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뭐니 뭐니 해도 실적이 최고
안정혁 법인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처럼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뭐니 뭐니 해도 실적이었다.
아프리카 법인의 경우에는 콩고 지점을 제외한 네 개 지점에서 소폭이나마 신장해 주고 있었기에 그나마 마이너스 신장은 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4월은 규모가 큰 남아공과 알제리 지점이 큰 폭으로 마이너스 신장을 기록하게 될 예정이었다.
늘 그래 오던 콩고 지점은 당연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1월에서 4월의 누적 실적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었다.
콩고 지점에서 추진하던 가전제품 수출 건을 괜히 부결했나 싶어 자책도 했으나,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추 팀장은 아직까지 뭐하고 있는 거야?”
똑똑.
그와 동시에 노크 소리와 함께 추성민 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추성민 팀장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핀잔부터 늘어놓았다.
“콩고 지점의 정명훈 지점장하고 통화하느라 늦었습니다.”
“내가 품의서를 부결한 것 때문에 정 지점장이 추 팀장한테 하소연했나 보네?”
“아닙니다. 다른 건 때문에 통화했습니다.”
“그래. 아무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리 법인의 4월 예상 실적이나 줘 봐.”
생각한 것보다 마이너스 신장 폭이 큰 4월 예상 실적을 받아 든 안정혁 법인장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소폭이나마 신장을 기록할 것으로 기대한 1∼4월 누적 실적이 전년 대비 마이너스 신장으로 전환되어 있었다.
마이너스 신장을 기록하고 있는 법인장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일례로 1∼3월 마이너스 신장을 기록한 호주 법인장은 실적 부진을 이유로 4월 초에 옷까지 벗었다.
자기라고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실어서 추성민 팀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 실적이 확정됐다고 봐야겠지?”
“네, 그렇습니다.”
“우리 법인의 실적이 다른 나라 법인에 비해서 어떤가?”
“1월에서 3월까지는 중위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4월 실적이 포함되면 하위권으로 처지게 됩니다.”
“콩고 지점에서 승인 요청한 품의서를 괜히 부결했나?”
“법인장님, 그 문제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됐어. 어차피 부결했는데, 뭐.”
그의 말에 추성민 팀장이 빙긋 웃으며 결재판을 안정혁 법인장 앞에 내려놓았다.
“법인장님, 정 지점장이 품의서를 또 올렸습니다. 한 번 검토해 보시죠.”
“내가 방금 전에 뭐라고 했는지 벌써 잊어버린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안정혁 법인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국, 중국 등 대형 법인을 제외하고 아프리카 같이 중소규모의 법인에서는 관리팀과 마케팅지원팀이 핵심 부서에 속한다.
따라서 두 팀의 팀장들은 능력이 뛰어나야 할 뿐만 아니라 법인장과의 호흡도 필수적이다.
추성민 팀장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기 때문에 현재 곁에 두고 있는 중이고.
그는 자기가 화를 내면 눈치껏 사과하면서 한발 뒤로 물러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점이 자신과 그의 관계를 지금껏 원만하게 이끌어 온 원동력이기도 했는데, 오늘 아침은 평소와는 다르게 살짝 반항하는 모습인 것이다.
“추 팀장, 오늘따라 왜 그래?”
“법인장님께서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오해를 했다는 거지?”
“정 지점장이 올린 품의서는 3일 전에 올린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의 품의서입니다. 아마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알았어. 잠깐 기다려.”
콩고 지점에서 올라온 품의서를 검토하던 안정혁 법인장은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1,260만 달러.
한화로 150억 원이 넘는 초대형 계약이었다.
게다가 이 이익률은 또 뭐란 말인가.
이익 금액으로만 따진다면 3,000만 달러짜리 초대형 계약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4월 마이너스 신장은 단숨에 만회하고도 남을 만한 규모였다.
그는 급한 마음에 핸드폰을 들고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법인장님.]
“방금 전에 정 지점장이 올린 품의서를 봤네. 당연히 사실이겠지?”
