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엉뚱한 아이디어 (3)
“회장님, 항공 운송을 포기할 때 하시더라도, 세 번째 문제까지 듣고 포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순간, 싱칼라 회장은 아직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명훈 지점장을 만나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결코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흥미가 동한 싱칼라 회장은 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재촉했다.
“간 보지 마시고 무엇인지 빨리 얘기해 주십시오.”
“세 번째 문제는 돈입니다.”
“네? 돈이라고요?”
싱칼라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화물기를 전세 내면, 가전제품을 최대 110톤까지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30톤의 가전제품을 구입할 돈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싱칼라 회장은 커다란 계산기를 사용해서 추가로 필요한 돈이 얼마인지 계산해 보았다.
우려한 것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음, 100만 달러만 추가로 준비하면 됩니까?”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정명훈 지점장은 싱칼라 회장이 덥석 물을 수 있도록 미끼를 살짝 던졌다.
“싱칼라 회장님, 이번 기회에 큰돈을 벌어 볼 생각은 없습니까?”
“네? 그야 언제든 큰돈을 벌고 싶죠. 당연한 것을 왜 묻습니까?”
“제 입사 동기가 대한전자 핸드폰 사업부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에게 확인해 본 결과, 지금 출시해서 판매 중인 핸드폰의 X 시리즈는 6월 말에 단종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사장님께서 원하시면, X 시리즈 핸드폰을 기존 가격보다 대폭 할인된 가격에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얼마에 공급받을 수 있습니까?”
“5,000대를 대당 500달러, 어떻습니까?”
싱칼라 회장은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핸드폰을 UAE 두바이에 소재하고 있는 핸드폰 대형 유통 업자에게 공급받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X 시리즈 핸드폰도 대당 850달러에 수입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정명훈 지점장은 대당 500달러에 공급해 준다고 한다.
당장 중간 딜러들에게 대당 800달러에 공급해 준다고 하면 옳다구나 하고 받아 갈 것이다.
게다가 늦어도 5월 중순까지 핸드폰을 공급받을 수 있기에 단종되기 전에 핸드폰을 처분할 시간적인 여유도 충분히 있었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싱칼라 회장은 결코 150만 달러라는 이익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정명훈 지점장과 조심스럽게 딜을 시작했다.
“정 지점장님, 5,000대는 너무 적습니다.”
“저도 회장님께서 원하는 물량을 공급해 드리고 싶지만, 다른 바이어한테 배정된 물량을 제가 빼앗은 상황이라서 곤란합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 들어드릴 테니, 조금만 힘을 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것 참… 난감하네요. 알겠습니다. 동기한테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싱칼라 회장과 대화를 중단한 정명훈 지점장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신음이 정확하게 들리는 것으로 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시도하는 것이 분명했다.
[어, 정 지점장. 무슨 일이야?]
상대방은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영어로 응답했다.
“하공식 이사, 내가 지금 X 시리즈 핸드폰과 관련해서 바이어하고 상담하고 있는데, 5,000대는 너무 부족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이 친구야, 그 물량도 겨우 빼 줬다는 거 알면서 왜 그러나?]
“하 이사, 동기 좋다는 게 뭔가? 나도 이사로 승진해 보게 힘 좀 써 줘.”
[어휴, 내가 바보지. 진드기한테 X 시리즈 핸드폰 얘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하는데.]
“많이 달라는 얘기는 하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밀어줘.”
[알았어. 윗분들하고 상의해 보고 연락 줄게.]
뚝.
하공식 이사가 무리한 부탁임을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전화를 거칠게 끊었다.
이를 지켜본 싱칼라 회장은 조심스런 목소리로 정명훈 지점장에게 말을 걸었다.
“정 지점장님, 제가 괜한 부탁한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하, 괜찮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핸드폰 물량을 추가로 확보해 드리죠. 대신, 나중에 저의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말씀해 보십시오.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해 드리겠습니다.”
