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알면 알수록 신기한 나라
[제가 법인장 대행에 임명된 게 선배님의 작품이죠?]
추성민 팀장이 의문을 품으며 물어왔다.
사실 정명훈 지점장도 그 점에 대해서는 의아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진호 사장이 법인장 대행이 누가 좋겠냐고 물어왔기에 추성민 팀장을 추천한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진호 사장은 사전에 어떤 언질도 없이 오늘 아침에 추성민 팀장을 아프리카 법인장 권한대행으로 전격적으로 임명해 버렸다.
이로 인해서 잔뜩 기대를 품고 있던 박정훈 이사는 시원하게 김칫국을 마셔 버렸고.
그러나 아무리 추성민 팀장과 친하다고 해도, 이 사실은 절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
“추 팀장, 내가 그럴 깜냥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에이, 그러지 말고 진실을 얘기해 봐요. 선배님이 사장님께 말씀드렸죠?]
추성민 팀장은 여전히 믿고 있지 않았다.
그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법인장을 대행하게 되면 임원으로 승진하는 데 상당히 유리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만약에 사장님께서 나한테 물어 왔으면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 내가 거절했을까?”
[하긴… 그것도 그러네요.]
추성민 팀장의 의심을 덜어 내는 데 성공한 정명훈 팀장은 재빨리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아차, 깜빡하고 있었네요. 이번 주 금요일에 법인장님 송별식이 있으니까, 참석하시라고 연락드렸어요.]
미우나 고우나, 2년 6개월 이상 직속 상사로 모신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참석하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날 상당히 중요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음, 그날에는 본사에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올 예정이라 참석하지 못할 것 같은데… 법인장님께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려 줘.”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과 선배님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 대한 그룹 태스크포스가 입찰을 따게 되면, 기지국과 데이터 센터에 설치되는 장비는 누가 수입해서 공급해야 하는데? 우리 콩고 지점, 아니, 아프리카 법인의 실적에 포함되는 거 모르나?”
[중국 업체들과 우리나라의 BK 그룹도 입찰에 참여할 것이 빤한데, 우리가 낙찰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정명훈 지점장의 생각도 추성민 팀장과 같았다.
중국 업체가 낙찰받아 갈 것으로 예상해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본사에서는 입찰 참여를 공식화했고, 사전 준비 작업을 끝내고 금요일이 입국한다고 통보해 왔다.
하여 애초에 정보를 보고한 겨울과 대화를 나눠 보니, 그는 의외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신입 사원의 패기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그럴 듯했다.
이 얘기를 추성민 팀장에게 얘기해 주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적어도 가능성이 30%는 넘는다고 생각하고 있어.”
[선배님, 중국놈들이 아프리카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몰라요? 그리고 BK 텔레콤도 손 놓고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그저께 저녁에 한겨울이랑 저녁을 먹으면서…….”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에게 들은 얘기를 추성민 팀장에게 상세하게 옮겼다.
[어, 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승산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 얘기가 밖으로 나돌아 봐야 좋을 것은 없으니까, 추 팀장만 알고 있어.”
[왜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 모르나?”
[알겠어요. 그러면 나중을 위해서라도 법인장님께 전화 한 통 드리세요.]
“나중이라니?”
[법인장님이 최고 경영자 육성 과정 교육을 끝마치면, 이진호 사장의 후임으로 간다는 소문이 있어요.]
안정혁 법인장은 장기 교육 형식으로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이지만, 6개월 뒤에는 해임당할 처지에 몰려 있다.
이 사실이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다 보니 어느새 이와 같은 소문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흐흐, 추 팀장은 그 소문을 믿나?”
[신빙성은 낮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법인장님이 사장님의 후임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장으로 승진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혹시 또 모르죠. 회장님께서 두 계단을 승진시켜 줄지.]
“법인장님이 회장님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아차, 깜빡했네요. 흠… 아, 그나저나 잠비아의 싱칼라 회장이 말라리아와 콜레라 치료제 수입 허가는 정말로 받았답니까?]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인프라가 매우 열악한 편이었다.
거기다가 무더운 날씨 탓인지 국민들 성격 또한 상당히 느긋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스피드를 강조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복장 터져 죽을 정도로 업무 처리 속도와 질은 형편없었다.
그런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한 정명훈 지점장은 싱칼라 회장이 말라리아와 콜레라 치료제의 수입 허가를 받는 데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후에 수입 허가를 받았다고 연락을 취해 왔다.
그가 치료제 얘기를 꺼낸 것이 5월 초이니, 불과 두 달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그러니 아프리카 사정을 빤히 알고 있는 추성민 팀장도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도 처음엔 의심스러웠는데, 떡하니 수입 허가증을 보내오더라고.”
[싱칼라 회장은 두 질병의 치료제를 언제 수입한다고 합니까?]
“앞으로 두세 달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왜요?]
“그가 요구하는 물량이 엄청나게 많아서 생산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고 하더라.”
[도대체 양이 얼마나 되는데요?]
“각각 500만 개씩.”
[허어… 선배님,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여러 번에 나눠서 수입하면 되잖아요.]
정명훈 지점장도 싱칼라 회장한테 똑같은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반대로 부족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여 왔다.