[물론입니다, 법인장님. 제가 장난으로 품의서를 올릴 만한 인물로 보이십니까?]
“이 친구야,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면 어떻게 해.”
[하하하,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의 밝은 목소리로 보아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었다.
안정혁 법인장은 기쁜 마음에 사무실을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싶었지만, 지금은 자중할 때였다.
품의서를 검토하다가 발견한 문제점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정 지점장, 내가 보다가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야.”
[얼마든지 여쭤보십시오.]
“먼저 ZAHA의 싱칼라 회장이 1,350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나?”
[당연히 확인했습니다. 품의서를 법인장님께서 승인해 주시면, 오늘 중으로 저희 아프리카 법인 계좌로 1,350만 달러짜리 LC(Letter of Credit, 신용장)를 오픈할 예정입니다.]
“우리가 수출하는 금액은 1,260만 달러인데, 굳이 1,350만 달러짜리 LC를 오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가전제품과 핸드폰을 컨테이너가 아닌 화물 전세기를 띄워서 운송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가전제품을 화물 전세기로 운송하다니.
항공 화물의 경우에는 무게로 비용을 계산하기 때문에 무거운 가전제품은 절대로 항공 운송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품의서에는 무거운 냉장고가 200대나 포함되어 있었다.
“정 지점장, 가전제품을 화물기에 실어서 운송하면 수지 타산이 맞나?”
[법인장님도 제 말씀을 들어 보시면, 충분히 이해가 가실 겁니다.]
“빨리 얘기해 봐.”
[잠비아는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로…….]
안정혁 법인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컨테이너 운송 대비 화물기 운송이 고작 4만 달러 비싸다면, 자신 같아도 그런 방법을 택했을 것이라며 수긍했다.
핸드폰 1만 8,000대를 컨테이너로 운송하다가 무장 반군들에게 탈취라도 당한다면 파산을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정 지점장, 화물 전세기를 빌리는 비용이 90만 달러인가?”
[아닙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40만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럼 90만 달러는 뭔가?”
[5월 중순경에 핸드폰 만 대를 운송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핸드폰 만 대를 5월 중순에 공급받는 이유가 뭔가?”
[제 동기가 대한전자 마케팅 이사로 근무하고 있는데, 핸드폰 만 대는 5월 중순에나 공급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안정혁 법인장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정 지점장, 어디 가지 말고 내 전화 대기하고 있어.”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핸드폰 1만 8,000대를 한꺼번에 공급받아 보려고.”
[가능하시겠습니까?]
“흐흐, 사장님께 떼를 한 번 써 보려고.”
[하하하,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정명훈 지점장과 통화를 끝낸 안정혁 법인장은 즉시 대한 그룹 이진호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법인장, 오랜만입니다. 아프리카 법인은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그게…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빨리 얘기해 보세요.]
“저희가 지금 잠비아의 ZAHA라는 유통 회사와 대형 수출 계약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안정혁 법인장은 이진호 사장에게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고했다.
“…운송비 절감을 위해서라도 X 시리즈 핸드폰 만 대를 같이 공급해 주십시오.”
[핸드폰 만 대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화물 전세기는 알아보지 마세요.]
순간, 대한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화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지금은 모른 척해야 할 때였다.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화물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줄게요. ZAHA 사장한테 기름 값하고 약간의 부대비만 부담하라고 하세요.]
“정말 다행이네요.”
[안 법인장, 1,260만 달러 수출 계약이면, 4월의 마이너스 실적은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겠네요?]
“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5월에도 분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사장님.”
안정혁 법인장은 전화를 끊은 즉시 정명훈 지점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이진호 사장과의 통화 내용을 전달했다.
“…싱칼라 회장한테 LC는 넉넉잡고 1,300만 달러만 오픈하라고 얘기해.”
[법인장님, 감사합니다.]
“정 지점장은 콩고 지점의 실적이 내 실적이라는 거 모르고 있나 봐?”
[아차, 제가 그 점을 깜빡했습니다.]
