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과거의 인연
콩고민주공화국 입국 심사를 무사히 끝마치고 입국장 문을 열고 나간 겨울은 마중 나온 사람이 있는지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곧 몹시 당황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한글은 고사하고, 영어나 프랑스어로 적혀 있는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회사로 전화해 보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지금은 이곳 시간으로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곳에서 마냥 죽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회사 근처까지 이동하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네.”
결국 겨울은 자기 덩치만 한 캐리어를 끌고 택시 승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택시 승강장에는 대기 중인 택시들이 많았다.
겨울이 택시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택시 운전기사들이 갑자기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흥정해 왔다.
겨울은 일단 아놀드 대리한테 조언받은 대로 누구를 기다리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파리 떼처럼 덤벼들던 택시 운전기사들은 다른 먹잇감을 찾아서 하나둘 떠나갔다.
하지만 20대로 보이는 택시 운전기사 하나가 여전히 떠나지 않고 겨울의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여러 번 갸웃거렸다.
겨울도 그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궁금했지만, 단순한 호객 행위를 위한 수단이라고 판단하고 관심을 접어 버렸다.
그때, 그 운전기사가 조심스럽게 겨울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손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까?”
겨울이 지금까지 택시 운전기사들하고 흥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곳 사람들이 영어를 구사하지 못할 거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영어에 능통한지 발음이 제법 세련돼 보였다.
겨울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고,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할 줄 압니다.”
“손님께서는 대한민국에서 오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혹시, 손님을 픽업하러 오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곰베까지 갑니다.”
“원래대로 하면 20달러를 받아야 하지만,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5달러만 주십시오.”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니.
그러면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겨울은 운전기사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짧게 생각해 보았지만, 호객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운전기사가 제시한 5달러는 그다지 많은 금액이 아니었기 때문에 겨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5달러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짐은 제가 실어 드릴게요.”
택시를 타고 킨샤사에서 가장 번화가인 곰베로 이동하는 도중, 운전기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이름이 한겨울 아닙니까?”
“저, 저를 알고 계십니까?”
진심으로 놀란 겨울이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7년 전에 서울의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만나서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것 같은데…….”
“7년 전이라면…….”
끝말을 흐린 겨울은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기 위해서 두뇌를 혹사시켰다.
그러다가 콩고민주공화국 청소년 축구 대표 팀과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친선경기를 가진 기억이 떠올랐다.
겨울은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네, 네. 맞습니다. 당시에 제가 중앙 미드필더였습니다.”
“아, 그럼 혹시 저한테 유니폼 교환을 요청하던 분이십니까?”
“역시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미안합니다. 얼굴하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네요.”
“제 이름은 비엠베 은센기입니다.”
“은센기 씨였군요. 여기서 만나다니, 역시 인연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겨울 씨는 아직도 축구 선수로 활동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6년 전에 큰 부상을 입어서 은퇴했습니다. 은센기 씨는 왜 축구를 그만뒀습니까?”
“저도 5년 전에 큰 부상을 입어서 축구를 접었습니다. 축구 선수 시절에 번 돈으로 택시를 한 대 구입해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축구를 접은 때가 생각났는지 은센기의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은센기 씨는 택시라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벌어 놓은 돈도 없습니다.”
겨울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힘을 잃었다.
“한겨울 씨는 은퇴한 이후로 어떻게 지냈습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 어떤 회사인지 물어봐도 됩니까?”
은센기가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자, 겨울은 그가 대한 그룹을 알까 싶어 곧바로 대답을 해 주었다.
“대한 그룹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오, 알다마다요. 대한 그룹에 입사하셨다니, 저보다 한겨울 씨가 훨씬 낫네요.”
“어떻게 대한 그룹을 아십니까?”
겨울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운전하고 있는 이 택시가 대한 그룹에서 생산한 자동차입니다.”
“아, 그렇군요.”
둘은 축구와 대한 그룹이라는 공감대를 통해 여러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덧 그들이 탄 택시가 시내로 접어들자, 은센기가 겨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한겨울 씨가 말씀하신 대한 그룹 콩고 지점 근처에 가격 저렴하고 시설이 깨끗한 호텔이 있는데, 오늘은 그곳에 묵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야 물론 좋습니다.”
은센기는 방금 말한 호텔로 이동하면서 이곳에서 생활할 때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했다.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겨울은 그 성의를 생각해서 처음 듣는 척하며 열심히 경청했다.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으려면, 반드시 모기장을 치고 자야 합니다.”
“모기장이라… 또 주의할 점은 없습니까?”
“음, 우리나라는 정부에 대항하는 반군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밤에는 가급적이면 밖으로 다니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대부분의 택시 운전기사들은 호텔 정문에 손님을 내려놓고 떠난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은센기는 택시를 정문이 아닌 야외 주차장에 주차시켰다.
그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겨울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벨 보이들이 과도한 팁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겁니다. 제 택시를 기분 좋게 이용해 주신 한겨울 씨를 향한 제 배려입니다.”
“하하, 팁은 은센기 씨한테 드리면 되나요?”
