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조력자들
“에휴… 똥 싼 놈 따로 있고, 똥 치우는 놈 따로 있다는 말이 맞네요.”
이재성이 바닥에 넘어진 테이블을 일으켜 세우며 넋두리를 내뱉었다.
“하하하, 똥 싼 놈이라. 정말로 맞는 비유인데요?”
장근호가 선홍색 잇몸을 보이며 밝게 웃었다.
둘은 상했을 게 분명한 겨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최준하를 까 내렸다.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둘은 최준하를 머리에 똥만 찬 녀석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 나이 먹고 아버지 직위나 내세우고… 쯧쯧.’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 저러고 싶나. 아버지께 폐가 될 거 같아서라도 이러진 않겠다.’
그때, 지금까지 묵묵히 않아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장대산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카운터로 다가가서 매점 주인과 한참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장대산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앉았지만, 얼굴이 평소에 비해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에 겨울은 뭔가 께름칙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행동에 겨울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최준하가 일으킨 불이 마른 들판에 옮겨 붙어서 점점 커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겨울은 자신이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특별 채용된 사실을 더 숨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생판 모르는 남들은 그렇다 쳐도, 지금 자리에 있는 장대산과 팀원들에게 만큼은 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조금 전 최준하와의 언쟁으로 일부 밝혀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고.
겨울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연을 먼저 밝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후우…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방금 최준하 씨의 말에는 틀린 게 없어요.”
“네? 낙하산이라는 말이요? 그럼 겨울 씨도 부회장의 아들내미 같은 겁니까?”
“아,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는 특별 채용… 아니, 편법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때, 이재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겨울 씨, 신입 사원 520명 중에서 정규 채용으로 입사한 사람은 450명 정도고, 나머지 70명은 특별 채용으로 입사했어요. 특별 채용이 편법이라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재성 씨의 말이 맞아요. 저도 대한 그룹에서 실시한 공모전에 입상해서 특별 채용으로 입사했습니다.”
이재성의 말에 장근호가 말을 덧붙였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장대산도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특별 채용됐다는 사실을 밝히는 그들.
하지만 겨울은 그들의 얘기가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 그대로 특별 채용이었다.
나름의 능력을 인정받고 형식과 절차를 따라서 입사한 사람들이었다.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특별 채용이 아니에요. 저는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특별 채용됐어요.”
“도대체 어떤 방식이길래 그래요?”
“저는 소위 말하는 지잡대를 작년에 졸업하고, 1년 동안 취업을 위해서 노력했어요. 당연하게도 잘 되지는 않았죠. 그래서 편의점에서 알바하면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데, 1월 초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어요.”
그렇게 겨울은 지금 연수원에 있기까지의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 달리 두 가지 조건이 걸려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창피해서 말할 수 없지만요.”
“영어하고 연수 성적이죠?”
“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재성이 핵심을 찔러오자, 겨울이 당황하며 물었다.
“휴식 시간이나 식사 시간만 되면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데, 설마 노래를 듣는 것은 아닐 거 아닙니까? 그리고 팀워크 강화 경연 대회에서도 다른 팀원들보다 훨씬 더 노력하셨잖아요. 내 말이 맞죠?”
“…네, 맞아요.”
겨울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재성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겨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의 오빠지만, 때론 그가 마치 보살펴야 하는 동생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겨울 씨,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않을 테니, 조건 내용을 저희한테 얘기해 보세요. 도와드릴게요.”
“…토익 700점하고, 연수 평균 성적이 70점을 넘어야 합니다.”
“음…….”
그 말을 들은 이재성은 끝말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겨울 씨, 토익과 지필 테스트의 비중을 어떻게 두고 공부합니까?”
“5대 5 정도로 시간 배분을 하고 있어요.”
“그럼 오늘부터는 토익 공부를 70%로 비중을 늘리세요.”
“네? 그렇게 되면 지필 테스트 성적이 떨어질 텐데요.”
“제가 시험에 나올 수 있는 예상 문제들을 뽑아서 줄게요. 그러면 최소 70점은 맞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창피한 말이지만, 그래도 평균 70점을 넘길 수 있다고 자신 못하겠네요.”
“부족한 점수는 팀플과 반플 점수로 올리면 되죠.”