순간, 안정혁 법인장은 어제 오전에 박철헌 사장에게 전화 받은 내용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정 지점장, 이제 다른 얘기를 좀 해보자고.”
[네, 말씀하십시오.]
“그 신입 사원은 언제 퇴사시킬 건가?”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박철헌 사장한테 한겨울을 퇴사시키라고 종용받았다고는 얘기할 수 없어서, 얼른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자네가 다른 직원을 보내 달라고 떼를 쓴 것은 기억나지 않나 보네?”
[아차, 그랬지요.]
“그래서?”
[음, 굳이 지금 퇴사시키지는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일단 상반기까지 지켜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상반기라 봐야 겨우 두 달 정도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정도 기간이면 박철헌 사장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알았어. 품의서는 즉시 결재해 줄 테니까, 싱칼라 회장한테 오늘 중으로 LC를 오픈해 달라고 부탁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정혁 법인장이 전화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이 추성민 팀장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뗐다.
“법인장님, 박철헌 사장님이 그깟 신입 사원을 회사에서 내쫓으려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얼마 전에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최성진 부회장님께 찍혔다고 하더군.”
“왜 그런 건지는 여쭤보셨습니까?”
“그놈이랑 최 부회장님의 아들이랑 뭔가 트러블이 있다고 하시더라고.”
“아… 그렇군요.”
“어휴, 아무튼 그 얘기는 그만하지. 그보다 ZAHA에 수출하는 핸드폰과 가전제품으로 인해서 우리 법인의 순위는 어떻게 변동될 거라고 예상하나?”
각 나라마다 법인들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에 평가 기준은 다르게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
단, 전년 대비 수출 신장률과 이익률은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평가 비중 또한 그 항목이 제일 높았다.
1,260만 달러는 금액도 금액이지만, 이익 신장률이 워낙 높다 보니 아프리카 법인의 순위를 대폭 끌어 올려 줄 것이 확실한 상황.
서둘러 생각을 끝낸 추성민 팀장은 안정혁 법인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 계산해 보지 않았지만, 상위권으로 상승할 것만은 분명합니다.”
안정혁 법인장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배어 나왔다.
이대로 운만 따라준다면, 연말에 부사장으로 승진해서 본사나 근무 환경이 훨씬 좋은 법인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았어. 콩고 지점에서 올린 품의서는 나한테 빨리 올려.”
“네, 법인장님.”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추성민 팀장은 품의서를 승인하고 곧바로 안정혁 법인장에게 전송했다.
그러고는 회의실로 들어가서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었다.
[추 부장, 오랜만이야.]
“우리가 통화한 지 한 달쯤 됐나?”
[바빠서 시간 가는지 모르고 살았나 보군.]
“비꼬기는. 아무튼 시간 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꼭 아쉬울 때만 전화하더라. 뭐가 궁금한데?]
“최성진 부회장의 아들… 그러니까 최준하였나? 걔랑 한겨울이랑 무슨 트러블이 있던 거야?”
[…….]
갑작스러운 화제에 이종수 이사의 말문이 막혔다.
그 반응에 추성민 부장은 무언가 있다고 확신했다.
“왜? 내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나 보지? 아프리카에 처박혀 있다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냐?”
[음… 최준하는 한겨울과 입사 동기였어.]
과거형.
즉, 최준하는 이제 더 이상 대한 그룹의 직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입 사원 연수 시절에 한겨울로 인해서 최준하가 퇴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짐작한 그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추 부장, 내가 대답해 줄 것 같아?]
“아니면 말고.”
[그나저나… 한겨울에 대해서 이렇게 묻는 이유가 뭐야?]
“네가 지켜보라며.”
[그게 다야?]
“사실은 말이야…….”
추성민 팀장은 오늘 아침에 정명훈 지점장과 통화한 내용을 자세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렇게 엉뚱한 아이디어를 지점장이 수용한 덕에 우리 법인이 한시름 덜었다.”
[하여간 한겨울의 엉뚱함은 여전하구먼.]
이종수 이사의 목소리에 따뜻한 애정이 묻어 있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