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불합격
정기용 부사장의 말에 박철헌 사장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보아 하니 어느 누구도 겨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채용을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한 정기용 부사장조차도 겨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 한겨울 씨가 6년 전에 버스 승객들을 구했다고 한 말은 사실일 겁니다. 그와 비슷한 기사를 제가 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스펙이나 면접 답변을 볼 때는… 솔직히 어림도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박철헌 사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예 쐐기를 박으려 입을 열었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너무 의욕만 가득하고 감정적인 게 후에 무슨 큰 사고를 칠까 봐 두렵더군요. 그를 채용함으로서 얻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최근 모 기업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지 않았습니까? 신입 사원의 하극상이라며 기사가 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확실히 그도 들은 적이 있는 사건이었다.
실제로는 신입 사원이 멋대로 폭주해 일으킨 사건이지만, 그보다는 직장 상사의 갑질, 블랙 기업이라는 허물이 더 자극적인지라 멋대로 각색되어 기사로 나갔다.
꽤나 논란이 됐고 좋지 않은 쪽으로 주목받아 회사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 예시까지 들어가며 겨울을 견제하는 박철헌 사장의 의도가 궁금했지만, 아예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았어요. 참고 하도록 할게요. 그럼 한겨울을 제외한 두 사람의 채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으십니까?”
송훈석 회장이 심사관들을 둘러보며 물었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사람은 채용하도록 하고, 한겨울 씨에 대해서는…….”
* * *
“지유 씨, 고생하셨습니다.”
“…최준하 씨도 고생 많았어요.”
싱글벙글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최준하가 송지유에게 말을 걸었다.
“앞으로 한 지붕 아래 같이 지내게 될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능글맞은 최준하의 말에 송지유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
송지유는 애써 한 지붕이라는 표현이 대한 그룹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요. 같은 ‘직장 동료’로서 잘 부탁해요.”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그녀의 말투에 최준하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겨울 씨도 있었죠. 겨울 씨도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
노골적으로 자신을 놀리는 말투에 겨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답하기 싫은 것도 있지만, 면접에서 자신이 보인 부끄러운 모습에 할 말이 없던 것이었다.
나름 진지하게 응한 면접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도 부족함이 많았다.
‘허세는 부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에 허세를 부린 대답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최근에 있던 교통사고까지 꺼내 들었다.
설령 송지유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를 면접 자리에서 꺼낸 것 자체가 문제였다.
스스로가 너무도 얄팍하게 느껴지는 겨울이었다.
“두 분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면접 결과는 당일 오후에 문자와 메일로 발송된다고 하니 겨울로서는 굳이 이 자리에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너무도 부끄러운 나머지 송지유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탁.
그렇게 겨울이 대기실을 나가자, 최준하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고 송지유는 말없이 겨울이 나간 문만 바라보았다.
송지유는 겨울이 안타깝고 실망스러웠다.
면접에서 겨울이 보여 준 모습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대책 없고 근거 없는 대답으로만 일관했으며 면접과는 일절 관계없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그녀는 병실에서 그를 보며 느낀 새로움에 조금 기대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 유학까지 포기하고 면접에 나섰는데, 결과는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큰 이변이 없는 이상, 면접에 합격하는 것은 최준하와 자신뿐이리라.
송지유가 작게 한숨을 쉬자, 최준하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래서 지유 씨, 아니, 지유야. 같이 점심이나 먹지 않을래?”
벌써부터 친한 척하는 최준하의 모습에 송지유는 짜증이 확 올라왔다.
가뜩이나 상황이 잘 풀리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인데, 다짜고짜 말부터 놓는 최준하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에이, 그러지 말고. 어차피 동기가 될 텐데 미리 친해지면 좋잖아?”
“별로 그럴 기분 아니에요. 저도 먼저 일어날게요. 고생했어요, 최준하 씨.”
송지유가 자리를 뜨려 발걸음을 옮기자, 최준하는 급히 송지유의 손을 잡았다.
“너무 빼지 말고 같이 먹지? 서로 비슷한 처지끼리 이러지 말자고.”
“비슷한 처지요?”
송지유는 그가 손을 잡는 순간, 소름이 쫘악 돋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인 송훈석 회장도 자신의 몸에 이렇게 쉽게 손을 대지 않는다.
안하무인하기 짝이 없는 최준하의 행태에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어째서 제가 당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거죠? 그리고 손 놓으시죠.”
까칠한 송지유의 태도에 최준하는 입맛을 다셨다.
여태 만난 여자들은 자신의 배경을 보고 꼬리를 흔들기 바빴다.
그렇지 않은 부류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손에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눈앞의 송지유만큼은 달랐다.
배경으로도 전혀 꿀리지 않고,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 같은 게 최준하의 눈에는 그녀가 무척이나 도도하게 보였다.
송지유를 굴복시키고 싶은 더러운 욕망이 마음속에 자리한 최준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훑으며 손을 놓아 주었다.
