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8 중장 사망하다 =========================================================================
* * *
불지옥을 일으키고 하늘이 내려준 사람이라는 소문을 뒤로 한 채, 윤석은 단신으로 사황성으로 향했다. 사황성주는 부상중에 있지만, 그래도 사황성은 사파를 대표하는 거대한 힘이다. 사황성에 사파 무사들이 속속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봐. 들었어? 당나귀성자께서 이번엔 사황성을 친다는구먼."
"그 분께서?"
"그런데 단신으로 가고 계시대. 이게 말이 되나? 내가 한번 사황성을 본적이 있는데 성벽 높이가 무슨 하늘에 닿을만치 높았더라니까?"
"예끼, 이 사람. 하늘이 내려주신 분을 뭘로 보고. 유현성의 마을을 보고도 짐작 가는 것이 없나? 높이같은 건 그분께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나? 하늘이 내려주신 분께 불경한 말을 하다간 천벌 받을지도 몰러. 말 조심 하게."
현재 윤석은, 소문이 퍼진대로 사황성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사황성의 성벽. 그도 예전에 봤었다. 높이로 치면 120미터쯤 될 거다. 괜히 사황성이 아니다. 천마산이 천혜의 요충지라면, 사황성은 인공적으로 만든 요새나 다름 없었다.
한편, 윤석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여자는 눈 밭에 들어선 강아지처럼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인터뷰를 해대고 있었다. 하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고가이리라 짐작되는 비단 옷은 금색 실로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 것은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도 매우 잘 어우러져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다름아닌 M매거진의 김나영. 그녀는 요즘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친구인 수정이 윤석의 직속비서로 들어가게 되면서 그녀의 인생도 폈다. 역시 인맥이란 매우 훌륭하고도 존귀한 것이야, 라고 홀로 중얼거리면서 윤석의 앞에 턱하니 앉았다.
"지금 심정이 어떠세요 맹주님?"
"맛있는데요."
"아니. 그거 말고 지금 사황성에 선전포고 하셨잖아요."
"아..."
윤석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 소면을 후루룩 마시듯 삼켰다.
"그렇게 맛있어요?"
나영은 젓가락을 집어들고 윤석의 소면 그릇에 담긴 소면을 먹으려했는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윤석은 마탑주의 능력을 제외하더라도 2만년 천마의 능력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한낱 기자에 불과한 -나름대로는 고수라고 하지만 윤석의 눈에는 아직 갓난아이보다 약하다- 여자에게 그릇을 빼앗길만큼, 실력이 녹록치는 않다.
"남자가 치사하게."
"나영씨가 시켜드세요. 그러길래 아까 같이 시키자니까. 국물 한 방울 안줄거니까 알아서 먹어요."
유토피아에는, 음식문화가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맛은 실제와 똑같거나 오히려 그 이상인데 실제로 먹는 것은 아니니 살은 안 찐다. 물론 일부에서는, 뇌가 실제로 먹는 것과 똑같이 인식하기 때문에 오히려 살이 찐다는 연구결과가 있기는 있으나 어쨌든 사람들은 유토피아에서는 식탐을 맘껏 부리는 편이었다.
"치사하게 비싸지도 않은 소면으로!"
나영은 입술을 내밀고 뾰루퉁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삐진척 했다. 그래봤자 윤석에겐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안다. 그녀는 이내 포기하고선 똑같이 소면을 하나 주문했다. 사실 소면이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겠냐마는, 윤석이 먹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먹고 싶어졌다.
"와. 진짜 치사하다. 그래봐야 3천원밖에 안하는 건데 이정도는 좀 사주면 안 돼요?"
"그런 말 할 시간에 나영씨가 나 사줘도 되잖아요?"
"벌이가 다르잖아요 벌이가!"
달라도 한참 다르다. 평범한 사람은 만져보지도 못할 '조'단위의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쾌척하는 남자다.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를 한국 최고 명문으로 만들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말이다. 그 남자가 태평스레 말했다.
"우리 마누라가 여자랑 밥먹을 때 사주는 거 아니라했어요. 오해산다고."