그제야 겨울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겨울은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저야 고맙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저를 도와주려는 이유가 있나요?”
이재성은 그 질문을 듣고 뜨끔했다.
사실 그는 두 가지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중 한 가지만 밝히기로 결정했다.
“저는 이번 연수에서 15등 안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겨울 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네?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겨울은 의아했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울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도울게요.”
“하하, 지금은 괜찮습니다. 당장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알았어요. 그런 날이 온다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게요.”
그때, 장근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 모두 연수가 끝나면 각 계열사로 뿔뿔이 흩어지겠지만, 연락은 계속 주고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는 의미에서 단톡방을 하나 만들었으면 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찬성입니다.”
“그… 저도요.”
소심한 장대산의 대답에 나머지 세 사람은 빵 터졌다.
같은 팀은 아니지만, 오늘 친해진 장대산도 같이 합류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답을 듣자마자 장근호는 ‘동기 사랑’이라는 단톡방을 만들었다.
그렇게 짧은 휴식을 끝낸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대산은 할 일이 있다면서 매점에 남았고, 겨울은 조강희에게 예상 문제를 넘겨받기 위해 여사원들이 사용하고 있는 생활관으로 이동했다.
조강희는 겨울을 보자마자 걱정의 말부터 건넸다.
“겨울 오빠, 더럽고 치사해도 끝까지 참고 견뎠으면 좋겠어요.”
매점에서 일어난 일을 조강희가 알고 있을 정도니,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내가 어떻게 입사했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다 내 업보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해 줘서 고마워.”
“뭘요. 그 최준하라는 사람은 언젠가 벌 받을 거예요.”
“그래그래. 아, 재성 씨한테 들었는데, 회사가 우리 부릉부릉 팀에게 가전제품을 선물로 준대.”
“왜요?”
“우리가 공연한 퍼포먼스를…….”
겨울은 이재성에게 들은 얘기를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조강희는 해맑게 웃으며 기뻐했다.
“우리 팀의 퍼포먼스가 뛰어나기는 했나 보네요.”
“1등을 할 정도니 말을 더 해서 뭐 해. 그나저나 강희야, 너도 이번 연수에 특별한 목표 같은 게 있니?”
“네? 어… 글쎄요. 굳이 말하자면 15등 안에 들어서 원하는 곳에 배치받는 거 정도일까요?”
“오? 지금까지 성적이 괜찮나 보네? 몇 등인데?”
그 말에 조강희는 주변에 아무도 없음에도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빠만 알고 계셔야 해요. 저 2등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에요.”
“진짜? 와… 강희야, 축하한다.”
겨울이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조강희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고마워요. 그래도 오빠, 아직 기간이 많이 남아서 축하 받기는 시기상조 인 것 같아요.”
“그렇기는 하지. 1등이 누구인지는 알고?”
“글쎄요? 아마 지유 언니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유 언니의 지필 테스트 시험 점수를 우연찮게 봤거든요.”
“그렇구나.”
겨울은 똑 부러진 송지유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 이제 들어가 볼게. 자료 고마워.”
겨울이 생활관으로 돌아오니, 장대산은 교재를 펴 놓고 공부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겨울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의자에 앉아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장대산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 겨울 씨. 오늘 매점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 SOS를 치세요.”
“네? 아, 네.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위로해 달라고 매달리면 피곤하실 텐데.”
겨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장대산은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제가… 어느 정도는 문제를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네?”
“그게…….”
장대산은 어느 누구한테도 얘기해 준 적이 없는, 남몰래 숨겨 온 비밀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겨울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만큼 겨울이 보여 주는 솔직하고 인간적인 매력에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대산은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다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겨울 씨에게 제 얘기를 조금 들려줬으면 하는데… 괜찮으세요? 아, 시간이 안 되려나…….”
“괜찮아요. 말씀해 보세요.”
“음, 저는 태어나서 거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살았어요. 대학도 그쪽에서 나왔죠. MIT 공대라고…….”
“네?! MIT 공대요?!”
겨울이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도 MIT 공대가 얼마나 유명한 대학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이에요.”
“MIT 공대를 졸업하면 실리콘 밸리에 있는 회사 같은 곳에 취업하는 거 아닙니까?”
