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엉뚱한 아이디어 (1)
정명훈 부장의 소개로 현지 직원들과 상견례를 끝낸 겨울은 가쿠타 과장과 함께 다시 회의실로 들어왔다.
콩고 지점에 대한 현황을 자세하게 듣기 위해서였다.
“편하게 앉아요.”
“네, 과장님.”
겨울이 자리에 착석하자, 가쿠타 과장은 벽에 걸려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 여기 지도를 보면 우리 콩고 지점은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주변 열다섯 개의 나라들을 관할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봉,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잠비아, 앙골라는 별도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지도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겨울은 궁금했다.
콩고민주공화국보다 GDP가 많은 나라도 많은데, 왜 굳이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인 이 나라에 지점을 두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겨울의 질문을 받은 가타카 과장은 자세하게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콩고민주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나라의 인구와 국토 면적 때문입니다. 인구는 약 9,000만 명으로 세계 16위이고, 국토 면적은 2억 3,400만 헥타르로 세계 11위입니다.”
가쿠타 과장은 잠시 숨을 고르며 겨울을 쳐다봤다.
눈을 빛내며 집중하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마지막 이유는 이 나라가 최근 몇 년간 경제 성장률이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에 비해서 상당히 높은 편이라는 겁니다. 6년 전에 케냐 나이로비에서 이곳 킨샤사로 지점을 옮겨 온 이유도 그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과장님, 별도 사무실에는 모두 몇 명이 근무하고 있습니까?”
“케냐, 탄자니아, 앙골라는 세 명씩 근무하고 있고, 다른 나라들은 두 명씩, 모두 서른여덟 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과장님께서는 다른 나라에 자주 출장 가십니까?”
“거의 가지 않습니다. 아마 지점장님과 한겨울 씨가 자주 다니게 될 겁니다.”
“네? 제가요?”
겨울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각 지점에 한국 사람들이 두 명씩 근무하고 있는 이유를 혹시 아십니까?”
“아니요. 듣지 못했습니다.”
“한 명은 지점장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부지점장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대한 그룹에 입사한 지 이제 겨우 70일 조금 넘었을 뿐이다.
명목상이라지만 아직 수습 딱지도 떼지 않은 신입 사원에게 부지점장 역할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과장님, 제가 부지점장이라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겨울은 아침에 아만다가 자신에게 음료수를 건네주며 한 말이 이제야 완전히 이해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콩고 지점의 넘버 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것이리라.
“제가 아직 업무에 대해서 잘 몰라 이해가 안 됩니다만, 과장님께서는 제가 부지점장으로 일하는 게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한 겨울의 질문에 가쿠타 과장은 고민스러웠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 주면, 겨울은 충격을 받아서 회사를 그만둘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그는 중요한 사실은 숨기고 일반적인 사실만 얘기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부지점장은 과장 진급을 앞둔 대리급이나 과장급이 맡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입니다. 전에 계시던 석진호 부지점장님도 차장으로 승진해서 2월 말에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래서 지점장님은 법인장님께 공석이 발생한 부지점장님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요. 4월 초에 그에 걸맞은 사람을 보내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저라는 말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어제 아침까지도 신입 사원인 한겨울 씨가 이곳에 발령받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지점장님께서는 신입 사원이 이곳에 발령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화를 버럭 내시더군요. 공항에 픽업도 나가지 말라고 지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제야 겨울은 어젯밤에 공항에 아무도 나오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 일.
짜증날 법도 하지만, 겨울은 그것을 가지고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은센기라는 과거의 인연도 만나지 않았는가.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겨울의 반응에 가쿠타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에 자기가 그런 상황에 처했더라면 인상을 찡그리거나, 아니면 화부터 버럭 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의도적으로 엿을 먹인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처음 와 보는 타지에서.
하지만 겨울은 표정 변화 없이 평상시와 똑같은 목소리로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한겨울 씨는 화가 나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 좀 곤란하긴 했지만,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요.”