윤석은 쿡쿡 웃으면서 먼저 나섰다. 그 뒷모습이 어김없이, 그냥 장난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 같다. 나영은 윤석의 등 뒤에 대고,
"메-롱!"
이란 작은 복수를 하고선 황급히 뒤쫓아갔다. 윤석이 몸도 안 돌리고 말했다.
"다 보여요."
나영이 생긋 웃었다.
"뭐가요?"
"다음부턴 안 그러는게 신상에 좋을걸요?"
윤석은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네?"
윤석은 다소 난처한듯, 약 3초간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스나라고 무시무시한 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 앞에서 그랬다간 진짜로 죽을 수도 있어요."
* * *
높이 약 120미터. 현대의 어지간한 고층건물보다 훨씬 높은 거대한 성벽이 윤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평시라면 활짝 열려있을 거대한 문도, 지금은 닫혀있다. 살벌한 기세를 품은 수만 명의 군세가 성벽 위에서 쉴틈없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윤석이다. 지금 저쪽은, 성벽 위에서 상당히 긴장한 기색으로 경계를 서고 있다. 윤석이 나영에게 말했다.
"잠깐 가만히 있어봐요. 그리고 앞으로는 말을 아예 하면 안됩니다. 알았죠?"
"말을요?"
"쉿! 이제부터 진짜 입 열지 마요. 전음도 안 돼요. 입 여는 순간 그냥 버리고 갈 거에요."
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벽 안쪽은 시끄러워졌다. 사실상 지금 사황성으로 진입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봐도 된다. 사황성은 거대한 성이고, 그 둘레는 더욱 거대한 호수가 둘러싸고 있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면, 굉장히 작아서 마치 개미같은 인영 둘이 보일 뿐이다. 그 둘은 차근차근 사황성쪽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군사님!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로 추정되는..."
"죽여."
"예?"
"접근하는 모든 인간은 죽인다. 그게 우리의 계획이다."
사황성의 동쪽 경계를 책임지고 있는 제 1군사 갈재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 이쪽엔 내공을 실어 활을 날릴 수 있는 고수가 무려 8천명이 넘는다. 전체적으로 흩어져 있다고는 해도 한번에 집중할 수 있는 병력은 약 700명 가량 된다. 이들은 궁술을 집중적으로 연마한 고수들이다. 거리따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갈재운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사실 저 멀리 다가오는 두 인영이 정의맹 맹주일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갈재운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다. 아무리 정의맹 맹주가 강하다고는 해도 정말로 단신으로 올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유현성의 마을 사건 역시, 어떠한 속임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리고 군사쯤 되는 사람이라면 그런 허황된 소문은 믿지 않는게 정상이다.
최소한 초고수라 불리는 이들 수십명은 대동할 거라고 예측했으며, 아마도 사황성 주위에 대단위 병력을 미리 배치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그건 군사진들의 일치된 생각이었으며, 하루에도 수차례씩 사황성 주변은 물론이고 꽤 떨어진 곳들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조사로 미루어 봤을 떄, 정의맹 맹주가 실제로 나타났을 확률은 매우 적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딱히 신경쓰기도 귀찮다. 죄라면, 이런 나쁜 시기에 이 곳에 가까이 왔다는 것 뿐일까.
"군사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경계를 서고 있는 수백명의 인원이 동시에 놓쳐버렸다. 이건 말도 안 된다. 호수 건너편. 아무리 거리가 있다지만, 경계를 서고 있는 모든 인원은 하나하나가 적어도 고수소리를 들을 정도는 된다. 게다가 저쪽은 평지다. 은신하거나 이목을 속일 곳도 없다. 그렇다고 모든 인원이 허상을 잘못 봤을 리는 없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 * *
사황성은 총 세겹의 성벽으로 이루어져있는 거대 성이다. 외벽과 중벽. 그리고 내벽으로 이루어지며 내벽 안쪽은 사황성주와 그 직계, 그리고 장로급이상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황성은 바로 그 곳을 의미하는 것이고, 당연히 경계가 매우 삼엄하다.
