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내 실력으로 가능할까?
“오빠, 아직 연락 없어?”
가을의 물음에 겨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지유에게 약속을 받은 시점으로부터 벌써 열흘이 지났다.
말로는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라 했지만, 속으로는 약간이나마 기대를 품고 있었다.
겨울은 그런 자신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냥 돈이나 달라 할 걸 그랬다…….”
“어휴, 계속 생각하면 미련만 남아. 그냥 털어 버려.”
“그래야지… 에휴, 사례금만큼만 합의금을 요구했어도 지금쯤 아파트에 살고 있을 텐데…….”
“아, 진짜! 그만 좀 궁시렁거려! 남자가 되어서 그렇게 쪼잔해 가지고 어디 쓰겠냐! 대한 그룹 말고도 널린 게 직장이야.”
혼자 청승 떠는 겨울을 가을이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소리도 너 정도는 돼야 할 수 있단다, 동생아.’
가을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 흔하디흔한 학원에 가지 않고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수재 중 수재였다.
S대 경영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으면서도 지난 3년 동안 쉬지 않고 개인 과외까지 하며 돈을 벌었다.
그 와중에 어렵다고 소문난 공인회계사 시험과 변리사 시험까지 떡하니 합격했다.
그야말로 가을의 앞길에는 12차로 고속도로가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내 앞길은 꾸불꾸불한 비포장도로지만 말이지…….’
생각할수록 괜히 자괴감만 심해지는 겨울이었다.
* * *
한편, 송지유는 잔뜩 뿔이 올라와 있었다.
벌써 아버지인 송훈석 회장에게 여덟 번이나 퇴짜를 맞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할머니인 정인옥 여사에게까지 찾아가 부탁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따스한 미소와 덕담뿐이었다.
“할머니, 시원하시죠?”
“그럼. 우리 손녀가 해 주는 안마인데, 시원하지 않을 리가 있나.”
“어깨 뭉친 거 좀 봐. 최근에 어디 다녀오셨어요?”
“노인네가 다니긴 어딜 다녀. 요 앞마당이나 잠깐씩 산책하는 거지.”
“우리 할머니,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젊게 사신다니까.”
“끌끌, 우리 아가가 이 할미를 칭찬해 주는 모양새를 보니, 부탁하고 싶은 게 있나 보구나.”
“네? 아니에요. 그냥 할머니가 좋아서 이러는 거예요.”
“내 너를 25년 동안 지켜봤는데 그걸 모를까. 아무리 늙었다 해도 이 할미는 다 안다. 해서 무슨 일이냐, 아가. 아범이 용돈을 안 주디?”
“…그런 거 아니에요. 아빠한테 딸내미 말 좀 잘 들으라고 혼 좀 내 주세요.”
“끌끌, 심통이 난 걸 보니까, 아범이 어지간히 말을 안 듣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니까요, 정말.”
“그래도 아가, 아범이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닐 게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게야. 전에 네가 미국 간다 했을 때도 안 내켜 하면서도 들어주지 않았더냐.”
“그렇긴… 하죠.”
“그래도 우리 귀여운 손녀 말인데, 내 아범한테 한마디 해 놓으마.”
* * *
“그래, 네 할머니에게 이야기 들었다. 아직도 포기 못 했어?”
“제가 책임지겠다고 말하면서 약속했는데, 어떻게 포기해요.”
송훈석 회장이 답답한지 서재 창문을 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전치 1주도 나오지 않은 녀석을 VIP 병실에 입원시켜 주고, 돈도 준다고 했는데 거절했다며? 그 정도면 할 도리를 다한 게 아니냐?”
“대신 다른 걸 요구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다른 게 문제라는 거다, 지유야. 입사가 웬 말이냐, 입사가.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의 횡포다 갑질이다 뭐다 해서 소란스러운데, 이 아빠를 뉴스에서 보고 싶은 거냐? 아무튼 계속 말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아빠…….”
송훈석 회장의 단호한 말에 송지유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앞서 여덟 번이나 봐 왔지만, 송훈석 회장은 예쁜 딸내미가 속상해하는 모습이 여전히 눈에 걸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어휴, 내 팔자야.’
송훈석 회장은 결국 자신이 한발 양보하기로 했다.
“알았다.”
“…네?”
