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2 천마산으로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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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아는, 윤석이 마도사와 전쟁을 벌일때부터 윤석의 편에 서왔다. 말하자면 첩자노릇을 충실히 해줬다. 자신의 마도사 직위가 박탈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이다. 그게 완전히 100퍼센트 호의는 아니었나보다.
기분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거네.'
오히려 100퍼센트 호의였을 때보다 마음의 부담이 덜해졌다. 수희를 굳이 밀어내고 -비록 결과적으로 사황성주의 제자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따내기는 했지만- 설아를 부팀장으로 앉힌 것에는 설아의 호의에 대한 감사에 의미도 어느정도 담겨 있었던 셈이다.
어쨌거나 결과론적으로 살펴보자면 모두가 윈윈이다. 설아는 연봉 2억의 고등학생이 되었고, 수희는 사황성주의 제자가 되었다. 게다가 자신은 길드 퀘스트를 클리어했으며 천마의 몸까지 얻게 됐다.
그냥 천마도 아니고 2만년 묵은 천마의 영혼이다. 원래부터 천하제일인이었던 천마가 2만년동안 갈고닦은 기술을 고스란히 전해받은 거다.
"암탑주 자크리드가 직접 만나고 싶대. 지금 완전 발광 중이야."
"암탑주?"
준장, 소장일때는 스케일이 좀 작았다.
해봤자 유저 마도사들이나 판타리아 유저 1억명 정도와의 전쟁정도였는데 중장이 되고 나니 스케일이 커졌다. 사황성주, 천마등을 만나다보니 이번엔 암탑주란다.
기본적으로 육체적인 무력만 놓고 보자면 중원인이 가장 강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도사와 강호 중 누가 더 강하냐고 묻을 때, 대답하기를 주저한다.
마도사가 더 강하다는 사람도 있고 강호가 더 강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만약 경지라는 것이 있어서 -상급 npc 기준으로-똑같은 경지의 마도사와 강호가 싸운다면, 마도사가 이긴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론이었다.
일반적으로 '같은 경지 -무공과 마법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으나 호사가들은 같은 경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에 이르기까지 강호보다 마도사가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한다. 보편적으로, 몸 쓰는 일보다 머리 쓰는 일이 더 고급이란 말을 많이 한다. 고급이란 말은 '어렵다'라는 말과도 어느정도 통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도 그러한 것은 비슷하게 적용된다. 현장에서 직접 뛰는 실무자들보다, 위에서 관리하는 관리자들 혹은 도면을 설계하는 설계자들이 더 고소득이며 더 고급 인력으로 간주되곤 한다. 이 예가 비록 마도사와 강호의 차이를 드러내는 좋은 예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일정한 경지에 이르는데 마도사가 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암탑주 자크리트라..."
마도사. 저번에 한 번 보긴 봤었다. 사마디스라는 화탑 마도사였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사마디스는 상급 마도사는 아니었다. 마도사라고해서 모두가 경천동지할 능력을 가진 건 아니었으니까. 유저들이 기피하는 '잔소리꾼'정도에 불과한 NPC였다.
그러나 암탑주는 다르다.
"지금 바로 보고 싶다는데?"
"응?"
윤석은 이상함을 느꼈다.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지금 바로 보고 싶대."
"지금 바로 보고 싶다고 말한 거 맞아?"
"응. 그런데?"
"너랑 내가 어떻게 말이 통해?"
그제서야 설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본래 얼스인과 판타리아인은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킬킬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야 내가 바로 위대한 마도사 자크.. 뭐더라 내 이름이?"
주위가 어두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어두운 방으로 옮겨온 것 같은 기분이다.
"이봐. 내 이름이 뭐지?"
설아가 대답했다.
"자크리트요."
"그래. 내가 바로 위대한 마도사 자크리트요이기 때문이지. 환영해. 내 공간에 들어온 얼스인은 처음이군. 아주아주 흥미로워. 흥미롭고 말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자신을 위대한 마도사 자크리트요라고 소개한 남자는 상당히 작았다. 끽해야 윤석의 허리춤밖에 오지 않는 왜소한 체격을 가진 꼽추였다. 하얀색 수염이 굉장히 길어서 땅바닥에 질질 끌렸다. 실성이라도 한듯 계속해서 킬킬킬 웃는데 그 소리가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이런이런... 함부로 건들면 안 되겠어. 몸 안에 뭘 박아 놓은 거지?"