“회장 딸내미나 부회장 아들내미나 비슷하지 않나? 게다가 같은 회사 동기고 말이지. 이야기가 잘 통할 거 같아서 그런 건데, 너무 까칠하네. 같이 밥 먹는 게 그렇게 어렵나?”
“그러기엔 서로 사람이 너무 다른 거 같아서요. 당신과 친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드네요.”
말을 마친 송지유는 짧게 최준하를 노려보고는 대기실을 떠났다.
탁.
홀로 남은 최준하는 조용히 윗입술을 핥으며 그녀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 * *
최강훈 교수와 손석인 교수는 차 안에서 말없이 이동 중이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손석인 교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최 교수님,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의 말대로 최강훈 교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창문 밖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혹시 어떤 점 때문에 그러시는지…….”
“별일 아닙니다. 지원자들 중 아는 얼굴이 있어서 잠시 생각이 많아져서 그렇습니다.”
손석인 교수는 혹시 그가 말하는 아는 얼굴이라는 게 겨울인가 싶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혹시 한겨울 지원자입니까?”
“손 교수님이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최강훈 교수는 굳이 손석인 교수가 겨울을 콕 찝어 말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최 교수님도 한가을이라는 학생 알지 않으십니까? 그 학생 오빠라서 저도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최강훈 교수는 병실에서 겨울을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에게 정중히 대했고 사례금도 두둑이 챙겨 주었다.
너무도 앞날이 밝은 아이의 오빠이기 때문에.
우연히 대한 그룹 면접관으로 초청받고 지원자 명단을 확인했을 때, 그는 겨울의 이름을 보고 너무도 반가웠다.
어쩌면 자신의 딸아이를 구해 준 보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기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너무도 총명한 동생과는 달리 겨울이 보여 준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도저히 도와줄 수 없을 정도.
하다못해 다른 지원자들을 따라만 했어도 자신이 도와줬을 것이다.
짧게 대답한 최강훈 교수가 다시 입을 다물자, 손석인 교수는 어떻게 해서든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말을 꺼냈다.
“한가을 학생처럼 총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은 괜찮지 않습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한가을 학생과 친분이 있어서 자주 한겨울 지원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어째서 한가을 학생이 그렇게 자랄 수 있었는지 알겠더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면접에서도 한겨울 지원자가 6년 전 교통사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가을 학생에게도 그 사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제 오빠를 참 답답해하면서도 그런 영웅적인 면모를 동경하고 있더군요.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으니, 자신의 오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랍니다. 크, 정말 요즘 애들 같지 않습니다.”
최강훈 교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딸아이인 최현지를 구해 줄 때도 그렇다.
요즘 어느 누가 남을 구하겠다고 대신 차에 치이겠는가.
최강훈 교수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깃드는 것을 눈치 챈 손석인 교수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습니다. 스펙이 뭐라도 하나 내세울 게 있거나 면접을 조금만이라도 잘 봤으면 좋았을 것을… 꿈도 잃고 취업도 실패할 것 같아서 참 안쓰럽습니다.”
손석인 교수의 말이 맞았다.
최강훈 교수는 그의 말에 모두 공감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이미 면접은 끝났고 송훈석 회장의 결정만 남아 있는 것을.
“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한겨울 면접자에게도 실례입니다.”
“아,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둘은 입을 다물었고, 차 안에 다시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 * *
밖으로 나온 겨울은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가을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망했지, 뭐.”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겨울은 분명 그러리라 생각했다.
[벌써 결과 나왔어?]
“아니. 그건 아닌데, 분위기가 그렇더라.”
문득 겨울은 자리에 있던 최강훈 교수를 떠올렸다.
그가 반가운 것은 둘째 치고, 면접장을 나가면서 마주한 그의 눈빛은 싸늘하다 못해 차가웠다.
[오빠, 섣불리 단정 짓지 말고 기다려 보자. 결과는 언제 알려 준대?]
“오늘 중이라고 하니까, 늦어도 저녁에는 알려 주겠지.”
[그래.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고. 혹시 모르지. 의외로 합격할지.]
“어휴, 위로는 이제 됐어. 오늘 저녁 맛있는 거나 시켜 먹자. 기분 꿀꿀해서 안 되겠다.”
[그럴 돈은 있고? 오늘 과외비 들어왔으니까 내가 사 줄게.]
이럴 때조차 동생에게 위로 받으며 사 주는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나오는 겨울이었다.
뚝.
전화를 끊은 겨울은 회색빛 겨울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제 꾼 생생한 꿈을 통해 면접 전에 쫓겨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또다시 기회를 붙잡지 못했다.
‘조금만 더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6년 전의 부상 이후, 겨울은 무엇 하나 열정적으로 임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공들여 탑을 쌓아도 단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걸 핑계 삼아서 늘 노력하기를 회피해 왔다.
그리고 오늘, 겨울은 그렇게 살아온 대가를 치렀다.
자신의 안일함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고, 원하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정신 차려, 한겨울. 축구할 때도 다를 건 없었어. 상황이 바뀐 게 아니라 내가 바뀐 거야.’
겨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그 어떤 기회가 언제 찾아오더라도 다 쟁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겨울은 속으로 다짐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