“일단 녀석의 이력서를 먼저 보고 결정하도록 하마. 자료 준비해서 가져와.”
“진짜요?”
그 말에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송지유가 밝은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송훈석 회장은 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황했지만, 그게 마냥 밉지만은 않았다.
“그리 좋으냐.”
“그럼요! 이제야 제 말을 들어주셨잖아요.”
“…녀석이 좋은 건 아니고?”
“무슨 말이에요, 아빠. 누누이 말하지만, 전 아빠밖에 없어요.”
“허허, 녀석. 됐다. 대신 오늘 저녁엔 나랑 술이나 한잔하자구나.”
“좋아요. 겨울 씨한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받아야 하니까 먼저 나가 볼게요!”
탁.
송지유가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서재를 빠져나가자, 송훈석 회장은 딸이 나간 문을 가만히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지유도 그럴 나이인가.”
“아빠!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때, 문이 다시 벌컥 열리며 송지유가 소리쳤다.
“알았다, 알았어. 어휴, 누굴 닮아서 그렇게 귀가 밝은지, 원.”
* * *
윙윙―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마침 손님도 없기에 편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송지유였다.
“송지유 씨, 오랜만이네요.”
[겨울 씨, 늦게 전화드려 미안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겨울은 송지유의 목소리가 들떠 있음을 눈치챘다.
어쩌면 정말로 대한 그룹에 입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겨울의 기분 역시 들뜨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음, 아직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어요. 그래도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아무튼 전화드린 건 다름 아니라, 오늘 중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좀 보내 주세요.]
“……!”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송지유의 말에 겨울은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후후, 회장님 허락을 받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아무리 회장님이라고 해도 쉽게 결정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으니까요.]
“아, 이해합니다. 괜히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나요. 오히려 죄송하고 고마운 건 저죠. 저 때문에 겨울 씨가 그렇게 큰 사고를 겪었는걸요. 만약 겨울 씨가 지금 몸에 큰 문제가 있었다면 전 어떻게 되었을지, 아직도 종종 떠올라요.]
담담한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겨울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느꼈다.
대기업 회장의 무남독녀라고 할지라도 그녀 역시 한 명의 사람이었다.
“뭐, 결과적으로 잘 풀렸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좋게 생각해요. 저, 어디 후유증도 없고 멀쩡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알바하고 있고요.”
[아, 일하는 데 방해된 건 아닌가요?]
“아뇨, 딱히. 마침 손님도 없고… 그래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퇴근하고 나서 보내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녁 무렵에 보내도 괜찮죠?”
[네. 편할 때 보내시고 문자만 주세요. 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낼 메일은 전화 끊고 문자로 바로 알려 드릴게요.]
“네. 그럼 수고하세요.”
뚝.
송지유와 통화를 끝낸 겨울은 떨리는 마음으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후우∼ 너무 기뻐하지 마, 한겨울. 아직 입사한 거 아니다.”
* * *
다음 날 오전.
겨울에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전달받은 송지유는 송훈석 회장을 찾아갔다.
“…그 녀석 거냐?”
“네, 아빠.”
“흐음…….”
송훈석 회장이 잠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훑어보던 중 비서가 들어와 송지유에게 커피를 건넸다.
“고마워요.”
비서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한 송지유에게 송훈석 회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유야.”
“…네.”
“네가 만약 우리 그룹의 회장이라면, 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가져온 청년을 입사시키겠니?”
“…….”
송훈석 회장은 송지유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아이이기에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아니라 다른 이였다면 벌써 호통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그 정도로 한겨울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엉망이었다.
스펙이라고 할 것도 없는 부실한 내용.
졸업한 대학은 그렇다 하더라도 학점, 어학, 기타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송훈석 회장은 대기업 회장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한겨울을 입사시키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후우… 지유야, 나도 웬만하면 네 말을 들어주고 싶다만, 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내부 반발이 심할 게야.”
“…….”
송지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그래. 지유, 너 역시 이걸 보고 아무 생각 없이 가져온 것은 아니겠지. 네 생각을 말해 봐라.”
송지유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송훈석 회장과 눈을 마주했다.
“아빠 말이 맞아요. 솔직히 저도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인턴은커녕, 협력회사 쪽 알바로도 어려운 스펙이죠.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요, 서류 전형만 통과시켜 주세요.”
“흐음…….”