그 말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겨울은 이 뻘쭘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과장님, 제가 부지점장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은 절대 변동되지 않는 겁니까?”
“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제가 부지점장 역할을 수행한다고 가정할 경우에 다른 직원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 그 부분은 지금처럼 서로 존중해 주면 됩니다. 다만 한겨울 씨 직함 앞에 부지점장이라는 호칭이 부여될 뿐입니다. 지금부터 한겨울 씨는 부지점장입니다.”
“네?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지 직원들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지점장님도 그렇게 지시하셨고요.”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요.”
그 후에도 가쿠타 과장은 이곳에서 생활할 때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지점장님께는 업무용 차량이 한 대 배정될 예정입니다. 이곳에서는 외국인 혼자서 운전하고 다니면 위험할 수 있으니, 반드시 운전기사를 데리고 다니십시오.”
“휴일에는 어떻게 합니까?”
“휴일에도 차를 사용할 일이 있으면, 운전기사를 부르면 됩니다.”
“음, 운전기사가 싫어하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만약 해당 운전기사가 그런 의사를 드러내면 말해 주세요. 곧바로 다른 운전기사를 채용하겠습니다.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널렸으니까요.”
다소 운전기사에게는 불합리한 처사였지만, 그만큼 혼자 다니지 말라는 뜻이었다.
갑질을 하고 싶지 않던 겨울은 주말에는 가급적 차를 이용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어디서 지내면 됩니까? 장기 투숙할 호텔을 찾아야 하나요?”
“아,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석진호 차장님께서 거주하던 아파트가 있는데,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직 계약 기간이 2년 남아 있으니까, 그 아파트를 사용하시면 될 겁니다. 퇴근할 때 저하고 같이 가 보는 것으로 하시죠.”
그 후에도 이곳에서 해야 할 업무 내용을 대략 설명을 듣는 데 오전 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오후에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업무 파악에 주력하느라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소진했다.
퇴근 시간이 되어갈 무렵, 가쿠타 과장이 사택을 알려 준다면서 먼저 일어나자고 했다.
사택이라고 해 봐야 소형 평수의 아파트일 거라고 겨울은 생각했다.
하지만 아파트에 도착한 겨울은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내부가 30평은 넘어 보일 정도로 상당히 넓었고, 시설 또한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추가로 구입해야 할 것은 당장 먹어야 할 식료품 정도밖에 없었다.
“가쿠타 과장님, 먹을 건 어디서 구입하면 됩니까?”
“이 아파트 단지 상가에 대형 식료품점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구입하시면 될 겁니다. 괜찮으시면 저와 같이 가 보실까요?”
“저한테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과장님.”
“하하, 뭘요. 나중에 제가 신경 써 드린 만큼 보답해 주시면 됩니다.”
식료품점에서 필요한 이것저것을 구입하던 겨울은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식품류 가격이 상당히 저렴한 것에 비해, 공산품의 가격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비쌌다.
이에 또다시 궁금함이 생긴 겨울은 가쿠타 과장에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나라가 외국에서 수입하는 모든 공산품은 유일한 항구인 마타디(Matadi)를 통해서 수입합니다. 그곳에서 이곳 킨샤사까지 물류 운송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군요.”
“아, 그리고 부지점장님. 공산품은 많이 구입해도 되지만, 가급적이면 식료품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구입하십시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아마 부지점장님은 해외 출장이 잦을 거기 때문에 그러는 편이 좋을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이해했습니다.”
쇼핑을 마친 겨울은 가구타 과장과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러고 사택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 먹은 그는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TV 전원을 켰다.
영어로 방송되는 TV 프로그램은 스포츠 채널밖에 없었고, 다른 프로그램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방송되고 있었다.
외국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귀부터 틔워야 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에 겨울은 내용도 모르는 채널을 틀고 무작정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새 입에서는 한탄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어 때문에 코피 터져라 공부했는데, 이제는 프랑스어까지 익혀야 하다니… 아이고, 내 팔자야. 아차차,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겨울은 핸드폰을 들고 가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잔뜩 잠에 취한 목소리.
