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플레이어-202화 (202/244)

00202  중장 사망하다  =========================================================================

* * *

이봐. 일어나라고. 이런 멍청하기 짝이없는 새끼.

천마는 쉴 새 없이 욕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삶이 꼬여버렸다. 2만년간 유지해온 육체가 사라졌다. 지금은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신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2만년을 버텨올 수가 없다. 애초에 어중간한 정신력으로는 천마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다. 정신력이 강하다는 말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하다.

빌어먹을! 평생을 동정으로 지내다 남자새끼 위에서 복상사할 새끼!

그러나 천마는 평정심을 전혀 유지하지 못했다. 다행히 영겁의 지옥 속에 갇힌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리 고독하지도 않고, 주변 세상이 느껴지기야 느껴졌다. 자신을 가둔 놈의 심장소리도 들려왔다.

그 씨부럴 놈이 없었으면 진짜로 뒤져버렸을 지도 몰라.

천마는 욕하기를 포기하고서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체이니, 형체가 따로이 있는 것은 아니나 천마 스스로가 그렇게 느꼈다.) 잠시 42시간 전을 회상해 봤다.

하늘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무언가 알 수 없는 빛이 땅을 덮었다. 강맹한 어떤 무기라기보다는, 보드라운 햇살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내재된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얼스가 타 대륙에선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할 정도였다. 피할 방도도 없다. 대규모 광역 공격인 듯 싶었다.

최상의 컨디션이었다면 어떻게든 막아냈을 법 한데, 사황성주와의 결투 때문에 온전한 상태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내공의 소모가 컸다. 천하의 사황성주를, 죽이는 것도 아니고 생포하려고 했다.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거기다가 슈퍼컴퓨터 스파크는 현재의 최우선 과제로 '눈 앞의 사황성주를 생포'하는 것으로 삼았기 때문에 오로지 그 것에 관한 최선의 방법을 제시했고 그 방법은 당연히 내공소모가 심한 방법이었다.

사황성주의 말도 안 되는 무위를 목격한 슐터가 사황성주 생포를 포기하고 나로호의 '아침햇살'을 발포하게 한 것은, 스파크의 계산범위 밖의 것이었다.

"이 놈이 바로 그 엄청난 물건이란 말이지?"

"그래. 그렇다니까. 자쿠인지 조크인지 그 멍청한 할아범이 지 알량한 목숨 내던지면서까지 보호한 놈이잖어."

"흠. 이봐. 내 목소리가 들려?"

천마의 눈에 얼스인들과는 다른 복장의, 판타리아의 마법사들이나 입을 법한 로브를 둘러입은 두 남자가 보였다. 사실상 로브 모자에 가리워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천마는 이 두 남자가 최소 100세는 넘겼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따! 내가 보이냐니까!"

붉은색 로브를 입은 남자가 자주색 나무지팡이를 세차게 휘둘러 천마를 후려쳤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마가 봉인된 육체, 즉 안졸리냐졸려의 머리통을 때렸다. 천마는 씨익 웃었다.

"너흰 마도사들인가?"

그러자 두 남자가 배를 잡고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발을 동동 굴렀다. 녹색로브를 입은 남자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가 떼굴떼굴 구르며 웃었다. 그러다가 로브가 벗겨졌는데, 머리카락이라곤 단 한올도 없고 얼굴엔 검버섯이 굉장히 많이 피어 있었다. 얼굴 색만 보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반 시체였다.

천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스인이라 짐작되는 하얀색 가운을 입은 남자들, 그리고 슐터가 보였다. 신기한 건, 지금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고 있는 두 놈들은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얼스인들의 몸을 계속해서 통과하고 있다는 거다.

하얀색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남자 하나가 말했다.

"뭔가 으스스하지 않아?"

"그러게. 날씨가 좀 쌀쌀해졌나."

푸하하하하! 이번엔 빨간로브를 입은 남자가 크게 웃었다.

"요 놈! 내가 안 보이지? 안 보일 걸?"

그 남자는 안경을 쓴 남자 앞에 서서 혀를 내밀고 자신의 양 볼을 죽 잡아당긴 뒤,

"약 오르지? 약 오르지?"

라며 덩실덩실 엉덩이를 흔들다가 이내 로브를 활짝 펼쳤다. 해골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앙상한 몸이 보였고.

