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운명 (1)
겨울은 느낌이 아주 좋았다.
평소 모의 테스트를 할 때에는 항상 시간이 부족해서 Part 7은 절반 가까이 손도 대지 못했는데, 오늘만큼은 끝까지 풀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 저 밑에서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한겨울, 긴장 풀지 마. 아직 시험 중이야.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최선을 다하자.’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은 겨울은 집중해서 토익 문제를 풀어 나갔다.
한편, 자신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겨울의 표정을 본 이종수 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예의 주시하던 겨울이 커트라인 700점은 가뿐하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4주 만에 토익 점수 315점을 올리는 것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만큼 힘든 일일 것이다.
게다가 겨울은 매일 아침마다 지필 테스트까지 병행하지 않았는가.
만약에 겨울이 두 가지 조건을 통과해서 대한 그룹 일원이 된다면, 그가 어디까지 성장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를 줄 듯싶었다.
이종수 이사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사이, 토익 시험 부감독을 맡고 있는 차병훈 과장이 속삭이며 말을 붙여 왔다.
“이사님, 토익 시험 종료 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
“알겠네. 자네가 고지하라고.”
“네, 이사님.”
차병훈 과장이 겨울에게 시험 종료 시간을 고지하고 정확히 5분 뒤에 토익 시험이 종료됐다.
시험지와 답안지를 차병훈 과장에게 제출한 겨울은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종수 이사가 다가와서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한겨울 씨,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아, 아닙니다. 저 때문에 휴일에 출근하신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하하, 괜찮아요. 겨울 씨, 시간 괜찮으면 제 사무실로 가서 차나 한잔할까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마주한 두 사람은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한겨울 씨가 축구 경기에서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이더군요. 반드시 우승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어요.”
“저희 반 신입 사원들한테 축구 경기만큼은 반드시 우승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이종수 이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점수를 챙기기보다 먼저 같은 반의 신입 사원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가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간 봐 온 겨울의 모습과 지금 그가 보여 주는 눈빛은 결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제가 한겨울 씨를 잠시 보자고 한 이유는 감사를 전하고자 함입니다. 남은 지필 테스트 결과에 상관없이 송지유 씨가 수석을 차지할 것 같거든요. 한겨울 씨의 도움이 컸습니다.”
“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송지유 씨가 죽어라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겨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손을 내저었고, 이종수 이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한겨울 씨. 연수 기간 동안에 지필 테스트는 열여덟 번을 진행했어요. 즉, 1,800점 만점이라는 얘기에요. 하지만 체육대회에서 얻은 점수는 1,000점이었어요. 그리고 그 체육대회 우승에 겨울 씨가 많은 기여를 했죠. 이래도 계속 아니라고 하실 거예요?”
“아, 아뇨. 사실 그런 부분도 인지하고 노력한 건 맞습니다만… 조금 부끄럽네요.”
“아무튼 수고 많이 했습니다. 나중에 또 만나게 될 날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피곤할 테니 이만 생활관으로 돌아가서 쉬세요.”
“네, 이사님.”
생활관으로 돌아온 겨울은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었다.
선객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성 씨?”
“흐흐, 우리 홀가분한 마음으로 한잔 어때요?”
겨울은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낮인데요?”
“시간이 뭐가 중요합니까. 기분 좋게 같이 마실 수 있으면 낮술도 좋죠.”
“좋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당연하죠. 연수 막판에 감점당할 일 있습니까?”
“알겠어요. 매점으로 가십시다.”
겨울은 이재성, 장대산과 함께 매점으로 이동해서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런데 언제 연락을 받았는지 부릉부릉 팀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장대산의 소심한 성격이 다시 발현되기 시작했다.
“대산 씨, 괜찮죠?”
“어… 네. 괜찮아요.”
그 모습에 이재성이 밝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겨울 씨, 아직도 모르셨습니까? 우리 대산 씨의 몸은 2반이지만, 마음만은 항상 부릉부릉 팀원입니다. 그렇죠, 대산 씨?”
장대산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많은 장소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자신을 친구로서 받아들여 주는 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많이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정을 붙이게 되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한잔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같이 한잔하고…….
