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엉뚱하기로 소문난 사람
겨울은 콩고민주공화국에 도착하는 날 공항에서 인연을 맺은 은센기에게 정기적으로 프랑스어 강습을 받는 중이었다.
프랑스어 참고서와 핸드폰 어플을 통해 익힌 문법과 회화 표현을 은센기외 대화를 통해 연습하고, 그때마다 드는 비용이나 음식값은 수업료 명목으로 겨울이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오늘도 겨울은 은센기와 킨샤사 시내에 위치한 프랑스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은센기 씨, 예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그럼요.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저번에 보니까 핸드폰을 두 개씩 가지고 다니던데, 이유가 뭔가요?”
부자, 또는 가난한 사람들을 제외한, 콩고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많게는 네 개까지 핸드폰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이 이처럼 핸드폰을 여러 개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바로 돈 때문이었다.
은센기는 이유를 설명해 주려다 거꾸로 겨울에게 물었다.
“회사 직원들이 알려 주지 않던가요?”
“음, 그분들께는 따로 물어보지 않았어요. 전부 핸드폰을 하나씩만 가지고 다녀서요.”
“대한 그룹에서는 직원들에게 통신비를 지원해 주나 보군요.”
“어? 맞아요.”
“아이고, 부러워라.”
한차례 너스레를 떤 은센기는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에는 보다콤(Vodacom), 오렌지(Orange), 에어텔(Airtel), 아프리셀(Africell)이라는 통신사가 있어요. 제가 핸드폰을 두 개나 쓰는 가장 큰 이유는 통신 요금 때문이에요.”
“통신 요금이랑 핸드폰을 두 개를 쓰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한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같은 통신사를 이용하는 사람들끼리는 통화 요금이 상당히 저렴한 편이에요. 반대로 다른 통신사를 이용하는 사람과 통화할 때는 요금이 비싼 편이죠. 다만 그게 너무 과해서 전화하는 게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두 개를 사용하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통신사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건가요?”
“뭐, 보나 마나 고객을 다른 통신사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얄팍한 마케팅 상술 아닐까요?”
“흐음, 우리나라는 통신비를 정부에서 결정해 주는데, 콩고민주공화국은 그렇지 않나 보네요.”
“네. 우리나라에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들은 토종 기업이 아니거든요.”
“정부에서 그런 회사들을 통제하지 못하고요?”
“그렇죠. 안 그래도 몇 년 전에 정부 차원에서 한번 시도했다가, 그 회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철수한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죠.”
전형적인 다국적 기업의 횡포였다.
은센기도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어두운 민낯을 보여 주기 싫었는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아, 맞다. 겨울 씨, 제가 따끈따끈한 정보를 하나 알려 줄까요?”
“오, 뭔데요?”
“제가 어제 보다콤이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을 위한 국제입찰을 진행한다고 들었어요.”
각 나라에 파견 나가 있는 주재원들은 해당 나라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수집해서 본사에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본사에서는 각 나라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보 보고 건수가 필요하던 겨울은 마침 잘됐다 싶었다.
“더 자세하게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우리나라는 핸드폰이 3G에서 LTE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놓여 있어요. 시장 점유율 1위인 보다콤은 후발 주자인 오렌지의 맹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 LTE 서비스를 서두르고 있죠. 그리고 이번에 핸드폰 불통 지역을 없애기 위해서 기지국도 제법 많이 증설한다고 들었어요.”
“음, 입찰을 언제 진행한대요?”
“8월 초라고 들었어요.”
지금은 7월 초.
한 달 정도면 빠듯하긴 해도 국제입찰에 참여할 시간은 될 듯싶었다.
은센기에게 이것저것 물어서 정보를 취득한 겨울은 이를 간추려 메모하고 사택으로 출발했다.
겨울이 사택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말라리아와 뎅기열을 옮기는 모기의 박멸.
오늘도 아파트 곳곳에 모기약을 뿌려 주고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샤워를 끝낸 겨울은 은센기한테 취득한 정보를 노트북에 옮겨 담은 뒤, 즉시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송했다.
그러고 곧바로 참고서를 펼쳤다.
프랑스어 복습과 영어 공부는 오늘도 이어졌다.
