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콩고 민주공화국 (2)
“안녕하십니까, 법인장님. 한겨울이라고 합니다.”
겨울의 인사를 받은 안정혁 법인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씩씩해서 좋군요.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을 책임지고 있는 안정혁이라고 합니다. 우리 악수나 한 번 합시다.”
안정혁 법인장과 인사를 끝낸 겨울은 관리팀장인 민경진 부장, 마케팅 지원팀장인 추성민 부장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빈자리에 앉자마자 비서로 보이는 여자가 커피를 내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안정혁 법인장이 푸근한 목소리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
“한겨울 씨, 우리 아프리카 법인에 발령받아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의 목소리가 법인장실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하, 한겨울 씨. 여기는 군대가 아닙니다. 아버지나 삼촌과 대화한다 생각하고 긴장을 푸세요.”
“네, 알겠습니다.”
“음, 한겨울 씨는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까?”
겨울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안정혁 법인장의 입에서 프랑스어 얘기가 나왔다는 의미는 자신의 근무지가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고 절대로 내색할 수 없었다.
“프랑스어는 배운 바가 없습니다.”
“그럼 외국어는 아무것도 구사하지 못한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영어는 구사할 수 있습니다.”
안정혁 법인장은 한겨울의 대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겨울의 토익 성적이 385점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 점수로는 기초적인 회화도 구사하기 힘든 사실을 빤히 알고 있는데, 이 신입 사원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내뱉고 있었다.
박철헌 사장이 얘기한 대로 쓰레기에 불과한 놈이 아닌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겨울에 대한 동정심마저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알았어요. 한겨울 씨의 부서 배치는 민 팀장하고 상의해서 오늘 중으로 결정해 줄게요.”
“네, 알겠습니다.”
“오정수 과장은 한겨울 씨를 데리고 나가서 직원들에게 인사시켜 주고.”
“네, 법인장님.”
“민 팀장은 한겨울을 어떻게 봤는가?”
오정수 과장이 겨울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안정혁 법인장은 민경진 팀장, 추성민 팀장에게 급히 물었다.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잘하는 것을 보니 아주 뻔뻔해 보이는데요?”
“역시 나하고 생각이 같구먼. 추 팀장은 한겨울을 본 소감을 말해 봐.”
“글쎄요, 저는 솔직하고 꾸밈이 없어 보였습니다만…….”
안정혁 법인장은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민경진 팀장에게 말을 건넸다.
“민 팀장, 추 팀장에게 한겨울의 인사 파일을 건네줘 봐.”
“네, 법인장님.”
민경진 팀장에게 겨울의 인사 파일을 건네받은 추성민 팀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엉망진창의 스펙을 보유한 겨울이 대한 그룹에 채용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문스러웠다.
“법인장님, 한겨울이 우리 회사에 입사한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나도 그게 궁금해서 인사 담당 박철헌 사장님께 물어봤는데, 알 필요 없다고 하시더군. 그러시면서 한겨울을 최대한 빨리 회사에서 쫓아내는 게 이익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민 팀장부터 얘기해 봐.”
“애초 계획한 대로 콩고 지점으로 보내 버리는 게 어떨까요?”
“흠, 추 팀장은 어떻게 생각해?”
추성민 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철헌 사장이 신입 사원에 불과한 한겨울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이상했지만,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일개 사원을 회사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말인가.
그럴 거라면 아예 채용하지나 말지.
추성민 팀장은 이 점을 언급하며 안정혁 법인장에게 물어보았다.
“그래그래. 그것도 당연히 물어봤지. 근데 그것도 알 필요 없다고 하시더군.”
“그렇군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민 팀장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좋아. 민 팀장은 오늘 중으로 한겨울을 콩고 지점으로 발령 내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링링링―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안정혁 법인장의 핸드폰이 요란스런 벨소리를 토해 냈다.