녹색로브를 입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쬐끄만 꼬추로는 아무것도 못하지."

천마는 황당해서 두 남자를 한 동안 보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풍기는 기운으로 봐서는 아마 절대자들일 거다. 마탑주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하는 짓들이 해괴하기 짝이 없다. 적어도 절대자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일평생을 마법연구만 하면 미쳐버린다고 하더니...'

"미친 놈들..."

천마가 입을 열었고 로브를 입은 두 남자도 이내 로브를 추스리고 혼수상태에 빠진 안졸리냐졸려앞에 섰다.

둘이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용건을 말하지."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용건을 말하지."

천마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 없이, 두 남자는 서로 짜기라도 한듯 동시에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가 전할 말은 말이야."

"우리가 전할 말은 말이야."

천마가 인상을 찡그렸다. 두 남자의 입에선, 2만년간 살아온 천마조차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마가 신음성을 삼켰다.

"으음..."

두 남자가 또다시 말했다.

"어때? 우리의 제안이?"

"어떄? 우리의 제안이?"

"아마 거절할 수 없을 걸?"

"아마 거절할 수 없을 걸?"

* * *

보통 생전에 욕을 많이 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고 나면 욕하는 목소리가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전부가 그런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반대로 생전에 영웅이었던 사람이 죽으면, 그 영웅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대의와 대중을 위한 죽음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국방성 플라티곤은 중대한 발표를 했다.

약 100여시간의 혼수상태 끝에, 얼스를 구한 영웅 안졸리냐졸려는 결국 전사했다라는 발표였다. 안졸리냐졸려 중장은 1계급 특진하여 대장에 임명 되었고 얼스 최고의 무공훈장인 무궁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안졸리냐졸려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지게 되었으며 화장하여, 역대 영웅들만 안치된다는 국립 추모원에 안치되기로 결정되었다.

전쟁영웅이 되었던 '안졸리냐졸려'는 죽어서 그 이름이 더욱 빛나게 되었다.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고 그의 죽음을 기리는 촛불집회도 곳곳에서 열렸으며 전국에 분향소가 설치되어 고인의 넋을 기렸다.

유토피아 세계에는 추모의 물결이 일고, 얼스를 위해 몸을 내던진 젊은 영웅을 칭송하고 기리는 이야기가 가득찼다면 현실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세간을 가득 채웠다.

-유저의 죽음. 이 것이 가능한 일인가?

-유저의 죽음. 이 것은 실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침묵하는 유토피아. 프라이버시상 발설할 수 없어.

유토피아에선 중장인 안졸리냐졸려의 죽음을 발표했다. 안졸리냐졸려는 유저다. 현실세계의 사람이다. 그런데 죽었단다.

M매거진의 김나영은 윤석과 인터뷰를 가졌다. 비서인 수정을 통해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에겐 천금만금과도 같이 귀중한 것이었다.

"그 죽음이라는 것이 실제적인 죽음, 그러니까 캐릭터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아예 대놓고 그 중장 유저가 저라고 말씀하시지 그러세요?"

너무 흥분했던 김나영은 머쓱하게 웃었다가 이내 그녀 특유의 눈웃음을 짓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배시시 웃어보였다.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교태에 윤석은 피식 웃었다.

"중장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는 노코멘트로 하겠습니다. 괜찮나요?"

"아... 노코멘트군요."

김나영은 아주 잠깐 실망했다. 가장 먼저, 중장.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제 대장이 된 안졸리냐졸려의 행방에 대해 인터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패했다. 나영은 무언가 더 얻어낼 수 있을 것이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열심히 생각하는 그 모습을, 구태여 속이려 들지는 않았다. 일부러 더 열심히 생각하는 척 했다. 그녀는 상당히 미인이었고, 애교도 많았고 남자 다루는 법을 잘 알았다. 이토록 무언가 혼자서 끙끙대고 있으면 대다수의 남자들은 도움의 손길을 뻗쳐왔다.

윤석은 피식 웃었다. 일부러 더 낑낑대고 있는 게 보이긴 보이는데, 그렇다고 밉상은 아니었다. 계속 보다보니 정이라도 들었나보다.

윤석이 말했다.