여러모로 많이 마시기만 한 것 같지만, 같이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많이 마시고도 장대산은 90㎏까지 감량한 상태였다.
룸메이트인 겨울과 매일같이 아침 운동을 하고, 연수원이 제공하는 규칙적인 식사를 하다 보니 몸무게가 쉽게 빠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턱선이 날렵해졌는데, 푸짐한 얼굴에 숨어 있던 미모가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다.
“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술은 제가 살게요.”
“오, 여러분! 오늘 대산 씨가 술 산답니다.”
이재성이 신이 나서 부릉부릉 팀원들에게 소리쳤다.
그때, 겨울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대답했다.
“아… 이거 아쉬워서 어떡하죠. 오늘 술 사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거 같은데…….”
“네? 그게 누굽니까?”
겨울은 말없이 송지유를 바라보았다.
“제, 제가 오늘 술 사야 하나요?”
송지유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 술자리의 룰을 잊으셨나 보네요.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이 술 사기로 했잖아요.”
그제야 송지유는 겨울이 어떤 의도로 이와 같은 말을 꺼냈는지 알아차렸다.
그녀가 신입 사원 연수 성적 1위를 확정 지은 사실을 겨울이 알고 있는 것이다.
송지유는 피식 웃었다.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치는 것도 이 부릉부릉 팀원들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감히 대한 그룹 회장 딸에게 이런 장난을 치겠는가.
“좋아요. 제가 쏠게요.”
송지유는 기분 좋게 술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1등을 차지하는 데 부릉부릉 팀원들이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고, 기분 좋은 것도 사실이니까.
“왜? 언니 무슨 좋은 일 있어요? 겨울 오빠, 무슨 일인데?”
궁금증에 목마른 조강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강희 너는 내일 술 사고.”
“아하, 뭔지 알겠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 가지고.”
그때, 이재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 그럼 그 다음 날엔 제가 사면 되겠군요?”
그제야 모든 팀원들이 무엇 때문에 술을 사는지 눈치를 챘다.
이 셋은 상위 1, 2, 3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술을 사야 한다고 겨울이 말한 것이었다.
“흐흐, 그 다음 날은 저군요?”
“설마… 상위 1위부터 4위까지 여기에 다 있는 건가요?”
장대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질문에 장근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에휴, 저는 9등밖에 못했어요.”
“저는 11등…….”
장근호의 말에 이어 나머지 팀원들이 자신의 등수를 공개했다.
겨울을 제외하고 부릉부릉 팀 일곱 명 전부가 상위 15위에 드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연수원에서 퇴소할 때까지 술독에 빠져 살겠군.”
이재성이 넋두리를 내뱉었다.
“우리 오늘 술 마시고 죽어 봅시다!”
“콜!”
다음 날 오전.
이종수 이사는 정재엽 원장을 찾아가서 겨울의 토익 시험 결과를 보고했다.
“이 이사, 그게 정말인가?”
“네, 원장님.”
“불과 4주 만에 400점이나 점수를 올리다니… 한겨울이 독종은 독종이구먼.”
“저도 원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한겨울의 연수 성적은 어떻게 되나?”
“평균 80.5점으로 252등입니다.”
“허어… 정말 예상 밖이군. 꼴찌에서 벗어나면 다행일 거라 생각한 친구가 뒤에 260명을 넘게 세워 놓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재엽 원장은 핸드폰을 들고 송훈석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원장,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제가 먼저 새해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누가 먼저 한들 중요하겠습니까? 그나저나 새해 인사하러 전화하신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네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우리 집 정원에 있는 나무에서 까치가 요란스럽게 울었거든요.]
“하하, 맞습니다. 고놈 참 용한 녀석이군요.”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 한번 들어 봅시다. 얼른 얘기해 보세요.]
“남은 지필 테스트와 상관없이 지유가 연수 성적 1위를 확정 지었습니다.”
[하하하, 그게 정말입니까?]
송훈석 회장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웃음소리가 귓속 깊이 들려왔다.
“네, 회장님. 설 연휴 직전에 있던 체육대회에서 지유가 속한 3반이 종합 우승을 차지함으로 인해 1등을 확정지었습니다.”