“완전히 채용하기로 결정된 것은 아니니 내부 반발도 적을 테고, 면접부터는 온전히 자기 능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니 나름 괜찮은 방안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아예 반발이 없진 않을 텐데?”
“겨울 씨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지 않도록 수를 써야죠.”
“눈빛을 보아 하니 그 수를 생각해 왔나 보구나.”
언제 화가 났냐는 듯, 송훈석 회장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송지유를 쳐다보았다.
송지유는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년에 미국으로 유학 가기로 한 거 포기하고, 저도 같이 면접 볼게요.”
“그게 정말이냐!”
송훈석 회장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는 일흔이 넘으면 그룹을 송지유에게 넘기고 노후를 편히 즐기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송지유가 그룹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라 많이 아쉬워했다.
딸아이의 꿈을 자신의 욕심 때문에 꺾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결국 적당히 믿을 만한 전문 경영인에게 그룹 운영을 맡겨야겠다 결정하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송지유가 회사에 입사하겠다는 말을 꺼낸 것이다.
“…한 번 들어오면 돌이킬 수 없다.”
“알고 있어요, 아빠.”
기쁜 마음이 드는 한편, 씁쓸한 마음도 드는 송훈석 회장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부탁할 때는 쳐다보지 않던 딸이 고작 평범하다 못해 무능한 남자 하나 때문에 꿈을 접은 것이 안타까웠다.
대기업 그룹 회장의 말을 단호히 거절하며, 자기 앞길은 스스로 개척하겠다며 호기롭게 외치던 딸아이가 은근히 자랑스럽던 그였다.
“알았다. 면접에서 탈락되어도 이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면접을 진행하도록 하지. 만에 하나 붙게 되더라도 최소 5년 이상 근무하는 조건이어야 한다.”
“물론이죠. 제가 잘 말해 놓을게요.”
“그래, 네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인사팀에 이야기해 놓을 테니, 결과가 나오면 알려 주마.”
송훈석 회장의 확답을 받은 송지유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도 좋으냐?”
“그럼요. 아빠, 점심은 드셨어요?”
“아직 안 먹었다. 생각도 없고.”
“그러지 말고, 같이 먹으러 가요. 제가 좋은 식당 하나 알아봐 뒀어요. 네?”
“어이구, 알았다, 알았어.”
송훈석 회장은 비서실장에게 말을 전달하고는 송지유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식당에 도착해 식사를 하던 송훈석 회장은 송지유와 못다 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지유야, 아빠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되냐?”
“네, 얼마든지요.”
“그 한겨울이라는 녀석은 어떻게 생겼더냐?”
“음, 그냥 평범하게 생겼어요. 굳이 장점을 꼽자면 듬직하게 생긴 거 정도?”
“그렇다면 네가 평소에 말하던 이상형은 아닌데…….”
“아빠, 이제 그만하시죠? 사춘기 여고생도 아니고… 왜 자꾸 그래요, 정말.”
송지유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노려보자, 송훈석 회장이 애써 눈을 돌리며 다른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험험…….”
지이이잉―
그때, 송훈석 회장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느긋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별일이야 있죠. 하하, 지금 지유랑 같이 식사하러 나왔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얘기하시죠.”
송훈석 회장이 잠깐 통화하는 사이, 송지유는 열심히 젓가락을 놀렸다.
뚝.
마침내 통화가 끝나자 송지유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신나서 통화해요?”
“아, 미안하다. 최성진 부회장 알지? 그 3대 주주인.”
송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성진 부회장은 그녀가 송훈석 회장을 보러 가끔 회사에 들르면 마주치는 인물이었다.
송훈석 회장 앞에서는 얌전한 강아지 같지만, 그가 없는 곳에서는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이 곱지 않아 내심 불편해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네가 입사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부회장 아들놈도 같이 면접을 보겠다고 하는구나.”
“해외에 나가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 한국에 들어왔대요? 아니, 그보다 아직 대학생 아니에요?”
“허허, 작년 5월에 졸업하고 곧장 귀국했다고 하더구나.”
송훈석 회장은 장차 회사를 이끌어 나갈 2세대 인물들이 들어온다며 마냥 좋아했지만, 송지유는 자신이 싫어하는 최성진 부회장의 아들이 어떻게 변했을지 괜히 걱정되기만 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