핸드폰을 들어서 발신자를 확인한 안정혁 법인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명훈 지점장,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법인장님, 매번 죄송하지만 저희 지점에 직원은 언제 보내 주실 예정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신입 사원 하나 오늘 중에 그쪽으로 발령 낼 생각이야.”
[아, 감사합… 잠시만요. 신입 사원이라고요?!]
정명훈 지점장의 깜짝 놀라는 소리가 귀속 깊이 파고들어 왔다.
“정 지점장,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래!”
[죄송합니다, 법인장님.]
“이참에 신입 사원을 제대로 육성해 봐.”
[…그 친구 프랑스어는 잘 한답니까?]
“아니. 영어 회화 능력도 형편없는 친구야.”
[후우… 법인장님, 여기는 적들과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이지, 신병 훈련소가 아닙니다.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을 보내 주십시오.]
사실 안정혁 법인장도 박철헌 사장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박철헌 사장에게 찍혀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정 지점장,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그런 신입을 받아서 교육시킬 바에는 차라리 아예 직원을 받지 않겠습니다.]
예상한 대로 정명훈 지점장이 자기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안정혁 법인장은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지금 보내 주는 신입 사원이 자진 퇴사하도록 만들어. 그럼 그땐 아무 조건 달지 않고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직원을 보내 줄게.”
[법인장님의 말씀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내가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것 봤어?”
[그건 아닙니다만… 알겠습니다.]
“이제 다른 얘기 좀 해보자고. 정 지점장은 올해가 진급 정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나 봐?”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가 1월에서 3월 사이 누적 실적이 이게 뭔가? 다른 지점은 5% 이상 신장하고 있는데, 콩고 지점만 유일하게 마이너스 10% 신장을 기록하고 있잖아.”
[이달부터 분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정 지점장, 이제 그 레퍼토리도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잘해. 계속 지켜볼 거야. 끊어.”
뚝.
안정혁 법인장이 거칠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민 팀장, 상반기까지 콩고 지점의 실적 개선이 없으면 지점장을 교체할 생각이니까 후임자를 물색해 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가서 일들 봐.”
법인장실에서 나온 민경진 팀장은 한쪽 책상에 엉거주춤 앉아 있는 겨울을 회의실로 불러서 인사 면담을 시작했다.
“한겨울 씨, 아프리카에 온 소감이 어떻습니까?”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합니다.”
“나도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처음 디딜 때에는 한겨울 씨와 똑같이 두렵고 설렜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맞듯이 이곳에서 몇 달 생활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지더군요. 한겨울 씨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법인장님께서 한겨울 씨의 근무지를 결정해 주셨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인 킨샤사에 위치한 콩고 지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겨울은 예상했다는 듯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이에 민경진 팀장은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직원들과 인사 면담을 해본 결과, 거의 모든 직원들은 근무 환경이 좋은 곳에 배치받기를 원했다.
원하지 않는 지역, 또는 부서에 배치받은 일부 직원들은 강하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겨울은 그런 모습은커녕 군말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겨울 씨는 콩고민주공화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고 있나요?”
“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적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이고, 한반도 면적보다 열 배가…….”
겨울은 아놀드 대리에게 들은 얘기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콩고민주공화국에 대해 설명해 나갔다.
민경진 팀장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콩고민주공화국보다 신입 사원에 불과한 한겨울의 입에서 더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놀라운 마음을 감추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한겨울 씨는 콩고민주공화국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나요?”
그 말에 겨울은 지난 토요일 밤에 나눈 아놀드 대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말하길, 직속 상사인 민경진 팀장은 생각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통해 아프리카 법인에 대한 정보를 취득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본사에서 OJT 받는 동안에 아프리카 법인과 지점이 위치하고 있는 나라와 관련해서 틈틈이 공부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예방주사를 맞은 이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아, 그렇군요.”
“팀장님, 콩고 지점에는 언제까지 가면 됩니까?”
