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놈의 토익 700점 (2)
삼겹살 집.
가게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은 자신이 어떻게 면접을 치렀는지 두 사람에게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임시 합격을 주는 대한 그룹의 자비로움에 감사하네, 진짜.”
가을은 기가 차 어이없어 했다.
호영은 뭐가 그리 웃긴지 옆에서 깔깔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니, 허세를 좀 부리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잖아.”
“오빠, 오빠 말대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면접관들이 원하는 대답도 아니었지. 오빠가 다른 지원자들이랑 똑같은 말을 그대로 읊었어도 내가 이러진 않았어.”
“그건 맞지… 난 네가 말하는 면접관들이 원하는 대답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걸 오빠가 모르면 어떡해. 나보다 훨씬 더 면접은 많이 보러 다녔으면서.”
“많이 보러 다니면 뭐 하냐. 다 떨어졌는데.”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경험이라는 게 있잖아.”
가을의 잔소리에 겨울의 고개는 들릴 줄을 몰랐다.
한참을 웃던 호영이 집게로 고기를 뒤집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는 소리와 함께 호영이 입을 열었다.
“야, 내가 생각해 봤거든? 면접을 그렇게 망쳤는데 합격시켜 주는 게 이상하지 않냐?”
겨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이 내심 신경 쓰여 임시 합격에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임시 합격이라니까.”
“겨울이, 네가 조건만 충족시키면 합격인 거잖아. 그… 조건이 뭐랬지?”
그때, 가을이 상추에 고기를 하나 싸서 호영의 입에다 물려 주며 말했다.
“신입 사원 연수에서 평균 70점 이상, 토익 700점 이상. 고기 타니까 먹으면서 말해.”
“자기 오빠는 안 챙기고 남 챙기는 거 봐라.”
“오빠 입에 지금 고기 들어가 있잖아. 하여간 쪼잔하기는.”
겨울이 툴툴거리며 고기를 한 점 더 입에 넣었다.
호영은 그런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먹던 쌈을 삼켰다.
“아무튼 조심해. 난 뭔가 구리구리한 게 심상치 않다.”
“뭐가 구리구리한데?”
“몰라. 아무튼 그런 느낌이 나. 요즘 신입 사원한테 뭐 덤터기 씌워서 쫓아내거나 그런 일 많잖아.”
“아이고, 우리 호영이 소설 좋아하는 거 깜빡했네. 야, 가을아. 쟤도 소설 엄청 좋아하더라. 너랑 취미 맞는 거 아니냐?”
겨울은 걱정이 많은 두 사람을 놀리려 말을 꺼냈지만, 정작 가을은 반가운 눈치였다.
호영 역시 흔히 보기 힘든 동지와의 만남에 기뻐하며 최근에 본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겨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조용히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아무튼 우리 오빠가 처한 상황이랑 주인공이랑 좀 닮지 않았어?”
“에이, 그래도 걔는 초능력이 있잖아. 겨울이, 얘가 마음 읽는 능력이 있었으면 면접 그렇게 안 봤지.”
호영의 말에 겨울의 입이 빼쭉 튀어나왔다.
“야,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었으니까 임시 합격이라도 준 거 아니겠냐.”
“그건 맞지. 크, 나도 면접관들에게 마음에 들었다면 지금쯤 대한 그룹에서 야근하고 있었을 텐데.”
호영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안주로 삼겹살 한 점까지 집어먹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냐?”
“어. 그랬지. 내가 이야기 안 해 줬나?”
“언제부터 네가 그런 걸 친절히 이야기해 주는 성격이었다고… 왜 떨어졌는데? 평소엔 말 그렇게 잘하면서 너도 면접에서 나처럼 헛소리했냐?”
겨울이 내심 삐져 있는 게 귀여워 호영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절박함이 없었거든. 작은아버지가 계시잖아.”
금수저 조카.
겨울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이 호영에게 붙여 준 별명이다.
호영의 부모님은 겨울의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강원도 영월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지만, 작은아버지인 정상호 사장은 SH 무역이라는 규모가 상당히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정상호 사장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호영을 아들처럼 여기곤 했다.
심지어 SH 무역에 입사시켜서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사까지 내비쳤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호영은 뜻하는 바가 있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정확히는 거절이 아니라 보류였지만.
결과적으로 호영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절박함이 부족한 것이었다.
“너, 그거 숙부님한테도 실례야. 빨리 결정해서 말씀드려.”
“흐흐, 그래. 올해 상반기까지 버텨 보고 결정하려고.”
“굳이 그때까지 버티려는 이유가 뭐야?”
“사업.”
“사업?”
겨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작은아버지도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SH 무역을 키웠는데, 나라고 못 하겠냐?”
“그럼 취업 준비하는 게 아니라 사업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아무런 경험 없이 사업을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 하는 소리야?”
겨울은 호영이 대학에 입학할 당시부터 지금까지 거의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한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차근차근 사회 경험을 쌓고 있던 것이다.
내심 겨울은 호영이 자신처럼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한 회사의 후계자 자리를 미루며 스스로 간절함이 없다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로 호영에 대한 겨울의 생각이 싹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금수저 조카인 호영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자기는 지금까지 제대로 한 것이 뭐가 있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지난 세월을 헛되이 보낸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자괴감은 자괴감이고, 자신의 친구는 멋졌다.
“…호영이, 너는 반드시 성공할 거다.”