잠비아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도 유통시킬 생각으로 이번 일을 추진 중이라면서 유통은 걱정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정명훈 지점장은 그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음, 그 치료제들은 다른 나라들에 유통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답니까?]
“어.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얘기는 안 해 주더라.”
[하여간 알면 알수록 신기한 나라가 아프리카라더니… 날이 갈수록 그 말이 맞는 것 같다니까요?]
“하하,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요즘 그 말이 새삼 와닿는다.”
정명훈 지점장이 추성민 팀장과 통화를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자, 겨울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지점장님,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본사에서 보내왔습니다.”
“그래? 어디 줘 봐.”
출장자 명단을 받아 본 정명훈 지점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법인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본사에서 수행하는 업무에 도움을 줄 의무가 있었다.
자신도 아프리카에 근무하는 동안, 대한 그룹이 참여하는 입찰에 꽤나 많이 동원된 경험이 있었다.
이번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은 대한 건설과 텔레콤이 공동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각 회사에서 다섯 명씩, 총 열 명 정도가 출장 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출장자 인원은 모두 서른한 명으로 늘어 있었다.
그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입찰 팀의 책임자의 직위가 부사장이라는 점이었다.
‘이번 입찰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호텔 객실은 회사 규정보다 한 등급 상향해서 예약하도록 해.”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그래 봐야 다른 대륙의 나라들보다는 훨씬 저렴하잖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회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니까, 회의실도 세 개 정도 예약해야 할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겨울은 곧바로 가쿠타 과장과 호텔을 예약하러 외출했다.
정명훈 지점장은 출장자 명단을 다시 한번 쳐다보면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지주회사의 부사장이 책임자라니, 뭔가 이상한데?”
* * *
금요일 오전.
대한민국에서 콩고민주공화국의 관문인 킨샤사까지 직항하는 여객기는 당연히 없었다.
한국에서는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를 경유하는 경로를 제일 많이 이용하고 있다.
물론, 프랑스 파리, UAE의 두바이, 터키의 이스탄불을 경유해서 킨샤사로 입국하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드문 편이었다.
예상대로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 팀은 비행시간이 제일 짧게 걸리는 아디스아바바를 경유해서 입국하는 편을 택했다.
그래도 환승 시간까지 감안하면 20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나라가 콩고민주공화국이었다.
정명훈 지점장과 겨울은 도착 시간에 맞춰 은질리 국제공항 입국장 앞에서 입찰 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점장님, 비행기가 연착한 것일까요?”
정명훈 지점장도 겨울과 같은 생각이었다.
입찰 팀의 도착 예정 시간은 12시 10분.
입국 수속을 받고 짐을 찾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고 감안하더라도, 이 시간이면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내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한 부지점장은 이곳이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종종 잊고 있나 봐?”
“아……!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했습니다.”
“내가 웃자고 한 소리를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나?”
“지점장님 말은 농담과 진담이 거의 구분이 안 돼서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그건 그렇고, 프랑스어 실력은 어떻게, 많이 길렀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쉽게 배우는 편이라고 한다.
영어와 프랑스어가 같은 알파벳을 사용하는데다가, 문장 구성, 단어가 유사한 것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겨울도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프랑스어 실력이 날로 향상되고 있었다.
“저희 회사 직원들과 편안하게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우리가 입찰 팀의 통역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부지점장이 프랑스어를 못하면 싫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군그래.”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그래. 이번 기회에 본사 사람들에게 자네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 주라고.”
조금씩 인정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겨울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문득 겨울은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핸드폰 업그레이드 입찰에 참여하는 회사는 대한건설과 대한텔레콤이었다.
따라서 그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계열사에 소속된 사람들일 텐데, 어쩐 일인지 정명훈 지점장은 입찰 팀 명단을 받은 후부터 모두 본사 사람들이라고 지칭했다.
겨울은 그 이유가 궁금해서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입찰 팀에 지주회사 사람들이 몇 명 포함되어 있어서 그래. 그리고 책임자가 지주회사 소속의 부사장님이야.”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태스크포스가 구성됐다는 말인가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될 거다.”
“지점장님은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음, 나도 지주회사 사람들하고 입찰을 진행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야.”
* * *
느긋한 둘과는 반대로, 입찰 팀의 책임자인 조병석 부사장은 짜증나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입국 심사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국도 이렇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놈의 나라는 뭐가 이렇게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그때,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대한건설의 윤성한 상무가 말을 붙여 왔다.
“부사장님, 입국 심사가 오래 걸리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뭔데요?”
“이 나라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황열 예방접종 증명서를 소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지만 그의 설명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승객들 중 누군가가 입국 심사대 직원에게 큰 목소리로 따지며 난동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공항 경찰은 승객의 난동을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조병석 부사장은 윤성한 상무에게 이유를 알고 있냐고 물었다.
“저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승객이 중국 사람인 것 같습니다.”
“중국 사람은 난동을 부려도 된답니까?”
“중국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게 무상으로 지원을 많이 해 준 결과라고 보시면 됩니다. 특히 콩고민주공화국은 5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 경기장과 국회의사당을 중국이 무상으로 건설해 줬습니다. 그런 이유로 다들 가만히 있는 겁니다.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이 나라에만 오면 안하무인이 된다고 합니다.”
“하아, 이번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도 험난한 길이 예상되는군요.”
“저도 부사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윤성한 상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