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놈의 토익 700점 (1)
겨울은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이동했다.
한겨울답게 제법 날씨가 쌀쌀했지만, 추위를 느낄 여력이 없었다.
러시아워가 아니라 그런지 지하철에는 듬성듬성 빈자리들이 눈에 보였다.
자리에 앉은 겨울은 곧바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정말 내가 경험한 게 꿈이 맞나? 너무도 생생했는데…….’
면접이 끝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겨울은 면접에 미련이 없었다.
이미 떨어졌을 거라 확신했고, 그런 것보다 어젯밤 경험한 꿈이 더 중요했다.
윙―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집을 향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패딩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면접 결과인가? 보나마나 불합격이겠지.’
본능적으로 면접 결과에 대해 대한 그룹에서 보내온 문자임을 알 수 있었다.
겨울은 미련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어 결과를 확인했다.
삑삑삑.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아직도 연락 안 왔어?”
“…….”
겨울은 가을의 물음에 아무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켜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면접결과 통보’라는 이메일 제목이 상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뭐야, 말도 없이 그냥 들어가고. 기분 많이 안 좋아?”
가을이 눈치를 보며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하지만 겨울은 그녀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겨울은 곧바로 이메일을 클릭했다.
― 귀하께서는 대한 그룹의 면접에서 임시 합격하셨습니다. 정식으로 채용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은 충족해 주셔야 합니다.
1. 신입 사원 연수 성적 평균 70점 이상.
2. 연수 종료 후, 토익 700점 이상.
1월 22일, 오전 10시부터 시작하는 신입 사원 연수에…….
이메일 내용을 확인한 겨울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가 집에 와 곧장 메일을 확인한 것은 다름 아니라 ‘임시 합격’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지하철에서 확인한 문자에도 임시 합격이라는 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겨울은 이 상황에 좋아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메일을 같이 확인하던 가을이 입을 열었다.
“어? 임시 합격? 이건 또 무슨 말이야? 2차, 3차, 이런 것도 아니고 임시?”
겨울 역시 임시라는 말이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다.
‘그 정도로 면접을 망쳤는데, 임시로라도 합격을 시켜 준다고?’
겨울은 자신이 생각해도 엉망이라 생각할 정도로 면접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불합격할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날아온 결과는 임시 합격.
겨울은 대한 그룹 면접관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조건만 채우면 합격이라는 건, 아무래도 내 스펙이 그만큼 엉망이라 ‘최소 기준은 채워라’는 게 아닐까?”
“음, 그럴지도. 뭐야, 오빠 면접 망했다면서 잘 봤나 보네? 괜히 쫄았잖아.”
가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해맑게 웃었지만, 겨울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면접을 망친 것은 사실이기에.
하지만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였다.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겨울의 눈은 타오르고 있었다.
“너, 과외 안 가냐?”
“오늘은 수업 없는 날이야. 왜? 오늘 저녁 밖에서 먹을까?”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나 공부 좀 도와 달라고.”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저번에도…….”
이전에도 겨울이 몇 번 가을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매번 겨울의 의욕 부족으로 어물쩍 끝나곤 했다.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걱정되는 가을이었지만, 겨울의 눈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겨울의 눈에 이전까지 없던 의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6년 전 이후로는 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오빠한테 말이 너무 심하지 않냐. 나도 할 땐 하거든.”
겨울이 입을 빼쭉 내밀고 툴툴거렸지만, 가을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연수원 성적은 오빠가 알아서 하는 거고, 토익 700점은 도와줄게. 잠시만 기다려 봐.”
그 말을 끝으로 가을이 방에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토익 만점자인 가을이 의욕 가득한 얼굴로 참고서를 한 아름 들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노트북 옆에 참고서를 내려놓은 가을이 입을 열었다.
“오빠, 최근에 본 토익 시험 중에서 제일 높은 점수가 몇 점이야?”
“…385점.”
겨울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진짜로 385점이라고?”
진심으로 놀란 가을이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어.”
“면접 때, 면접관들이 뭐라고 하지 않았어?”
“앞에서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았지…….”