“가전제품 가격을 기존 가격 대비 5%만 인상해 주시면, 제가 최소한 3,000대는 추가로 물량을 확보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싱칼라 회장은 또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가전제품 110톤을 수입한다고 가정할 경우, 300만 달러면 충분히 가능하다.
5% 인상해 줘봐야 15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 데에 반해서, 핸드폰 3,000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90만 달러에 달한다.
75만 달러가 남는 장사인데, 정명훈 지점장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정 지정장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역시 화끈하시군요.”
윙윙―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정명훈 지점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구 전화인지 알고 있기에 그는 빛보다 빠른 속도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 이사, 어떻게 됐나?”
[2,000대. 추가로 공급해 줄게.]
“정말 미안한데, 1,000대만 더 공급해 주면 안 될까?”
[미안한 거 알면서 이렇게 못살게 구는 이유가 뭐야?]
“하 이사, 동기 사랑은 나라 사랑이라는 말도 모르나?”
[으이구, 징그러운 놈. 알았어. 대신 조건이 있어.]
“어떤 조건인데?”
[다음 주까지 핸드폰을 가져가지 않으면, 다른 바이어한테 넘길 거야.]
“걱정 말아. 내가 책임지고 물량을 소진해 줄 테니까.”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있던 싱칼라 회장은 얼마를 준비해야 할지 암산해 봤다.
항공 운송비까지 포함해서 넉넉잡고 800만 달러를 준비하면 될 것 같았다.
그 정도 돈은 오늘 당장이라도 조성 가능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가 이전 저런 계산에 몰입해 있는 사이, 깜짝 놀랄 만한 소리가 귓속 깊이 파고 들어왔다.
“하 이사. 5월 중순 경에 X 시리즈 만 대만 배정해 줘.”
[왜?]
“케냐에서 유통 회사를 크게 운영하고 있는 바이어가 계시는데, 그분께 공급해 보려고.”
[알았어.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해.]
“고마워.”
정명훈 지점장이 통화를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싱칼라 회장이 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정 지점장님, 제가 1,200만 달러짜리 신용장을 오픈하면 됩니까?”
정명훈 지점장은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사실 핸드폰 만 대는 싱칼라 회장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확인해 보려고 슬쩍 미끼를 던져 본 것이다.
어떻게 대응하는지 확인할 틈도 없이 그가 숨도 쉬지 않고 미끼를 덥석 물어 버렸지만.
하지만 정명훈 지점장은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싱칼라 회장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X 시리즈 핸드폰 만 대도 제가 다 수입하겠다는 말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회장님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싱칼라 회장은 정명훈 지점장 같은 비즈니스맨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보 전진을 위해서 일 보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정 지점장님, 저녁 시간도 됐으니까, 일단 식사나 하러 가시죠.”
“음, 식사하러 가기 전에 마무리를 짓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30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것은 직원들한테 맡겨 놓으면 되잖습니까?”
“그 대신 저녁 식사를 간단하게 끝내고, 다시 복귀했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오늘 중에 모든 결론을 내리고, 늦어도 내일까지는 본사에서 승인을 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싱칼라 회장은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심정이었다.
핸드폰 만 대를 포기하면, 300만 달러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워삶아야 하는데, 정명훈 지점장은 돌부처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싱칼라 회장은 하는 수 없이 히든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정 지점장님, 핸드폰 만 대는 제가 대당 550달러에 수입하겠습니다.”
“아이고, 미치겠네.”
정명훈 지점장의 아쉬운 듯한 반응에 그는 속으로 씨익 미소 지었다.
거의 다 넘어왔다.
“그럼, 560달러 어떻습니까?”
“회장님의 집념에 제가 졌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이제 저녁 식사하러 가실까요?”
“네, 좋습니다.”
정명훈 사장과 싱칼라 회장은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사무실로 다시 복귀해서 협상을 이어 나갔다.