[흐음… 우리 지유가 체력이 좋은 편은 아닌데…….]
“팀원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중에서 회장님도 아시는 한겨울이라는 사원이 큰 활약을 했습니다. 총 다섯 종목에서 세 종목을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 냈습니다.”
[호오, 어떤 종목들을 우승했나요?]
“축구, OX 퀴즈, 계주에서 우승했습니다.”
[축구와 계주에서 활약했겠군요. 과연 청소년 국가 대표 출신답네요.]
“회장님, 놀랍게도 OX 퀴즈 우승자도 한겨울입니다.”
[OX 퀴즈도 한겨울이 우승했다고요?]
“네, 회장님.”
[의외네요. 한겨울이 그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지식보다는 전략과 운이 좋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보다 회장님, 하나 더 전달할 것이 있습니다.”
[뭔가요?]
“아무래도 지유와 한 내기는 회장님이 지신 것 같습니다.”
[한겨울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달성했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토익은 785점을 맞았고, 연수 성적은 평균 80.5점에 252등입니다.”
송훈석 회장은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그 역시 겨울의 이력서를 봤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머리가 나쁜 친구는 아니었나 보네요.]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동생이 있다는데,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허허, 그렇다 쳐도… 아무튼 한겨울에게 수고 많이 했다고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상의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특별상 수상자를 결정해야 하는데, 회장님께 컨펌을 받았으면 합니다.”
[특별상이라… 후보는 누구를 선정했습니까?]
“지유하고, 한겨울, 장대산 씨라고…….”
[장대산으로 선정하세요.]
송훈석 회장이 정재엽 원장의 말을 중간에 자를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회장님, 실례지만 그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 친구 양아버지가 명망이 있으신 분입니다. 잘 보여서 나쁠 건 없겠죠. 그리고 최근 불미스러운 일도 그 친구 덕에 잘 해결된 걸로 아는데, 이 정도 감투는 씌워 줘도 괜찮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회장님, 정 원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서동호 실장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내 옆에서 다 들었잖아.”
“띄엄띄엄 들어서 어떤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유하고 한 내기에서 졌어. 내가.”
“네? 설마… 그 한겨울이 조건을 통과했다는 말입니까?”
“하여간 능청은.”
“하하, 역시 회장님의 눈은 속일 수 없네요.”
서동호 실장이 겸연쩍은 웃음을 흘렸다.
“음, 그보다 지유한테 알맞은 부서가 어디일까?”
“전략기획실이 어울릴 듯합니다. 미리 자리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음, 나쁘지 않군. 그렇게 해.”
“네, 알겠습니다.”
* * *
그날 밤.
제법 시간이 오래 걸린 영국 출장에서 돌아온 최성진 부회장은 강남의 고급 주점에서 심복인 인사 담당 박철헌 사장과 양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 사장, 내가 알아보라는 거 어떻게 됐나?”
“부회장님, 제가 이리저리 노력해 봤습니다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송 회장이 전 계열사에 특명을 내린 상태입니다.”
“송 회장이 내 아들의 입사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봤나?”
“아직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송 회장이 송지유에게 경영권을 넘기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충분히 얘기가 된다.
송훈석 회장은 모든 일을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는 송지유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데 가장 위험한 인물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송훈석 회장과 맞설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했기에 당분간은 자중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간이 있었다.
“박 사장, 한겨울 놈은 어떻게 됐나?”
“송 회장이 제시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한겨울만 생각하면, 아직도 잠에서 벌떡벌떡 깰 정도였다.
그 하찮은 놈 때문에 자신이 세운 대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외아들이 시름에 젖어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겨울이 송훈석 회장이 제시한 조건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마저도 저버리고 통과했다고 한다.
아들의 복수와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겨울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박 사장, 한겨울 놈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박철헌 사장은 최성진 부회장의 의도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부회장님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놓을 생각입니다.”
“어디로 보낼 예정인가?”
“제가 생각하기로는…….”
“크하하하!”
박철헌 사장의 계획을 들은 최성진 부회장이 만족한다는 듯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