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9 중장 사망하다 =========================================================================
* * *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다쳤다고는 해도... 너무 추잡한 일이 아닌가?"
사황성주의 뒤 쪽이다. 복도의 끝은 어두웠다. 그 어두움 가운데, 누군가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윤석도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기세가 느껴진다. 일부러 기세를 숨기고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그 기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지금 저 목소리를 낸 사람이 고수라는 뜻이기도 하다.
"너, 넌...?"
저벅 저벅. 작은 발자국 소리가 복도의 벽면을 타고 울려퍼졌다. 사실상 일반인에게 들릴 소리는 아니지만, 사황성주와 윤석의 귀에는 굉장히 또렷하게 들렸다.
"악즉참."
남자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대도를 등에 매고 있었다. 그리고 검첨에 손을 가져다댄 순간.
사황성주의 목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사황성주는 분명 약해져 있는 상태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어도 부상중이거나 병중이면 그 힘을 모두 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누구나가 그런 고수의 목을 쉽게 따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윤석도 깜짝 놀랐다. 강해서라기보다는, 중원에서 별로 보지 못한 특이한 종류의 무공 때문이다. 대도를 빠르게 휘둘렀다. 그러나 그 대도로 사황성주를 공격한 것은 아니다. 주위의 공기를 때리고, 그 공기를 극도로 압축하여 공기로 칼날을 만들어 쏘아낸 것 같다. 아니면 내공으로 만든 검기라든가.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만만히 볼 상대는 아냐.'
무엇보다 저 생김새. 예전 신선문이 열렸을 때 자신을 찾아왔던, 정체 모를 남자와 많이 닮아 있었다. 힘을 얻고난 뒤, 유일하게 패배(?)를 안겨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던 그 남자와 얼굴이 닮아있다보니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마나와 내공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어차피 그 수치는 모두 MP로 표현되지만, 무공과 마법이 다르듯 체 내에서 내공과 마나는 그 작용이 다르다.
수희는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바닥에 주저앉았고 남자는 그러한 수희를 들쳐안아 복도의 벽쪽에 조심스레 앉혀주었다. 그리고 다시 윤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감히 나와 싸울 참인가?"
윤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필요 하다면."
모르겠다.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내공과 마나는 그 작용이 다르다. 역시 무공과 마법은 그 성질이 다르다. 전투에 한정지어서 얘기한다면, 천마의 무공은 회피에 특화되어 있고 목탑주의 마법은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 그건 무공/마법의 시전자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천마의 무공은 '효율'을 극대화시킨 것이라 소모적인 방어보다는 회피를 택한 거고, 목탑주는 '마법의 방향성' 중 하나가 바로 '방어'이다 보니 방어를 극대화시킨 거다. 어쨌든 그 두가지 모두를 갖춘 사람이 바로 윤석이다.
'싸워도... 지지는 않아.'
그리고 지지는 않을 거다. 이런 고수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지진 않을거란 자신이 있다. 신선문이 생기고 나타난 남자는 아예 기세가 읽히지 않았지만 이 남자는 확실히 기세가 잡힌다. 자신보다 한 수 정도는 아래다.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안졸리냐졸려는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황명을 받들라!"
동시에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황명을 받든 천외천 부단장 조운이 황명을 전하려 합니다. 무릎을 꿇고 절하며 공손하게 황명을 받으십시오.]
난데없이 황명이란다. 남자의 이름은 조운. 천외천이라는 곳에 소속되어 있단다. 그런데. 때까지도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던, 목이 없어진 사황성주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눈발이 휘날리듯 흩어지다가 이내 종적을 감추었고.
"쉴드!"
윤석이 황급히 방어마법을 펼쳤다.
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1m가량의 쇠도끼 하나가 조운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튕겨져 나갔다. 조운은 피식 웃었다.
"세상의 소문처럼, 역적은 아닌 모양이군."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의 소문이 아닌, 황궁 내의 소문이다. 권력있는 자는 새로이 떠오르는 '신성'을 바라보는 것을 싫어한다. 당나귀 성자, 정의맹 맹주, 하늘이 내려주신 분. 그 칭호를 갖고 있는 '안졸리냐졸려'에 대해 경계를 했고 암중에서 모략을 꾸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궁 내에서도 정의로운 사람은 있기 마련. 특히 승상 제갈열이 그랬다. 제갈열은 그러한 인재는 절대 놓칠 수 없다면서 황궁으로의 영입을 강력히 추천했고 현 황제인 오황제는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하늘이 내려주신 분'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던 -감히 황제도 아닌 자가 그러한 칭호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많은 중신들도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어쨌거나 일단 황궁으로 들여오게 되면 견제할 수 있으니까. 물론 뛰어난 무력이 있다고는 들었으나 이 황궁이란 곳은 싸움만 잘한다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곳에 연줄도 없고 아무런 힘도 없는 자는, 그만큼 처리하기도 쉬우리라.
"쉴드."
낑!
다시 한 번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도끼였다.
끼깅! 낑! 낑! 끼기깅!
도끼가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세 마탑주의 마법을 그대로 복사해낸 윤석의 쉴드다. 제 아무리 빠르게 날아드는 도끼라 해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
조운이 말했다.
"아무래도 시간을 끌려는 수작인 것 같은데."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도끼를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윤석의 쉴드를 받으며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복도 반대편 어둠쪽을 노려보았다. 눈을 가늘게 한 번 떠보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라. 백성이여."
"......."