"다만 공식적인 제 클래스는 박탈당한거나 다름 없죠. 사망선고를 받았으니."

나영은 수첩에, 윤석의 말을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받아적었다.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담담하신데요?"

"그러게요. 담담하네요."

윤석이 쿡쿡대고 웃었다.

"너무너무 궁금한데... 조금만 더 얘기해주실 수 없을까요?"

나영은 몸을 앞으로 빼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똘망똘망한 눈으로 윤석을 바라보며 빨대를 물었다. 차갑고 달달한 아이스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같아선 술집이라도 끌고 가서 소주 좀 먹인 뒤 입이라도 열게하고 싶은데, 이 남자는 도무지 그럴 틈도 안 준다. 애처가라 하더니, 이토록 망부석 같은 남자는 처음 본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전략을 바꿨다. 섹시보다는 귀여움이 이 남자에게 더 어필하기 쉬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최대한 편하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귀엽게 윤석에게 다가갔고 그 전략은 꽤 잘 먹혀 들었다. 딱히 윤석을 꼬신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녀는 여자로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전부 사용할 셈이었다. 그녀가 윤석에게서 원하는 건 '윤석의 말'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간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중장유저의 행방'이었다.

"글쎄요. 이 정도면 충분히 많이 말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윤석은 풀이 조금 죽은 듯한 나영을 바라보다가 선심쓰듯 한 마디를 더 했다.

"다만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유토매니아의 운영은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는 걸 귀뜸해드리고 싶네요."

"네?"

나영은 화들짝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갑자기 드는 바람에, 입에 물려 있던 빨대에서 커피 한 방울이 나영의 입술 옆에 묻어버렸다. 윤석은 나영에게 냅킨 하나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뭐 어차피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잖아요."

나영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윤석의 말의 속 뜻을 살펴보자면 '자신이 중장유저라는 것을 공표해도 상관 없다'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중장유저가 죽었다. 그러나 유토매니아의 경영에는 문제가 없을 거다. 라고 말하는 건 중장유저와 유토매니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과 다름 없다.

"말해도 괜찮아요. 제가 그 중장유저라는 거. 놀랄 일도 아니죠."

"그래도 그걸 직접 공표하시는 거랑은 또 다른 얘기일텐데요..."

"여기까지."

윤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영과 얘기하는 게 어느순간인가부터 재미있어졌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적극적으로 웃어보이는 모습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자신을 유혹하겠답시고 굉장히 도발적인 모습일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좋았다. 선심 써주기로 했다.

윤석은 걸어가면서 한 마디를 더 해줬다. 아마 나영이 제일 궁금해하는 말 일거다.

"나 바빠요. 유토피아 접속해야 하니까."

그리고 시계를 보더니 황급히 뛰어나가서 문을 닫았다.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아 큰일 날 뻔 했네."

윤석은 주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랑이 묻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았던 말을 했다.

"여보 자기 아가야. 약속을 지켜냈어!"

정작 주랑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수화기 저편에서, 윤석의 귀엔 사랑스럽디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약속?

"내가 그 왜 그랬잖아. 다른 여자랑 10분 이상 말 섞지 않겠다고."

-오빠 오늘 인터뷰하신다고...

"그래서 10분만에 끝내고 나왔어. 나 잘했지? 어서 칭찬해줘."

윤석의 목소리는 꽤 컸다. 문을 열고 나오려던 나영은 어이가 없어 손잡이를 잡은 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애처가라고 하더니 이건 정도가 좀 심한 것 같다. 핸드폰을 통해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헤헤! 아싸 칭찬 받았다!' 라며 좋아하는 그 모습은 세계적인 재벌이자, 슈퍼페리온의 명예총수이자, 유토피아의 영웅이자, 대한민국의 영웅인 김윤석과는 거리가 다소 멀어 보였다. 어이가 없고 한심하긴 한데.

"하..."

뭔가 부러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돼. 이딴 게 부럽다니!"

문 너머로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도 사랑해. 응? 어떻게 증명하냐고? 기다려. 밤에 보여줄게. 확실히 증명이 될 거야. 응응. 사랑해."

============================ 작품 후기 ============================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부터 완결까지 아무리 늦어도 3일 1연재는 하겠습니다. 약속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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