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플레이어-189화 (189/244)

00189  주인공이 짜증내게 되면  =========================================================================

* * *

윤석의 동체시력은 이제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2만년 전 천하 제일인이었던 천마의 힘을 가지게 됐다. 적어도 신체적 스펙은 천마와 맞먹는다. 안력을 집중해서 무언가를 꿰뚫어 보거나 천마처럼 수 만 km떨어진 곳을 보거나 하는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일반인들보단 시력이 훨씬 좋다. 그리고 중원인들이 말하는 기세에도 꽤 민감한 편이다.

‘저 거지... 세잖아?’

세다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개념이다. 약한 상대가 있어야 강한 상대도 있는 거고 강한 상대가 있어야 약한 상대도 있는 거다. 천마가 아무리 강하면 뭘하나. 싸울 상대가 없으면 강해봤자다. 마찬가지다. 윤석이 보기에 거지는 약골 수준이지만 유저들 수준으로 비추어 보면 꽤 고수다.

‘NPC인가...?’

얼스에만 위장 스킬포토가 있는 건 아니다. 모든 대륙에 다 있다. 아무래도 위장하는 스킬을 써서 유저로 둔갑한 것 같다. 패왕에서도 궁수 NPC를 하나 섭외했다더니 저 쪽은 거지 NPC를 하나 섭외했다.

‘흠...’

조금 세보인다. 수희가 히든클래스로써 엄청난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수희도 위험한 수준이다. 거북이 바위 앞. 두 세력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숫자는 패왕이 더 많다. 그러나 병력의 질은 무림맹이 더 좋은 듯 했다.

“치사하게 NPC나 끌어들이고 말야.”

윤석은 전장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 투덜댔다. 유저들의 싸움에 NPC들을 끌어들이는 걸 치사하다고 혀를 찼다.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법이다. 윤석은 이미 치사함의 정도를 벗어났다.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들 싸움에 기관 총 든 람보가 끼어든 격이다.

“애들이 제법 잘 싸우네 그래도.”

챙! 챙! 챙! 각종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수희가 이끄는 ‘제 1 행동대’는 미리 연습한 대로 진영을 맞추고 열심히 움직였다. 각자 익히고 있는 무공이 다르고 특성이 다르다. 한 발자국만큼의 거리 차이가 승리를 이끌어낼 수도 있고 반대로 패배를 만들기도 한다. 위치 선점, 공격수단, 공격 가능 거리, 회피 거리, 공격 타이밍. 대전에선 그 모든 것들이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아이씨 진짜!’

수희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그럭저럭 잘 싸우고 있다. 그런데 저 부대장이란 놈은 뺀질뺀질 대면서 구경이나 하고 있다. 훤히 보인다. 이건 게이밍센스가 없는 게 아니라 의욕도 없는 거다. 수희 눈으로 보면 어떻게해서든 안 죽으려고 전투에 참여 안하는 것만 같다.

수희는 정확하게 봤다. 다른 유저들과 다르게 윤석은 밍기적거렸다. 하드웨어는 초특급 슈퍼컴퓨터급이지만 소프트웨어가 따라주지 않는다. 이를 테면 램 60TB(테라바이트)

에 800GHZ 성능 CPU 2만개, 하드 1000TB 이상. 크기만 해도 200평 규모가 넘는 슈퍼컴을 능가하는 하드웨어지만 운영체제는 윈도우 98정도 쓰는 셈이다. 그나마 천마공을 패시브 상태로 돌려놓으면 윈도우 7까지는 업그레이드 되겠지만 사실상 윈도우라는 운영체제가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든 쉬운 OS이고, 전문가들에겐 큰 메리트가 없는 OS이기도 하다.

어쨌든 요지는, 윤석은 천마의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는 거고 저 거지로부터 수희를 지키려면 수희 근처에 밍기적대면서 눈치를 살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저 놈도 은근슬쩍 간만 보고 있네.’

보아하니 아주 열심히 싸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소꿉놀이 수준일테고, 그 소꿉놀이에 애써서 참여하고 싶은 어른은 별로 없다.

-그냥 다 쓸어버리지?

천마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계속해서 투덜댔다. 다른 유저들이 무시하고 수희가 눈치를 줄때면 혼자서 열 받아 했다. 2만년간 절대자로 군림해왔던 천마다. 그 힘을 이어받은 놈이 무시를 당하고 있으니 마치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모양이다.

-아오! 답답해!