겨울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여섯 명의 면접관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때를.
그중 박철헌 사장이라 불리는 면접관은 아예 대놓고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착각이라기에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하긴 그렇겠다. 그래도 많이 심각하네. 오빠는 진짜 그 여자한테 고마워해야겠다.”
겨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송지유가 힘써 주지 않았더라면, 겨울의 스펙으로 면접은 어려웠을 것이 분명했다.
“하아… 385점이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85점이 뭐야?”
“하아…….”
겨울 역시 답답했다.
조금만 더 일찍 정신을 차렸다면 좋았을 텐데, 자신의 나태함이 원망스러운 그였다.
“오빠, 듣기와 읽기의 점수는?”
“100점하고 285점.”
“아이고, 총체적 난국이네.”
가을 역시 답답한 것은 같았기에 탄식을 내뱉었다.
겨울의 눈빛을 보고 700점쯤이야 가능할 거라 여겼지만, 생각보다 점수가 처참했다.
조금씩 자신이 없어지는 그녀였다.
“그래. 계속 한탄해 봐야 소용없지. 우선 얼마나 할 수 있는지부터 짚어 보자. 오빠, 여기 이 참고서…….”
그렇게 겨울과 가을의 맹렬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 * *
“죽겠다…….”
“고생했어. 생각보다 흡수력이 빠르네. 아직 뇌는 안 늙었나 봐.”
“뇌는 안 늙었다니. 그럼 다른 데는 늙은 거냐.”
“지금 누워 있는 꼬락서니를 보면, 뭐.”
가을의 말대로 겨울은 바닥에 벌러덩 누워 있었다.
겨울은 오늘 목표한 분량을 다 해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다 보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가장 문제는 역시 단어네. 여기, 이거 매일 하나씩 외워.”
가을이 작은 영단어 묶음 여러 개를 건넸다.
“하나? 이거 묶음 하나를 하루에 다 외우라고?”
“이거 못하면 답도 없어. 솔직히 연수원 가서 단어만 외워도 부족할 지경이야. 오늘도 자기 전에 하나 다 외우고 자. 다 외우면 나한테 검사받으러 오고.”
가을의 가혹한 지도에 겨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겨울은 차마 도와주는 가을을 원망하지는 못하고 과거의 나태하던 자신을 속으로 씹어 댔다.
‘그래, 내가 누굴 원망해… 내가 못난 놈이지… 아이고, 한겨울 이 멍청한 녀석아…….’
그렇게 떨리는 손길로 단어집을 한 장 넘겼을 때, 가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토익은 다른 단순한 시험이랑은 달라. 고득점을 받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해.”
“고작 시험에 전략이 필요하다고?”
“고작이라니. 오빠는 그런 고작 시험 따위 때문에 지금 임시 합격을 한 거라고.”
“…….”
겨울은 입이 백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가을은 옆에 놓아 둔 두툼한 파일 철을 겨울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여기에는 토익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문법, 단어, 숙어, 어휘 등이 정리되어 있어. 그리고 이건 USB. 듣기 시험에 자주 출제되던 문제들을 정리해 놨으니까, 단어 외우는 시간 빼고는 죽어라고 들어. 이것만 해도 500점은 거뜬할 거야.”
“…먹고, 자고, 단어 외우는 시간 빼고 계속 들으라고?”
“무슨 소리야. 단어 외우는 시간만 빼고 들으라고. 먹고 잘 때도 들어.”
겨울은 아예 눈까지 감아 버렸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피곤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시 온 기회를 더 이상 놓치지 않겠다고 방금 다짐하지 않았는가.
겨울이 다시 마음을 굳히고 일어나려던 찰나, 가을이 무언가를 그의 머리에 씌웠다.
“내가 입시할 때 쓰던 건데, 오빠 빌려줄게. 오늘은 5장까지만 듣고 자. 내일부터 10장씩 듣고.”
“…총 몇 장까지 있는데?”
“107장. 시작할게. 집중해서 들어.”