매일 밤마다 잠들고 싶은 유혹을 참아 가며 눈물겨운 노력을 벌인 덕분에 겨울의 외국어 구사 능력은 날이 갈수록 조금씩 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오늘도 역시 운전기사인 쿠엘이 아파트 현관 앞에 승용차를 주차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겨울은 사택에서 회사까지 그다지 멀지 않아서 운동 삼아 걸어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가쿠타 과장이 킨샤사의 치안이 상당히 불안하다고 펄쩍 뛰며 만류하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출퇴근 때도 이렇게 차를 타고 다녔다.
윙―
겨울이 차를 타고 가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문자가 하나 수신되었다.
보나마나 가을이 보내온 문자이리라.
그렇지 않아도 겨울이 저지른 일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은 할 말이 있으면 늘 전화해 달라는 문자를 먼저 보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와 콩고민주공화국의 국제 통화 요금은 살인적인 수준이었으니까.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겨울은 문자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가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지난달 말에 왜 50만 원 더 보냈어?]
가을도 안부는 건너뛰고 용건부터 물어왔다.
“다음 주가 엄마 생신이잖아. 나 대신해서 용돈 좀 드려.”
[엄마한테 20만 원, 아빠한테 20만 원씩 드리고 밥 사 드리면 되지?]
“어. 땡큐.”
[그런데 오빠, 내 용돈은 없어?]
“나 참, 알았어. 7월 말에 50만 원 더 보내 줄게.”
[진짜? 그렇게나 많이?]
“회사에서 일 잘했다고 성과급을 더 준다고 해서.”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요즘 오빠 덕분에 돈 걱정 안 해도 되서 너무 좋다.]
* * *
같은 시각.
정명훈 지점장도 추성민 팀장과 통화 중에 있었다.
“의외네.”
[저도 선배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뭐, 그래도 안 법인장은 이제 아프리카 땅을 밟을 일은 없겠네.”
[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새로운 법인장은 누가 온대?”
[음, 일단 연말까지는 박정훈 이사가 겸임하기로 했어요.]
“박정훈? 크크크.”
[웃을 일이 아닙니다. 저한테는 동기지만, 선배님은 후배를 상사로 모시는 겁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정명훈 지점장이었다.
“나야 자주 안 보니까 상관없지.”
[선배님은 박 이사가 어떤 놈인지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하긴…….”
[아무튼 제가 선배님께 연락한 이유는 박 이사와 민 팀장을 떼어 놓아 달라는 부탁 때문입니다.]
“왜?”
[어제 오후에 안 법인장이 박 이사를 불러서 첫 번째로 내린 지시가 뭔지 아세요? 민 팀장과 의논해서 한겨울을 최대한 빨리 회사에서 내쫓으랍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박정훈 이사와 좋지 않은 기억으로 엮여 있었다.
원래 작년에 정명훈 지점장이 먼저 이사로 승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마치 확정된 것처럼 소문 또한 파다하게 퍼졌고.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승자는 그가 아니라 박정훈 부장이었다.
그가 이사로 승진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소문이 많았으나, 안정혁 법인장한테 로비를 심하게 했다는 소문이 정설로 굳어진 상태였다.
그런 자가 얍삽하기로 소문난 민경진 팀장과 합류하게 됐으니, 두 사람은 필연적으로 불장난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했다.
마음에 든 후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을 떼어 놓는 것이 마땅하지만, 아쉽게도 그에게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추 팀장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는데, 나는 일개 지점장이야.”
[무슨 소리세요. 그래도 선배님은 회장님과 직접 통화하실 수 있잖아요.]
“뭔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회장님과 통화한 건 사장님이 전화를 연결해 줘서야. 그것도 업무 보고를 하기 위해서.”
[그래도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야 해요.]
“그렇긴 한데… 그나저나 추 팀장이 한겨울을 이렇게 챙기는 이유가 뭐야?”
[그건… 겨울 씨 덕분에 우리 아프리카 법인이 1등을 차지했잖아요.]
정명훈 지점장은 그에게 다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우우웅―
그때,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명훈 지점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잠시 핸드폰을 들어 보니, 이진호 사장의 번호가 액정에 찍혔다.
“선배님, 진동 오는 거 같은데요?”