그 때, 거지의 눈이 반짝 빛났다.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더러운 술병에 입을 대고 술을 꿀꺽꿀꺽 넘긴 뒤, 술병보다 더욱 더러운 소매로 입가를 슥 닦았다.

“여기 이런 보배가 있었네.”

거지가 수희를 발견했다.

“아해야. 나랑 놀자꾸나.”

윤석은 동체시력만 좋은 게 아니라 청력도 좋다. 단순히 소리가 많이 들리기만 하는 것이면 청력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의 귀란 신기한 것이어서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에만 집중하는 기능이 있다. 다른 소리는 노이즈로 인식되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은 굉장히 좋은 청력을 가지고 있었고 거지의 말도 똑똑히 들었다. 그리고 청력보다 더 좋은 건 천마공이다.

윤석이 어딘가에서 봤었던 만화책의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했다.

“너는 이미 죽어있다!”

비록 패시브 상태의 천마공이지만 그것만 해도 엄청난 능력이다. 일반인의 펀치력과 프로 보디빌더의 펀치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가끔 어떤 보디빌더는 복싱을 배워 프로라이센스를 따기도 한다. 프로자격을 얻으려면 기존의 프로와 싸워서 심사위원들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프로보디빌더의 무지막지한 괴력이 담긴 펀치 한 방에 현직 복싱선수들이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가끔씩 있다. 그만큼 신체 자체가 내는 힘은 무력에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하다.

프로보디빌더쯤은 가볍게 쌈싸먹는, 천마심공(천마심법, 천마공)으로 단련된 육체를 가진 윤석이다. 가볍게 수도로 때려죽였다. 무림맹에서 마음먹고 초빙한 거지 NPC는 이름 한번 밝히지 못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너무 쉽게 죽였다는 거다. 아무도 그 거지가 고수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전투는 어찌어찌 이겼으나 힘 대 힘의 싸움이었으니만큼 그 피해가 양쪽 다 꽤 컸다. 지금 당장은 본진으로 쳐들어가지 못할 만큼 말이다.

수희는 어이가 없다. 싸우느라 제대로 못 봤는데 어떤 거지같은 유저 하나를 처리하는 걸 봤다. 엄청 약해보이는 유저였다. 그걸 해놓고선 저렇게 실실 웃고 있으니 있던 정나미마저 다 떨어지는 기분이다. 그건 다른 유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약한 상대 하나 운 좋게 잡아놓고서 우쭐대고 있는 모양새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결국 수희는 폭발했다.

* * *

은미는 중간에서 굉장히 난처해졌다.

“빼! 빼! 빼! 빼! 나 그런 놈팽이랑 절대 같이 못 있겠어!”

“그, 그게...”

“나야 그 놈팽이야! 선택해. 츄즈 츄즈 츄즈! (* Choose: 선택하다)!”

“그, 그게... 어쨌거나 이기면 되는 거지?”

“이기려면 그 놈팽이말고 초고수를 영입해 달란 말이야.”

아니면 오빠한테 말해서 스나를 이쪽 팀에 넣어서 끌어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번 해봤다. 그런데 오빠한테 부탁하면 괜히 또 으스댈 것 같아 그 방법은 최후로 미뤄두기로 했다.

“하여튼 네 사랑을 시험해 보겠어! 그 놈팽이 바보 천치를 강퇴( * 강제퇴장) 시키지 않으면 세상에서 제일 심한 욕을 해주고 말테다.”

“해삼 멍게?”

“그, 그거보다 더 심한 욕 있어.”

수희는 정곡을 찔린 듯 말을 더듬으며 더 심한 욕을 생각해야만 했다. 은미는 중간에서 난처해하다가 이내 윤석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일반적인 대기업 기준에서, 사원이 회장 혹은 사장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유토매니아의 경우는 조금 특별했고, 은미 역시 윤석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편은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다는 게 이럴 때엔 좋았다.

은미의 말을 듣고 난 윤석은 흐음... 난처하긴 난처하겠네.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요기 팀이 공적치 제일 많이 가져가면 되는 거잖아?”

은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길드전 끝내지 뭐. 그럼 이유비인지 리유비인지 하는 여자애도 이길 수 있고 길드전도 이기고. 안 그래도 슬슬 질려가던 차였어.”

윤석은 유토피아에 접속했다. 천마의 성지에 들어섰다. 살아남은 5천의 엘리트 마교 npc들이 윤석을 볼 때마다 고개를 숙인 채 극도의 예를 취했다. 윤석이 지나갈 때까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윤석은 npc들을 불러 모았다.