겨울은 아차 싶었다.
이곳 킨샤사와 서울의 시차를 깜빡했기 때문이다.
“가을아, 오빠야.”
[…오빠인 건 알겠는데, 새벽 4시에 전화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게… 미안하다. 내가 시차를 생각 못했네. 콩고민주공화국에 잘 도착했으니까, 호영이한테도 알려 줘.”
[잠, 잠깐. 오빠, 발령지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니었어?]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화들짝 놀란 가을의 질문에 겨울은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건데? 빨리 얘기해 봐.]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이 지점을 네 개 나라에 두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곳 콩고민주공화국이야. 그래서 여기로 오게 된 거고.”
[그 나라 생활환경은 어떤데?]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엄청나게 열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결코 진실을 얘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가을의 입을 통해서 온 동네방네 소문 날 것이 빤하기 때문에.
“나도 어젯밤에 도착해서 잘 몰라. 나중에 알아보고 연락해 줄게.”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봐.]
“진짜라니까. 전화 요금 많이 나오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알겠어. 다음에 전화할 때는 제발 낮에 해 줘. 밤이어도 좋으니까 새벽은 좀 자제해 줘. 호영 오빠랑 엄마, 아빠한테도 말해 놓을게.]
“그래.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겨울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는, 프랑스어로 방송되는 TV 프로그램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 * *
시간은 흘러 4월 말이 되었다.
그동안에 겨울은 최선을 다해 업무를 익혔고, 현지 직원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뿐만 아니라 정명훈 지점장을 따라 케냐와 잠비아를 방문해서 생소한 이곳의 분위기를 익히느라 애썼다.
오늘도 거래처 사장과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한 겨울은 무겁게 내려앉은 사무실 분위기를 보고 무언가 사고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그는 가쿠타 과장에게 다가가서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물었다.
“음,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고, 회의실 안에서 대화를 나눴으면 합니다.”
회의실에 들어간 가쿠타 과장은 의자에 앉자마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부지점장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 콩고 지점은 1월에서 3월 실적이 전년 대비 마이너스 신장을 기록했습니다. 4월부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실적을 개선시키겠다고 법인장님과 약속했는데, 잠비아에서 진행하던 가전제품 수출 협상이 결렬 위기에 처했습니다.”
겨울이 콩고 지점에 발령받기 전인 지난 3월 초.
잠비아에서 ZAHA라는 대형 유통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네이선 싱칼라 회장이 현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오면서 추진된 일이었다.
그는 ZAHA유통에서 TV를 포함한 가전제품을 취급하기로 결정했다면서 견적을 제출해 달라고 문의해 왔다.
다른 경쟁사들과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결국 대한전자가 최종 선정되었고, 뒤늦게 합류한 겨울이 이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며칠 전, 겨울은 싱칼라 회장과의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정명훈 지점장을 따라 잠비아 수도인 루사카(Lusaka)를 방문했다.
다행히 협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어제 귀국할 수 있었다.
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세부 사항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이곳에서는 느닷없이 협상이 결렬될 위기라고 한다.
“싱칼라 회장이 제시한 가격을 법인장님께 컨펌 요청했는데, 승인을 거부하셨습니다.”
“왜요?”
“우리 법인의 이익이 너무 없답니다.”
겨울은 싱칼라 회장과의 협상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당시에 싱칼라 회장은 잠비아가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라고 하면서 물류비와 운송 시간이 상당히 많이 든다고 불평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지만, 옳은 방법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게다가 신입 사원의 말에 귀 기울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명목상 부지점장이라고는 해도 업무를 배우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묵묵히 정명훈 지점장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모 아니면 도였다.
겨울은 결심을 굳히고 나서 가쿠타 과장에게 물었다.
“지점장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낙담하셨는지 외출하셨습니다.”
“과장님께서는 최대한 빨리 잠비아로 넘어갈 수 있는 비행기 티켓을 확인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