“아, 공고민주공화국은 비자가 없으면 입국이 불가능합니다. 오늘은 비자를 발급받고, 비자가 나오는 대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비자는 제가 스스로 발급받아야 합니까?”
“네. 일단 직원을 붙여 줄 테니, 같이 다니며 준비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민경진 팀장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차, 한겨울 씨는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죠?”
“아닙니다. 이곳 사람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는 됩니다.”
“후우… 나한테까지 거짓말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팀장님께 거짓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민경진 팀장은 잠깐의 대화를 통해 겨울에게 생기던 호의가 싹 사라졌다.
겨울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자기가 나서서 혼찌검을 내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급작스럽게 영어로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겨울 씨, 남아공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낀 점을 영어로 얘기해 보세요.”
겨울 또한 민경진 팀장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고 판단해 신중하게 답변을 꺼내 놓았다.
“제가 남아공에 도착해서 하늘을 쳐다봤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해가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또 다른 점은 없었나요?”
“음,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하고 있지만…….”
민경진 팀장은 다시 한번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정말로 겨울은 소통이 될 정도로 영어를 구사할 수 있던 것이다.
능수능란하다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현지인과도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준은 되었다.
“한겨울 씨, 인사 파일에 기록된 토익 점수는 어떻게 된 건가요?”
“이력서를 제출할 때의 점수일 뿐입니다.”
“그럼 그 이후에 치른 토익은 점수가 더 높다는 건가요?”
“네. 신입 사원 연수 동안에 토익 테스트를 했는데, 785점이었습니다.”
“785점이라…….”
놀라웠다.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높은 실력 상승을 이뤄 낸 것이 민경진 팀장은 감탄스러웠다.
“785점도 부족합니다. 계속 영어를 갈고 닦아 숙련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무튼 내일 오전까지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지금 움직여야 할 겁니다. 이제 면담을 종료합시다.”
“네, 팀장님.”
그렇게 대화를 마친 겨울은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아놀드 대리와 외출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민경진 팀장을 향해 추성민 팀장이 말을 건넸다.
“민 팀장, 한겨울과 면담을 나눠 보니까 어때?”
“음, 독특하다? 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까지 많은 직원들과 면담해 봤지만, 이처럼 독특한 친구는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선배님.”
“어떤 점이 독특했는데?”
“제가 한겨울에게 발령지가 콩고 지점…….”
민경진 팀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추성민 팀장은 한겨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민 팀장, 미안한데 나중에 얘기하자고.”
“왜요?”
“내가 본사와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해서 그래.”
“아, 알겠습니다.”
빈 회의실로 이동한 추성민 팀장은 누군가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어, 추 부장. 오랜만이야.]
“이 이사, 임원으로 승진한 거 축하해.”
[추 부장도 올해 승진하면 되잖아.]
“말이라도 고맙네.”
[나한테 안부를 물어보려고 전화한 것 같지는 않고… 한겨울 때문에 전화한 건가?]
“응? 이 이사, 자네가 한겨울을 어떻게 알아?”
[흐흐, 회장님도 한겨울을 아시는데, 내가 모르면 되겠어?]
추성민 팀장은 겨울이 엉망진창인 스펙을 보유하고도 대한 그룹에 입사할 수 있던 이유를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송훈석 회장님의 입김이 작용해 겨울이 입사한 것이다.
“아니, 한겨울을 회장님께서 어떻게 알고 있는데?”
[너, 우리 룰은 기억하고 있지?]
“너하고 나하고 몇 년 친구냐? 죽을 때까지 입 꾹 다물고 있을 테니까, 얘기해 봐.”
[너니까 특별히 하나만 얘기해 줄게. 한겨울을 잘 지켜봐.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제법 보는 재미가 쏠쏠할걸.]
“흠, 알았어. 나중에 또 연락할게.”
이종수 이사와 통화를 끝낸 추성민 팀장은 조용히 한마디 내뱉었다.
“그래, 한겨울.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내가 지켜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