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든 플레이어-179화 (179/244)

00179  그저 한숨 잤을 뿐입니다  =========================================================================

* * *

천마는 즉시 대법을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에 힘을 크게 소모하는 바람에 육신의 고갈이 더욱 빨리 진행됐다.

골격과 무공에 대한 재능따윈 상관 없었다.

그는 천마고, 명성만 높으면 그만이다. 성자쯤 되는 인물의 육신. 그것도 이번에 나타난 당나귀성자쯤 되는 인간이면 자신을 옥죄는 천마력으로부터 얼마간 벗어날 수도 있다. 그 역시 처음이라 어느정도 자유로워질지는 예상할 수가 없다. 다만 최소 한달 이상, 어쩌면 그 이상 천마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예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났으면 좋겠군.'

전쟁을 일으켜 영웅을 만든다. 전쟁 후에는 영웅이 한 두명씩은 꼭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게 무림맹주나 사황성주가 될 가능성이 가장 컸고 말이다.

천마는 천기를 읽을 수 있다. 천마가 얘기하는 천기란 바로 '유토피아 시스템'과 일맥상통하는 말이기도 했다. 유토피아 시스템이 인정한 '당나귀성자'를 찾아내는 건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영안이 온 중원을 훑었다. 며칠을 샅샅이 뒤졌다. 당나귀 성자를 찾아냈다. 정파쪽에서 선행을 베풀고 있다더니 사황성쪽에서 기척이  감지됐다.

그는 바로 대법을 실행했다.

대법을 실행하고 3일 이내에 상대의 정신을 제압해야 한다. 그 3일은 이전 육체의 소유권을 얻어내고 통제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이것 역시 여러번의 경험으로 알아낸 사실이다.

예전 소림신승의 육체를 얻으려 했을 때에 3일 가까이 걸렸는데 천마 자체가 소멸될 뻔 했다.

그래서 한계선을 '3일'로 잡고 언제나 정신을 지배해왔다.

소림신승때를 제외하면 모두 수월했었다. 전부 3일이 안 걸렸다.

"그럼 시작해볼까?"

* * *

일시적인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접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윤석은 시스템 알림을 들었다. 일시적인 시스템 오류란다. 어차피 나가려던 참이다. 마침 나가야 할 일도 생겼다. 주랑이와의 데이트다. 결혼하고나서 오히려 더 사이가 돈독해졌다.

주랑은 언제나 윤석에게 정성을 아끼지 않았으며, 윤석은 주랑을 눈 속의 보물보다도 더 아꼈다. 돈과 지위, 사회적 명성 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서 인간 대 인간으로도 참 잘 만났다.

어느덧 완공된 최신식 주차타워 앞에 섰다. 타워 관리인이 윤석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오늘은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베네노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리인이 버튼 몇 개를 눌렀다. 베네노는 현재 2층에 주차되어 있다. 2층에 주차되어  습도와 온도, 태양광까지도 관리받으며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베네노는 1층까지 자동으로 운반되었다.

타워의 도어가 열리고 번쩍이는 은색광채의 베네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이잉-!

소리와 함께 베네노는 지정된 위치까지 천천히 움직여서 윤석 앞에 섰다.

그 와중에 주차타워를 이용하는 시민 한 명과 만났다.

"사장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윤석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주차타워를 설립하고나서 1,2층을 제외한 모든 층을 지역주민들에게 무료로 개방해주었다.

"사장님 덕분에 요즘 저희 동네가 살 맛 납니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이다. 그래서 윤석은 기분이 좋았다.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숙여보였다.

보통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들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직까지 그런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윤석의 얼굴을 아는 지역 주민들도 꽤 많아졌고 그들은 윤석에게 먼저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건네곤 했다.

연희동은 윤석 한 명이 들어옴으로 인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탈바꿈 되는 중이다. 어지간한 국가기관보다도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서 이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고 있는데 그 덕을 보는 건 당연히 지역주민들이었다.

존경받는 부자되기 힘든 한국이지만, 윤석은 충분히 존경받는 부자였다. 적어도 연희동과 밀양에서는 말이다.

윤석은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 주랑이 생각보다 늦었다. 다리가 아파서 베네노에 기대어 기다렸다.

