라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치안이 매우 불안한 나라입니다. 낮에는 그나마 덜하지만, 밤에는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는 외출을 자제해 주십시오.”
“반드시 외출해야 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희가 고용한 경비원과 같이 외출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이겠지만, 모기로 인한 질병이…….”
정명훈 지점장은 콩고민주공화국에서의 생활 지침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해 나갔다.
“…입찰 결과에 상관없이 여러분이 안전하게 귀국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이제부터 질문 받겠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손을 들어 질문하기 시작했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여러분에게 배포할 생활 안내문에 저희들과 대사관 담장자의 연락처가 적혀 있을 겁니다.”
“새벽에 전화해도 됩니까?”
“24시간 전화를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 다만, 저희도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새벽에는 정말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만 전화해 주십시오.”
“휴일에는 관광지를 다녀도 됩니까?”
“그에 대한 답변은 제가 드릴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조병석 부사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 관광 온 게 아니라 입찰 전쟁에 참전하러 왔습니다. 내 말뜻을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정 지점장, 계속 진행하세요.”
정명훈 지점장은 조병석 부사장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질문 받겠습니다.”
“킨샤사에 한국 음식점이 있습니까?”
“네, 한 곳이 있습니다. 입찰에 성공하면 제 사비로 여러분을 그곳에 모시겠습니다.”
“하하, 그곳에 가 보려면 반드시 입찰을 따야겠네요?”
“저도 그렇게 되기를 기원해 마지않겠습니다.”
이후에도 정명훈 지점장은 출장자들의 질문에 성심 성의껏 대답했다.
“이제 더 이상 질문이 없는 것 같으니 조병석 부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임시 회의를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조병석 부사장은 출장자들의 면면을 주욱 훑어본 뒤,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이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을 수주하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최선을 다한다면 입찰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사고를 크게 한번 쳐 봅시다.”
“네, 부사장님!”
“임원들은 할 말이 있으니까 30분 뒤에 내 방으로 오세요. 자, 이제 숙소로 올라가서 짐을 풀어 봅시다.”
조병석 부사장의 말이 떨어지기기 무섭게 겨울은 출장자들에게 숙소 배정표와 생활 안내문을 배포했다.
짐 정리를 위한 막간의 시간.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을 불렀다.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조병석 부사장이 궁금하게 여기던 것을 질문하기 위함이었다.
“…근거 자료는 가지고 있나?”
“가지고 있습니다만, 제가 부사장님께 직접 보고해야 하는 겁니까?”
“부사장님께 보고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마음 편하게 먹고 있어.”
“네! 지점장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흐음, 지금까지는 나를 믿지 않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내 말이 맞나?”
정명훈 지점장이 이런 농담을 던져온 이유가 무엇인지 겨울은 금방 알아차렸다.
긴장하지 마라.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는 상사가 정말 고마웠지만, 쑥스러운 마음에 고맙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이고, 지점장님.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하하.”
정명훈 지점장과 겨울은 다른 임원들보다 조금 일찍 조병석 부사장의 스위트룸을 찾았다.
“어서들 오세요.”
“부사장님, 숙소가 마음에 드십니까?”
“시설도 훌륭하고, 전망도 좋고, 아주 내 맘에 쏙 들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한겨울 씨, 우리들을 위해서 음료수를 가져다줄 수 있나요?”
“네, 물론입니다.”
겨울은 재빨리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대한건설의 윤성한 상무를 비롯한 네 명의 임원이 조병석 부사장의 스위트룸을 찾아왔다.
그들은 겨울이 준비한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가벼운 대화부터 시작했다.
“한겨울 씨, 이 나라의 공산품 물가가 비싸던데,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