대광장이다. 윤석이 10미터 높이 위에서 아래를 둘러봤다. 마교인들이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오와 열을 맞추어 전혀 흐트러짐 없이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라? 숫자가 더 많아진 거 같네? 원래 이래 많았나?”

갈무혁 장로가 앞으로 나섰다. 역시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고개를 조아렸다.

“곳곳에 은신하고 있던 자랑스런 마인들이 계속해서 모이고 있습니다. 또한 천마의 존엄한 명을 받아 진성지의 흑살대와 적살대를 불러냈습니다.”

그러고보니 다른 npc들과 조금 다른 npc들이 있다.

-내가 생각해도 마교놈들이 진짜 멍청하단 말이야. 그 정도 위급상황이었으면 흑살대 적살대 다 불러서 써도 됐을 텐데.

천마는 비밀연공실에서 연공을 하던 중이었다.(실상은 역천의 대법을 치르기 위해 밀실에 숨어든 거다.) 아무도 가까이 못 간다. 정파에 의해 마교가 아작이 났으면 천마를 부르러 갈 법도 하건만 그러지 않았다. 천마가 연공실에 있을 때엔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게 법이고, 마교인들은 그걸 미련하게도 지켰다.

흑살대와 적살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부대는 근골 좋은 아기를 선택해, 갓난 아기부터 각종 영약과 훈련을 통해 오로지 살인만을 위한 도구로써 키워진다. 이 두 부대는 천마의 직속부대이며 천마의 명 없이는 ‘진성지’라 특별히 명명된 특수한 진법 내 지역에 거주하며 하루하루 지옥 같은 훈련을 받는다.

만약 적살대와 흑살대가 정파인들의 침입시에 힘을 발휘했다면 승패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번에 천마가 ‘모든 마교인’들을 불러 모으라 했으니 적살대와 흑살대마저 모인 거다. 적살대와 흑살대는 각각 50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000여명의 전력이 합세했다.

윤석이 귀를 후볐다.

“혁거세야. 너 또 뭐 숨긴 거 있냐 없냐?”

생각지도 못했던 적살대와 흑살대 병력이 생겼다. 이 곳은 천마가 2만년간 관리해왔고 다스려왔던 땅이다. 뭔가 더 있을 것 같다.

-그런 게 뭐가 있겠냐!

“원래 그런 거 있잖아. 천마 쯤 되는 거물은 지하실에 엄청난 보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든가... 2만년씩이나 살았으면 심심해서 보물 수집 한 100년쯤 해볼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면 어디 숨겨놓은 금맥이 있다든가.”

천마는 그런 것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윤석은 피식 웃었다. 엄청난 보물같은 건 원래 기대도 안했다. 마교 npc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이거 써.”

고스트필드 스킬포토를 나눠줬다.

1000여명의 정예 npc들이 고스트필드 스킬포토를 받았다. 안 그래도 엄청나게 강한 마교 npc들이 건오퍼의 스킬을 이어받았다. 기습은 밤에 이루어졌다. 고스트 필드를 쓴 6천명의 대병력이 이동했다. 그 인원이 이동하는데도 소음이 전혀 일지 않았다.

그날 밤, 길드전은 그냥 끝났다. 무림맹 상주 인원 몰살. 무림맹 근처의 모든 목격자 몰살. 증거도 전혀 남지 않았다. 아예 그 땅에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은신에 능한 초고수급의 NPC들인데 거기에 배틀필드의 도움까지 있었다. 무림맹에 침입하고 유저들을 몰살시키는 건 땅 짚고 헤엄치기보다더 훨씬 쉬웠다.사족을 덧붙이자면 윤석은 어제 "치사하게 NPC나 끌어들이고 말야.”라고 말했었다.

마지막깃발탈취는 윤석이 맡았다.

“천마야. 이거 어떻게 하면 폼나게 부수냐?”

이 깃발은 자체 H/P와 방어력이 있어서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도 못 낸다. 고수 유저들이 합심해서 2일 밤낮동안 공격을 퍼부어야 겨우 탈취가 될 정도다.

천마가 콧방귀꼈다.

-대충 쳐.

============================ 작품 후기 ============================

"2만년씩이나 살았으면 심심해서 보물 수집 한 100년쯤 해볼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면 어디 숨겨놓은 금맥이 있다든가"

꿈(금)은 ★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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