윤석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일단 따라나섰다. 무려 시스템에서 알림을 보내왔다. 황명이니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받으라고. 이 것을 거부하면 역적이라도 된다는 것인가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NPC주제에 묘하게 명령을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이 있는지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봐. 내 정인. 내 진짜 정인이 들으면 황당하겠네."
"내, 내가 기분 더 나빠!"
"우리 주랑이가 너같은 호박보단 훨씬 더 이쁘지."
윤석은 쿡쿡 웃다가 수희의 앞머리를 헝크러뜨리고는 다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는 "누가 호박이얏! 그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예쁜 거 뿐이라고!" 라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 *
의외였다. 당나귀 성자 외에 또다른 인간이 감히 사황성 내벽으로 들어올 줄이야. 그런데황명을 가지고 온 사자란다. 사황성주는 그제서야 이 상황이 이해가 됐다. 아무리 다쳤다고는 해도, 그래도 사황성주다.
'황궁의 천외천....소속인가.'
천마교, 사파, 정파. 유저들은 이 세 곳이 중원을 삼분하는 가장 거대한 세력들이라고 알고있지만 그건 틀렸다. 이 세 곳을 모두 아우르는 곳이 있다. 바로 황궁이다. 원래 모든 것은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인다. 판타리아의 유저들은 '마탑주'는 알지만 '왕'은 잘 모른다. 중원의 유저들도 '사황성주'는 알지만 '황제'는 잘 모른다.
황제가 거느린 무력집단은 크게 분류하면 두 개다. 천외천과 금군. 금군은 무공을 깊이 익히지는 않았으나 대규모의 병력과 전술을 통해 결투가 아닌 전쟁을 치르는 무력집단이고 천외천은 개개인이 무공을 깊이 익혀 황제를 수호하는 무력집단이다. 사실상 천외천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그나마 사황성주 쯤 되니까 '황명'이란 단어를 듣고 즉각적으로 천외천을 떠올릴 수 있던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외천의 존재자체도 잘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 정도의 무위를 가진 자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니.'
생각은 길지 않았다. 지금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황성주는 본신을 가지고서 정의맹 맹주 앞에 서는 짓따윈 하지 않았다. 그건 위험한 일이다. 예전에 그의 능력을 봤다. 정상적인 몸상태여도 힘든 상대다. 그런데 지금은 부상까지 입은 상태. 정면전은 피해야 하건만.
그러나 역시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몸을 수습하기가 쉽지가 않다. 방금전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에도 심력을 많이 썼다.
'결국... 이 방법 밖에 없나...'
사황성주는 힘겹게 몸을 움직여 침상에서 내려와 침상 바로 옆 작은 서랍 속에 고이 모셔놓은 단환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걸 사용하게 될 줄이야.'
씁쓸해졌다.
"나는 사황성주다."
이 단환을 사용하면 죽을 수도 있다. 이름은 생사경단. 생과사. 그 경계에 위치한 단환이라는 뜻이다. 사황성에서도 몇 알 없는 진귀한 단환이며 역대 사황성주들이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온 몸의 생명력을 억지로 끌어내서 폭발적인 힘을 사용하게 만들어 준다. 약효는 약 한 시진. 그 시간 동안 힘을 모두 끌어내서 쓰면 죽는 거고, 아니면 살 수 있다.
"그 자를 죽이면..."
그가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정의맹 맹주보다는 쉬운 상대다. 아마 생사경단을 복용하면 어렵지않게 처치할 수 있으리라.
천외천은 비밀조직이다. 황제를 수호하는 집단답게, 그 개개인에 대한 신상은 전혀 드러나있지 않다. 그런 천외천이 직접, 그것도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왔다는 말은 아마 황궁에서는 황명을 전하는 것을 비밀로 하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정의맹 맹주를 몰래 찾아간 사자가, 어느날 알아보니 죽어있다. 그 말은 즉 정의맹 맹주가 가장 강력한 용의자가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황궁에는 놈을 싫어하는 놈들이 많을 터.'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어도, 강력한 용의자가 되기만 해도 괜찮다. 그러면 황궁에서 알아서 손을 쓸 거다. 정의맹 맹주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황궁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지.'
조운을 단숨에 죽여버리고 어떻게든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사경단을 복용하면, 도망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리라. 순식간에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조금만 도망치면 될 거다.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황궁에서 '안졸리냐졸려'를 추적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살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믿는다."
저들이 가까이 다가오는게 느껴졌다. 사황성주가 입을 벌려 생사경단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순간, 청명한듯 기운이 입속 가득 퍼져나갔다가 그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넘어가면서 온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 수 있다."
사황성주는 침상에 도로 누웠다. 마치, 위중한 부상을 입은 것 처럼. 생사경단의 약효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미쳐 날뛰고 싶었지만 참았다. 상처입은 맹수처럼 가만히 있기로 했다. 머릿속으로 가장 효율적인 도주로를 생각하고, 조운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을 그렸다.
'너희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사황성에 들어왔다는 거다.'
사황성이 괜히 사황성이 아니다. 그리고 그 사황성은 사황성주가 가장 잘 안다. 똥개도 제 집 앞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조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명을 받고 있는 나를 해하려한 죄. 결코 좌시할 수 없다. 사황성주 그대는 순순히 목을 내놓으라."
사황성주가 아주 작은 전음으로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은 당나귀놈의 시선을 끄는데에만 집중해라. 다른 건 신경쓰지 마라.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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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모함을 하겠어. 황궁아!
잠자는 윤석이를 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