* * *
겨울의 시야에 황토 물로 뒤덮인 강물이 들어왔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거침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강물에 뛰어드는 순간, 겨울은 깨달았다.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6년 전의 그날임을.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가 어린 시절에 물장구치고 놀던, 사고가 난 강원도 영월의 동강이 아니었다.
강폭도 훨씬 넓었고, 물살 또한 상당히 거셌다.
결정적으로 물에 빠진 사람들 또한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
쑤욱―
그때, 흙탕물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게 꿈인 것을 알고 있지만, 살아야겠다는 본능이 온몸을 지배했다.
겨울은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헉!”
비명 소리와 함께 겨울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에 둘러싸인 자신의 방이었다.
잠결에 벗겨진 모양인지, 머리맡에는 영어가 흘러나오는 헤드셋이 나뒹굴어 있었다.
“…꿈?”
무슨 꿈이 이렇게 지독한지 겨울의 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문득 겨울은 기시감을 느꼈다.
‘설마 이 꿈도 엊그제와 같은…….’
이틀 전에 꾼 꿈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생동감이 넘치는 꿈인 것이다.
설마 오늘도 꿈에서 일어난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강물 근처에 안 간지 벌써 6년이 넘었다.
그런 그가 오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 강가로 가겠는가.
하물며 당장 토익 준비에 신입 사원 연수 준비로 바빴다.
결국 개꿈이라 치부한 겨울은 다시 헤드셋을 끼고 잠자리에 빠져들었다.
* * *
“호영아, 미안. 대타 조금만 더 해 줄 수 있을까?”
[오, 면접 잘 됐나 보네? 어제 연락 없기에 망한 줄 알았더니. 그럼 이제 3차 면접만 남은 건가?]
“아냐. 어제 본 면접이 마지막이야.”
[아, 대한 그룹은 면접 한 번만 보지. 깜빡했네. 그럼 그냥 나 말고 다른 대타 구해야 하는 거 아냐? 조금만 더 해 달라는 건 뭐야?]
“그게…….”
겨울은 간단히 임시 합격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정호영은 납득했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고는 말했다.
[확실히… 대기업 치고 조금 쪼잔한 결정이긴 하지만, 네가 기본 조건을 채워야 하는 건 맞지. 그래도 많이 봐줬네, 토익 700점 정도면.]
“그치… 많이 봐준 거긴 하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너, 전에 토익 몇 번 보지 않았나? 몇 점이었는데?]
“…385점.”
[진짜? 진짜로 385점이라고?]
가을과 똑같은 반응에 앞에 상대가 없음에도 겨울은 괜히 고개를 숙였다.
[뭐, 아무튼 잘해 봐라. 토익 그거 별거 없어. 여기 편의점에서 알바하는 것보다 쉽겠다.]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의점 알바와 토익 공부를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
[여기서 일이 년 알바할 인내심과 끈기면 충분하지. 그러고 보니, 야이씨… 넌 진짜 친구도 아냐. 어떻게 이런 곳에서 대타를 뛰어 달라 하냐.]
“아…….”
[알바생이라는 게 정해진 시간에만 일해 주는 아르바이트 직원이지 않냐? 근데 이놈의 아주머니는 나를 무슨 하인 부리듯 하는데… 진짜 너 때문에 많이 참았다.]
겨울은 정호영이 이렇게까지 짜증을 내는 이유가 대충 짐작되었다.
분명 주인아주머니가 무리한 부탁을 했을 것이다.
정해진 업무 이외의 시간에 연락해서 부른다든지, 업무와 관련 없는 사적인 일을 부탁한다든지.
이런 요구를 들어주고도 그만두겠다고 성질부리지 않은 것은 성격이 대쪽 같은 정호영 치고는 잘 참은 것이다.
심지어 정호영은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려야 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가난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해야지, 그럼. 그래서 말로만?]
“그럴 리가 있냐. 내가 왜 전화했겠어.”
[어… 음, 대한 그룹 합격한 거 자랑하려고?]
“임시 합격이라니까. 너 삼겹살 사 주려고 전화했다, 인마. 가을이도 같이 먹기로 했으니까 빨리 와.”
겨울은 호영과 만날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