“흐흐, 고맙다. 내가 성공하면 너를 우리 회사 부사장으로 영입해 줄게.”
“얼씨구. 난 대한 그룹에 뼈를 묻을 생각이니까, 꿈 깨.”
“언제는 임시 합격이라면서 벌써 뼈 묻을 생각부터 하네. 야, 그런 얘기는 토익 700점을 넘기고 해라.”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토익 700점을 거뜬히 넘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아이고, 겨울아. 김칫국이 참 달다, 그치?”
“에이, 짜증나.”
“왜? 정곡을 찔리니까, 속이 쓰려?”
겨울과 호영은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같은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소위 불알친구 사이였다.
그런 이유로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늘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하곤 했다.
가을도 두 사람의 언쟁을 셀 수 없이 지켜봐 왔기에 이 정도 대화로는 아무런 감흥조차 없었다.
처음에야 정말로 둘이 싸우는 게 아닐까 싶어 필사적으로 말리곤 했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언제나 그렇듯 두 사람의 언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가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호영 오빠,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 절실함이 없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오빠가 면접에서 ‘나 절심함이 없어요’ 이렇게 말했을 리는 없고, 진짜 떨어진 이유가 뭐야?”
가을의 질문을 받은 호영은 면접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면접관이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져 왔다.
너무 황당한 질문이라서 답변하지 못하고 어물쩍거리는 사이, 다른 지원자에게 질문이 넘어갔다.
물론, 탈락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했다.
문득 호영은 두 사람이 황당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가을아, 넌 물에 부모님 두 분이 동시에 빠졌을 때, 누구부터 구할 거야?”
가을은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게 호영이 면접에서 떨어진 이유와 관련 있다 생각하고 이내 입을 열었다.
“두 분 모두 구하지 않을걸? 아니, 정확히는 못 구하지.”
“왜?”
“나는 수영을 못하잖아. 뭐,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그 상황에 처하면 뛰어들겠지만, 두 분 다 못 구하겠지.”
“그럼 그렇게 뛰어들었을 때, 누구한테 먼저 갈 거야?”
그때, 겨울이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면접 때 그렇게 말꼬리 잡는 게 제일 짜증나더라.”
“흐흐, 면접관들이 다 그렇지 뭐. 이런 거에 어떻게 대응하나 보고 싶은 거야, 그 사람들은. 그럼 겨울이, 넌 어떻게 할 건데?”
“고민할 필요가 뭐 있어. 눈에 보이는 분부터 먼저 구해야지.”
“두 분 다 너랑 같은 거리에 있고 동시에 눈에 들어왔으면?”
“아, 진짜!”
“흐흐흐.”
“애초에 자기를 낳고 길러 준 부모님을 어떻게 선택하라는 거야? 그것도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고.”
지원자들이 부모님 중 누구를 선택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난해한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반응하는지를 보고 싶은 게 아닐까, 가을이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면접에서 이 질문을 받았어.”
“오빤 뭐라고 대답했는데?”
“대답 못했어.”
가을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호영을 바라보았다.
사고가 유연하고 임기응변이 강한 호영이 설마 대답하지 못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말 그대로야. 이 질문에 답은 없거든. 그래서 대답을 못 했어. 뭐, 정말로 엄마랑 아빠 둘 중 누굴 선택할지 궁금해서 면접관들이 이런 질문을 한 건 아니겠지만,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좀 당황스럽더라.”
의외로 고지식한 호영의 면모를 알게 된 가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은 옆에서 답답해하는 겨울을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오빠도 면접장에서 저런 질문을 받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거나 방금처럼 근거 없이 기세로만 대답하려 들 거라 생각했다.
호영의 반만이라도 닮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최근 토익을 준비한다고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것은 보기 좋았다.
대한 그룹에 입사하지 못하더라도 이번 일이 겨울에게 좋은 자극이 된 것만은 분명했다.
우우우우웅.
그때, 호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밖에 나갔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와 앉았다.
“누구?”
“아, 내가 아는 후배가 이번에 대한 그룹에 합격했거든. 그 후배한테서 연락이 와서.”
“오? 그럼 이번 신입 사원 연수에 그 후배도 오는 거야?”
“어. 그보다 너도 월요일에 오전 7시까지 우리 집 앞으로 와.”
“왜? 그날 연수원 가는 날 아닌가?”
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 그룹 연수원이 용인에 있는데,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서 내가 후배 태워 주기로 했거든. 겸사겸사 너도 같이 태워 줄게.”
“너, 차 없잖아?”
“작은엄마 차 빌리면 돼.”
“고맙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라.”
“…대한 그룹에 뼈를 묻는다고 얘기한 것 같은데?”
“흐흐, 토익 700점이나 맞고 얘기하든지.”
즐겁게 술자리를 마치고 겨울이 계산하기 위해서 가게 카운터로 향하는 사이, 호영이 말을 걸어왔다.
“겨울아, 술값 내가 계산했다.”
“네가 왜?”
“뭐, 비록 임시지만, 그래도 네가 대한 그룹에 합격한 날이잖아. 이럴 때 한턱 쏴야 친구 아니겠냐.”
“고맙다. 대한 그룹에 정식으로 입사하고 나면 그땐 내가 한턱낼게.”
“흐흐, 그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마셨으면 좋겠다.”
“에이, 그놈의 토익 700점.”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