“그래 주시면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센기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체크인을 끝내고 숙소에 도착한 겨울은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은센기 씨, 이 정도면 됩니까?”
“너무 많은데요?”
“저한테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 주셨잖아요.”
“그럼 받을게요. 고맙습니다, 한겨울 씨.”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한 은센기는 겨울에게 받은 10달러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은센기 씨,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번호나 교환할까요?”
“네, 좋습니다.”
겨울과 핸드폰 번호를 교환한 은센기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남기고, 객실 문을 열고 나갔다.
낯선 공간에 홀로 남겨진 겨울은 복잡한 생각을 몰아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하지 않았던가.
고민해 봐야 머리만 복잡할 뿐,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겨울은 은센기가 알려 준 대로 모기약을 객실 내부에 충분히 뿌려주고,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내고 나온 겨울은 핸드폰 알람을 맞춰 놓고, 침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난 겨울은 식당으로 내려가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올라왔다.
샤워를 끝내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콩고 지점으로 출발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출근해서 업무 준비를 하고 있던 직원들이 겨울에게 고개를 돌렸다.
겨울은 잠시 주춤거리다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혹시, 가엘 가쿠타 과장님 되십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누구십니까?”
“안녕하십니까. 저는 콩고 지점에 발령받은 신입 사원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지점장님이 출근하실 때까지 저기 보이는 소파에 앉아 계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소파에 앉아서 멀뚱하니 기다리고 있자니, 까만 눈에 까만 피부가 인상적인 여직원이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다주며 말을 붙여 왔다.
“한겨울 씨, 저는 아쿠아 아만다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그녀의 말에 겨울이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만다 씨,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머, 영어를 못한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잘 하시네요?”
“하하, 아닙니다.”
“음료수 마시면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지점장님은 10분 정도 지나야 출근하실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겨울이 소파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려는 순간, 사무실 문이 활짝 열리며 50대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사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앉는 자리를 확인한 겨울은 그가 바로 정명훈 지점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겨울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한 자세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지점정님.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정명훈입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우리 회의실에서 잠깐 얘기를 나눠 볼까요?”
“네, 지점장님.”
* * *
바스락.
무척이나 조용한 가운데 겨울의 인사 기록이 적혀 있는 파일의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회의실 내부를 울리고 있었다.
정명훈 지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경진 팀장이 보내온 겨울의 인사 파일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 정명훈 지점장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겨울 씨, 어떻게 우리 회사에 입사한 겁니까?”
송지유와 맺은 인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겠지만, 그것까지 털어놓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운이 좋았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겨울이 머뭇거리는 표정에서 무언가 사연이 숨어 있음을 눈치챘다.
겨울에게 재차 물어보면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겨울은 이곳에서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퇴사할 예정에 있으니까.
“대답이 무성의하다는 생각 안 합니까?”
“죄송합니다.”
“어학 실력이 이렇게 형편없는 이유가 뭔가요? 이래서 외국인들과 소통하면서 업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능숙하지는 않지만, 대화를 나누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정혁 법인장은 겨울의 영어 구사 능력이 형편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정황상 겨울이 거짓말하고 있을 가능이 매우 높았다.
“한겨울 씨,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겨울은 정명훈 지점장이 어떤 이유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의 오해를 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영어 회화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 최고였지만, 그리 자랑할 만한 실력은 아니었기에 그가 먼저 묻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저는 지금까지 지점장님께 거짓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 그럼 잠시 영어로 대화를 나눠 볼까요?”
“네, 좋습니다.”
잠깐의 시간 동안 겨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눈 정명훈 지점장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겨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고급 어휘까지는 구사하지 못했지만, 외국인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만만하게 보고, 겨울이 거짓말한다고 몰아붙인 자신의 모습이 민망하던 정명훈 지점장은 결국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한겨울 씨, 내가 오해했군요. 거짓말한다고 멋대로 생각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고개를 들어 뒤늦게 겨울과 눈을 마주했다.
방금 자신의 무례에 대한 어떠한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눈빛.
그는 선입견을 버리고 겨울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잠시후, 정명훈 지점장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본래 그의 계획은 겨울이 이곳에서 버티지 못하도록 만들어서 최대한 빨리 퇴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젯밤 공항에 겨울을 픽업하러 직원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겨울과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런 마음은 점차 엷어져만 갔다.
안정혁 법인장에게 들은 정보와 실제 그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영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인상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첫인상은 싹싹하고 반듯한 것이 지나치리만큼 좋았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그는 일단 겨울을 두세 달 지켜보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한겨울 씨, 이제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요.”
“네.”
“여기는 전쟁터로 치면 적과 치열하게 교전을 치르고 있는 최전방입니다. 따라서 나는 한겨울 씨가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줄 수 없어요. 업무는 밖에 있는 직원들한테 눈치껏 배워야 하고, 프랑스어 또한 반드시 빠른 시간 내에 익혀야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 마디의 대답이었지만, 형식적인 것이 아닌 진심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오기로라도 버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정명훈 지점장은 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알겠어요.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밖에 있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합시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