그러나 워프는 말 그대로 공간이동이다. 경계가 삼엄하건 어쨌건 상관 없다. 판타리아인의 침입에 대한 방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안타깝게도 윤석은 판타리아의힘만 가진게 아니다. 천마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 워프를 통해 이동했고 천마의 힘으로 기척을 죽여버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여, 여긴...흡."
나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윤석이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사황성의 내벽 안쪽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워프를 해서 오기는 왔는데 사황성주가 어디있는지,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윤석은 기감을 따라 움직였다.
중간중간, 함정이 있기는 했으나, 나영의 목숨을 위협할 뿐이지 윤석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나영은 기겁하면서 윤석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그녀의 취재욕이 결코 적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숨보다 크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내 능력이 뛰어나도... 이쯤이면 알아차릴 법 한데.'
지금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복도를 밝히고 있는 야명주의 빛이, 만약 소리를 낼 줄 안다면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살금살금 걷고 있는 고양이의 발자국처럼 들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 번 해보고 윤석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복도 끝. 저만치 끝에서.
"오랜만이군. 당나귀성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끝은 어두웠다. 나영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윤석은 확실히 보인다.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보군."
"당연하지. 네 놈은 천마의 능력을 뛰어넘었다. 경계병력따윈 어차피 소용 없는 거지."
사황성주는 온 몸에 붕대를 감은 상태다. 예전, 나로호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애꿎은 부하들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부하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상관은 아니라고 들었었는데."
윤석은 차분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허투루 가볍게 볼 상대는 아니다. 윤석도 인간인 이상에야 공격을 제대로 허용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생겼다.
"오빠!"
"김수희...?"
이건 예측하지 못했다. 사황성주가 인질을 잡고 있다. 그게 하필이면 수희다.
"나는 어릴적, 죽음의 위기를 숱하게 넘어왔다. 힘이 없고 약했던 어린 시절에 내게 주어진 것이라곤 눈치밖에는 없었지."
사황성주가 수희의 목을 한팔로 끌어안았다. 수희는 숨쉬기가 곤란한 듯 캑캑거렸다.
"내가 이 발칙한 계집년과 네 놈이 아주 밀접한 관계라는 걸 모를 줄 알았나?"
"......."
"은미상단 역시, 배후에는 네 놈이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은미상단이 이렇게 커진 것이 설명이 안 돼. 그 막대한 자금력 역시 마찬가지고. 그 것을 가능케 하는 건 오로지 네 놈. 당나귀성자 뿐이다."
사황성주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선택해라. 네 놈이 여기서 죽던지, 나와 함께 이 계집년을 죽이던지."
스파크의 알림음이 들려왔다.
[타겟. 초기화 스킬을 준비 중입니다. 이는 최상위 NPC에게 부여된 특별한 능력으로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발동하며, 유저의 사망시 유저의 모든 능력치를 초기화시킬 수 있습니다.]
"뭐라고...?"
윤석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최상위 NPC에게 부여된 특별한 능력이란다.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발동하는 '초기화 스킬'. 이런 전개는 예측하지 못했다. 상대가 사황성주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수 있겠지만 상대는 사황성주다. 아무리 윤석이어도 눈 깜짝할 새에 처리해버리기는 힘들다.
그리고 만약, 그 눈깜짝할 새를 놓치면 수희의 모든 능력이 초기화된단다. 3일의 접속제한만 해도, 현대인에게는 크나큰 형벌이다. 그런데 캐릭터가 초기화된다면? 그것도 사황성주의 능력을 이은, 그 캐릭터가 사라진다면? 그것도 자신의 부탁아닌 부탁 때문에 샤무의 지위까지 버려가면서 얻은 캐릭터가 사라진다면?
'젠장...'
"결정해라 당나귀 성자. 만약 네 놈이 여기서 자결한다면, 네 계집년의 목숨만큼은 살려주도록 하겠다."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정의맹 맹주쯤 되는 자가, 자신의 정인 하나 지키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윤석은 조금 황당해졌다.
============================ 작품 후기 ============================
졸지에 여동생의 정인이 된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