자크리트는 윤석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윤석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봤다. 턱수염만 긴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도 길었다. 눈을 완전히 가리는 앞머리 사이로 자크리트의 희멀건 눈동자가 번득였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세상에나! 얼스인 주제에 마기를 가지고 있어? 천마의 에고스톤 뿐만 아니라 천마의 힘을 그대로 흡수했잖아?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흥미로워! 아주아주 흥미롭다고!"
자크리트는 킬킬킬 웃어댔다.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쉴새없이 박수를 쳤다.
"자. 그럼 어서 내게 에고스톤을 보여줘."
자크리트의 입술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윤석은 조금 찝찝해졌다. 마도사들이 반쯤 미치광이란 말은 듣긴 했는데 이건 정도가 심한 것 같다. 이 NPC를 과연 믿어도 될까 싶을 정도다.
천마석을 꺼내들었다.
"제기랄! 나를 가둬두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빌지 않았나!"
"시끄러워."
천하를 호령했던 천마가 씩씩대다가 이내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영겁의 시간동안 갇혀 있는 그 괴로움은 아무리 천마여도 버티기 힘들었다.
수만 km 밖에서 7km가 넘는 흑룡을 만들어 함대를 공격하며 바다를 위협하던 천마의 위용은 온데 간데 없었다.
"내가 이렇게 부탁하지. 제발 부탁이니 날 다시 처박지는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 * *
암탑의 탑주는 마법연구실에 틀어박혔다.
엄청난 흥미거리를 찾았단다. 소식을 들은 화탑주 피닉스가 자크리트를 찾아왔으나 자크리트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게 마도사들의 생리다. 마법연구에 미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외곬수들.
그러면서 남이 마법연구를 한답시고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면 화를 내는 특이한 종자들이 많다.
"제길! 암탑을 부숴버리고 말테다!"
보통 고위 NPC들의 성격을 미쳤다고 많이 표현한다. 현자라고 불리는 마도사도 있기야 있지만 대부분은 치매 걸린 노인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그만큼 성격이 괴팍한 경우가 많았다. 피닉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야이 빌어먹을 자크리트! 암탑을 내가 싸그리 불태워 버리겠어!"
천마의 영혼이 담긴 '천마석'이라는 것을 연구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기회는 마도사들이 꿈꾸고 또 꿈꾸는 기회다.
피닉스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때 이상한 놈 하나가 보였다.
"어라...?"
신기한 놈이었다. 아무리 봐도 얼스인 같은데 이상한 기운을 품고 있다. 암탑에서 걸어나오는데 무슨 태산 하나가 쿵쿵 걸어다니는 느낌이다.
피닉스는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이봐."
피닉스가 윤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랬다가 으악!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바닥에서 몇 바퀴나 굴렀다.
어린 아이가 어른을 치면 별로 아프지 않다. 그러나 어른이 어른을 치면 아프다. 같은 원리다. 방어에 대한 준비를 미리 했다면 타격을 입지 않았겠지만 피닉스는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입에서 피를 쏟았다. 그는 얼른 치유마법 스펠을 외웠다.
윤석이 버럭 소리쳤다.
"야 인마! 다시 인벤토리에 처박히고 싶어?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 위대한 천마의 힘? 까고 있네. 한번만 더 내 허락없이 이런 짓 하면 다시 처박아버릴테니까 각오해. 농담 아니야."
여긴 암탑 바로 앞. 보아하니 마도사 NPC다. 이런 곳에서 마도사 NPC와 시비가 붙어서 좋을 게 전혀 없는데 천마란 놈이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힘을 과시했다. 그래놓고선 이게 바로 천마의 힘이다! 라며 허세를 -아무리 방심한 상태라해도, 화탑주를 날려버린 능력을 과연 허세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렸다.
보아하니 마도사의 상태는 금방 나아졌다. 꽤 고위 마도사인 것 같았다. 무슨 마법을 쓰는가 싶더니 금방 안색이 좋아졌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꽤 고위 마도사가 아니라 파괴력으로는 거의 최강이라는 화탑의 화탑주다.
"이, 이봐. 나와 대화를 해보자고."