“어. 사장님께서 전화를 걸어오셨어. 추 팀장, 나중에 통화하자.”
“네, 선배님.”
재빨리 추성민 팀장과의 통화를 종료한 정명훈 지점장은 이진호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네, 사장님. 정명훈입니다.”
[정 지점장, 내가 너무 일찍 전화한 것은 아니겠죠?]
“괜찮습니다. 지금 회사에 출근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군요. 흠흠, 정 지점장은 나한테 궁금한 것이 없어요?]
당연히 있었지만, 차마 먼저 물어볼 수는 없었다.
“네, 없습니다.”
[있는 거 다 아니까, 얘기해 줄게요. 안 법인장 해임은 결정된 상태입니다. 다만, 내부적으로 정리할 것이 남아 있어 장기 교육 형태로 우리나라로 불러들인 겁니다.]
“아, 그럼…….”
[네. 이제 번거로울 일은 없을 테니, 업무에 열중하면 될 겁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순간적으로 갈등에 휩싸였다.
겨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잔재하고 있는 위험까지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맞았으나, 그렇게 되면 입이 가벼운 놈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한 끝에 일단 일을 저지르기로 결정 내렸다.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그 번거로운 일 때문에라도 박정훈 이사와 관리팀장인 민경진 부장을 떨어뜨려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근거 있는 얘기겠죠?]
“네, 그렇습니다. 방금 전에 마케팅 지원팀장인 추성민 부장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와서…….”
정명훈 지점장은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과 박정훈 이사와 민경진 팀장의 인물 세평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했다.
[흠, 정 지점장의 말을 믿어도 되겠죠?]
“제가 드린 말씀이 의심스러우면 전임 법인장이던 최명식 부사장에게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그럼 해결 방안에 대한 정 지점장 의견은 어떻습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추성민 팀장을 임시 법인장으로 임명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추성민 팀장이라… 그러고 보니 아프리카 법인에 근무하고 있는 부장급들 중에서는 정 지점장이 제일 선배 아닌가요?]
지금 이진호 사장은 자기를 떠보는 중이었다.
당연히 임시 법인장 자리가 욕심났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사양해야 할 때였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는 일단 저희 부지점장을 육성하느라 바쁠 거 같습니다.”
[하하하, 알았어요. 참고하도록 할게요.]
“사장님, 제 말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뭘요. 대신 내가 궁금한 것이 있을 때 가끔 전화해서 물어봐도 괜찮죠?]
“물론입니다, 사장님.”
[그래요. 아무튼 나중에 통화합시다.]
그때,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사장님. 긴급하게 보고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이 나라에는 핸드폰과 인터넷 서비스를…….”
정명훈 지점정은 겨울에게 이메일로 전송받은 정보 보고서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했다.
[흠, 검증해 봤나요?]
“제가 알고 있는 지인이 보다콤 매니저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한테 방금 전에 확인해 본 결과,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이메일을 나한테 전송해 줄 수 있나요?]
“통화가 끝나는 즉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에게 받은 이메일을 이진호 사장에게 즉시 전송했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 * *
정명훈 지점장에게 받은 이메일을 출력한 이진호 사장은 곧바로 서동호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사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실장님께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시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저도 입이 심심하던 차였는데 잘됐네요. 제 방으로 오시지 마시고, 회장님 집무실로 오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진호 사장에게서 건네받은 이메일을 천천히 읽어 본 송훈석 회장은 메일을 최초로 발신한 사람의 이름에 시선을 멈췄다.
“이 사장, 한겨울이 보내온 정보 보고서의 신뢰성 검토는 해봤습니까?”
“네. 검증 결과,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서 실장, 대한 텔레콤의 김한수 사장한테 전화해서 사실 여부를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서동호 실장은 곧바로 김한수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뒤 통화를 종료했다.
“회장님, 듣던 중 처음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우리가 입찰에 참여하면 기지국 업그레이드 공사를 수주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중국 업체들이 워낙 강세이기는 하지만, 승부를 걸어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죠?”
“엉뚱하기로 소문난 한겨울이 그곳에 있지 않습니까?”
“으하하하!”
송훈석 회장의 호탕한 웃음이 집무실 구석구석까지 스며 들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