“꼭 그런 건 아닌데… 뭐, 저도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죠. 그래도 여러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정했어요.”
“왜요? 그렇게 결정한 이유라도 있나요?”
“네, 저는 사실… 입양아에요.”
장대산이 머뭇거리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미안해요.”
“괜찮아요. 사과하실 만한 일은 아니에요. 아무튼 제 양부모님께서 친모를 찾아보라고 권유하셨거든요. 그래서 한국에 왔어요. 대한 그룹은 양아버지가 송훈석 회장님과 안면이 있어서… 그래서 특별 채용 형식으로 입사하게 된 거고요.”
겨울은 그제야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매점에서 장대산이 어떻게 특별 채용이 되었는지 이야기를 안 한 이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겨울 씨에게 털어놓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냥… 겨울 씨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대산 씨가 이렇게까지 절 생각해 주다니 감동이네요.”
아마 SOS 치라는 이야기는 양아버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뜻인 모양이다.
겨울은 그런 장대산이 고마웠지만,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도움을 요청하게 되면 장대산에게도 어떤 피해가 있을 게 분명했다.
자신을 믿고 이야기를 꺼내 준 그에게 그런 식으로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볼게요. 아마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예요. 지금 당장은 이놈의 영어가 문제죠.”
겨울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영어 참고서를 손등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 모습에 장대산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영어도 좀 도와드릴까요? 영어를 듣고 문법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하는 것도 중요해요. 이런 건 어때요? 생활관에서는 영어만 사용하는 거예요.”
“네? 아니… 그건 조금…….”
겨울은 영어만 사용하는 생활관에서의 생활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아마 제대로 말을 건네지 못해 침묵의 생활관이 되지 않을까?’
“영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지 못하면 죽어도 실력이 늘지 않아요.”
말을 더듬으며 소심하게 말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장대산의 눈빛은 서울 유명 인터넷 강사 못지않게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아… 알겠어요.”
자신을 돕기 위해 저렇게 열정을 불태우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겨울은 도살장에 끌려가기 싫어하는 소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윙―
그때, 겨울에게 카톡이 수신되었다.
― 이재성 : 강의 노트 정리한 거 건네줄게요. 12시에 2층 휴게실에서 봐요.
― 겨울 : 고마워요.
― 이재성 : 뭘요. 이게 다 동기 사랑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열공하세요.
겨울은 카톡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 자신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많은지.
겨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재성에게 답장을 보내 준 겨울은 장대산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후에 토익 공부를 시작했다.
오늘도 여지없이 장대산은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부터 코를 골기 시작했다.
겨울도 처음에는 장대산의 코골이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세를 불렀다.
겨울은 조용히 생활관 문을 열고 나와 늘 그래 온 것처럼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 공부를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창 공부하고 있는 겨울에게로 이재성이 다가왔다.
겨울은 그가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조차 몰랐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나요?”
“겸사겸사요.”
‘겸사겸사’라는 말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재성은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겨울의 룸메이트인 장대산의 체구가 거대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살이 찌면 코를 곤다는 속설이 있지.’
즉, 겨울은 장대산의 코골이 때문에 이곳으로 쫓겨 나와서 공부하고 있는 거라고 이재성은 판단했다.
“흐흐, 대산 씨가 코를 심하게 고는 편인가 봅니다?”
“…네.”
“언제부터 이곳에 나와서 공부하셨어요?”
“한 일주일 전부터요.”
“그런 사정이 있었으면, 저한테 진작 말하지 그랬습니까.”
“오, 조용하게 앉아서 공부할 만한 장소가 따로 있나요?”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C동 생활관 1층에 가면 혼자 공부하기 괜찮은 독서실이 있다고 합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겨울이 이재성에게 진심을 담아서 감사 인사를 보냈다.
“뭐, 겨울 씨에게 받을 도움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입니다.”
“도대체 제가 어떤 도움을 드려야 하길래 자꾸 그런 말을 하나요?”
“궁금해 하시는 것 같으니까, 힌트만 드릴게요. 겨울 씨의 신체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일입니다.”
“아…….”
겨울이 이제야 감 잡았다는 듯 끝말을 흐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