말이 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일단은 도망치는 게 나을 것 같다.
'이크!'
윤석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게 아니지! 가슴에서 날뛰는 천마기를 아래쪽으로 내려! 아니! 아니! 어우 답답해! 그게 아니라 아래쪽! 위가 아니라 아래!
* * *
무기강화는 유토피아인들에게 익숙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암탑주 자크리트가 행한 것은 단순한 무기강화의 개념이 아니었다. 에고스톤으로 '안졸리냐졸려'를 강화시켰다. 안졸리냐졸려라는 캐릭 자체를 아이템으로 취급했다는 소리다.
이른바 신체강화 같은 것인데, 이 것은 전무후무한 경우였다.
상태창을 확인하거나 H/P, M/P를 확인하는 것은 그만뒀다. H/P와 M/P가 ???로 표시된다. 모든 능력치가 그랬다. 안 그래도 영웅이었던 천마가 2만년을 살아오면서 축적한 능력치를 흡수했을 뿐더러 그 영혼이 봉인된 강화석을 몸에 박았다.
이 강화석을 '물리적인 의미'로 박았다는 뜻이 아니다. 암탑주는 '보석'이라는 형태에 연연하지 않았다. 어차피 에고스톤은 영혼이 봉인되어 있는 보석일 뿐이다.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영혼이 중요한 거다.
암탑주는 세기의 연구를 진행했다. 보석에 담긴 에고를, 보석이란 형태에 벗어나 '무형'의 상태에 묶어둘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물론 약한 에고의 경우는 얼마든지 선례가 있었지만 이번엔 무려 천마의 영혼이었다.
그리고 그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암탑주는 침을 질질 흘리며 방방 뛰었었다.
"이로써 에고를 담는 그릇의 형태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고야 말았지!"
보석에 담긴 에고를 윤석의 몸 전체에 덧씌웠다. 윤석이 원할때에 그 에고를 다시 보석에 넣을 수 있도록 했다.
천마석으로 신체를 강화한 것에 대한 부작용이 하나 있기는 있었다. 뭘하든지간에 천마의 잔소리가 뒤따라서 매우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 잔소리가 결코 허튼 잔소리는 아니었다.
윙카는 시속 300km이상의 속도로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윙카를 타지 않아도 그 이상의 속도로 달릴 수 있다. 천마의 말대로 호흡을 가다듬고 뛰었을 뿐이다.
-이게 바로 천마공의 위대한 점이지. 다른 그 어떤 잡스런 무공도 필요없이 내가 원하는 무공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거야. 심지어 경공마저도.
사황성주는 수 만가지(혹은 그 이상)의 스킬을 사용한다. 그러나 천마는 단 한가지의 무공을 근간으로 한다. 그 하나를 바탕으로 모든 공격과 방어를 펼쳐낸다.
-그걸 바로 심즉공의 경지라고 하는 거야.
천마의 잔소리는 윤석에게 뼈가 되고 살이되는 잔소리였다. 윤석은 천마심공의 운용과 천마공을 천마에게 직접 배우게 된 셈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마의 모든 것은 이미 몸 안에 가지게 됐고, 그걸 제대로 다루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천마가 제안했다.
-이봐. 그래서 천마산에는 언제 갈거지?
윤석이 인상을 찡그렸다.
"천마산을 왜?"
천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천마가 없는 천마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도대체 왜 내 아까운 무공을 너같은 멍청이에게 전수해주는지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윤석이 피식 웃었다.
"너 요즘 제법 기어오른다?"
- 노, 농담이다. 어쨌거나 천마가 없는 천마교는 있을 수 없어. 나 외에 다른 천마는 이 몸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천마는 즉시 꼬리를 내렸다. '무의 감옥'에는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 생각해봐. 10억의 천만교도가 네 밑에 있게 되는 거지. 게다가 중요한 건... 이제 천마의 힘을 가진 인간이 자신을 자신을 옥죄던 천마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거야.
천마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천마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2만년의 노력과 시간이 담긴, 천마의 사명이었다. 그게 윤석에 빙의- 편의상 빙의로 표현하기로 한다- 함으로써 일정부분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천마가 닦달했다.
- 어서 가자고. 어서 가서 천마임을 입증해. 10억의 천마교도를 얻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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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치킨은 그저 거들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