가전제품은 기존 가격 대비 5% 인상하고, 추가 물량까지 포함해서 300만 달러에 수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핸드폰 1만 8,000대는 2차에 나눠서 공급하되, 1차 8,000대는 400만 달러에, 2차는 560만 달러에 수출키로 합의했다.
싱칼라 회장은 1, 2차 물량에 해당되는 금액과 항공 운송비를 포함해서 1,350만 달러의 신용장을 오픈하기로 하고, 계약서는 안정혁 법인장의 승인을 받는 즉시 작성하기로 합의했다.
“싱칼라 회장님과 합의한 내용을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 승인받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싱칼라 회장과 헤어진 겨울 일행은 곧바로 현지 사무실로 이동해서 세부적인 사항을 점검해 나갔다.
“품의서는 말라마 과장이 작성해.”
“네, 알겠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법인장님께 결재가 올라가야 하니까, 서둘러 줘. 피곤할 텐데 고생 좀 해 줘.”
“괜찮습니다. 최대한 빨리 작성하겠습니다.”
품의서는 몇 번의 수정과 검토를 통해서 새벽 2시경에 정명훈 지점장이 최종 사인 완료하고, 마케팅 지원팀장에게 전송했다.
“다들 수고했어. 내일 아침 7시에 보자고.”
“네, 지점장님.”
* * *
치이익―
숙소로 돌아온 겨울은 재빨리 움직여 정명훈 지점장, 가쿠타 과장에게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 캔을 따서 건네주었다.
“한겨울 부지점장, 가쿠타 과장, 오늘을 축하하며 건배 한번 할까?”
“좋습니다.”
“콩고 지점을 위하여!”
“위하여!”
세 사람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맥주 캔 하나를 비워 버렸다.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을 푸근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부지점장, 오늘 정말 고생 많이 했어.”
“하하,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지점장님께서 다 하셨죠.”
“겸손이 과해. 자네가 그 엉뚱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생각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나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드릴 말씀이 없네요.”
겨울은 쑥스러워 뒷머리를 손으로 긁적거렸다.
그와 동시에 가쿠타 과장이 정명훈 지점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점장님, X 시리즈 핸드폰 가격이 그렇게 저렴합니까?”
“단종 예정 모델들은 가격을 파격적으로 인하해서 공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부지점장이 항공 운송이라는 엉뚱한 아이디어를 꺼내 놓지 않았다면, 싱칼라 회장한테 핸드폰 판매는 절대로 불가능했겠지.”
“부지점장님 덕분에 당분간은 실적에 쫓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걸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 모두 합심해서 콩고 지점을 1위 지점으로 만들어 보자고.”
“네, 지점장님!”
* * *
추성민 마케팅지원팀장은 안정혁 법인장에게 각 지점별 실적을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한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일찍 출근한 그는 컴퓨터를 키고 어젯밤에 올라온 품의서들을 천천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콩고 지점에서 올라온 품의서를 검토하다가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수출 금액도 금액이거니와, 수익률, 제품 운송 방법 등 놀랍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서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추 팀장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선배님,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뭐가 말인가?]
“너무 엄청나서 어느 것부터 여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물어봐. 내가 자세하게 설명해 줄게.]
“먼저 수출 금액이 이게 맞습니까?”
[내가 추 팀장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어떻게 수출 금액이 1,260만 달러가 됐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음, 법인장님한테 1차 결재 올린 것이 부결당하고…….]
정명훈 지점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추성민 부장은 역시라고 생각했다.
들어 보니 겨울의 엉뚱한 아이디어가 아니었더라면 1,260만 달러라는 수출 건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송훈석 회장이 겨울을 알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겨울의 싹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일부러 아프리카에 파견한 것이리라.
“선배님, 이번에 제대로 키워 볼 만한 신입이 온 것 같습니다.”
[하하하, 키우기는 뭘 키워. 내가 배우고 있는 판에.]
정명훈 지점장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철철 넘쳐흘렀다.
“선배님의 웃는 목소리를 참 오랜만에 듣는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법인장님께 빨리 결재 올려 줘.]
“하하하, 알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