텔러들이 퇴근 하는지, 젊은 여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밖으로 나왔다. 윤석을 발견한 그들은 공통적인 반응을 보였다.

먼저 윤석을 본 다음 찔끔 놀라고, 그 다음은 황급히 표정을 고쳤다. 자신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가장 아름다울 법한' 미소를 띄우고서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스스로 '가장 단아하다고 생각될 법한' 자태로 고개와 허리를 숙여보이고서 윤석과 어떻게든 눈이라도 한 번 마주쳐 보려고 한다는 거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나오는 텔러들마다 족족 그러한 반응을 보이니까 윤석은 착각을 좀 했다.

'내가 그새 잘생겨졌나?'

물론 아니라는 건 안다. 자신이 사장이고, 저들은 자신에게 잘보여야 하는 위치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면 조금 슬픈 일이 아닌가.

"알아요, 나도 잘생긴 거."

윤석은 킥킥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사를 한건지 매우 앳되어 보이는 여자 하나가 얼굴이 붉어져 후다닥 뛰어갔다.

민혁이 텔러들의 외모를 보고 뽑는 건지, 그도 아니면 워낙에 잘난 여자들이 많이 지원을 해서 그런건지는 알 수 없다만 텔러들은 전부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주랑의 방침 덕에 그들은 제복이나 정장을 차려입지 않고 언제나 편한 복장을 입곤 했는데 덕분에 어느 한 여대 캠퍼스 연극영화과나 모델과 등의 입구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예쁜 텔러들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여자가 하나 있었으니.

"마누라!"

"오빠!"

주랑은 매일 보는 윤석의 얼굴이 또다시 반가웠는지 활짝 웃었다. 윤석이 두 팔을 벌렸고 주랑은 주위에 누가 없는지 눈치를 살핀 뒤에 쪼르르 달려가 품에 폭 안겼다. 주랑을 마치 고귀한 여신처럼 대하는 부하텔러들이 본다면, 그 중에서도 신입텔러들이 본다면 까무러칠지도 모를 일이다. 고고하고 차분하며 너무나 아름다운 나머지 도도해보이기까지 한 주랑이다. 부하텔러들 앞에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윤석 앞에서는 아니다. 아무리 주랑이 잘났어도 이제 한 남자의 아내고, 그 남자에게만큼은 조금은 의지하고 싶고 애교도 부려보고 싶다.

"나 많이 보고 싶었어?"

"엄청 많이요."

주랑은 발꿈치를 들어 윤석의 볼에 살짝 키스하고선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얼른 떨어졌다. 텔러들이 또 건물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요즘은 고등학생들도 뽑아?"

아까도 앳된 텔러를 봤다. 그런데 이번엔 앳된 정도가 아니라 척 봐도 고등학생이다. 어쩌면 중학생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니구요... 컴퓨터 관련 IT 고등학교 아이들인데 실습왔어요."

그러고보니 민혁이 그런게 있다고 말해준 적이 있는 것 같긴 했다. 잘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 뿐이지. 요즘 마교와의 전투 퀘스트때문에 회사에 영 신경을 못 썼다. 무척 신기한 건, 사장인 윤석이 유토매니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전혀 무리 없이 잘 운영 된다는 것이다.

"애들 치마가 저게 뭐냐?"

윤석은 눈살을 찌푸렸다. 개중에는 치마를 너무 줄여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다니는데 저 여자아이는 저게 예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요즘은 저런게 유행이래요."

"별게 다 유행이네. 차라리 벗고 다니지?"

"사실 그걸 바라는 거 아니에요?"

"들켰네?"

윤석이 피식 웃었다. 고등학생들이 아무리 그 특유의 탱글탱글함과 생기발랄함을 뽐내도 주랑 앞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 어지간한 연예인의 외모도 한참 발 밑으로 보게 만드는 주랑이다.

그리고 외모는 둘째 치고서 생각해봐도, 윤석 눈에는 주랑보다 예쁜 여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인다.

주랑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데,

"오빠!"

누군가 윤석을 불렀다. 상당히 귀에 익은 목소리다.

"너 누구냐?"

"우씨! 아저씨! 늙어서 기억도 못해!"

소녀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귀엽게 보이려고 하는건지, 그도 아니면 그냥 표정이 그런건지는 모르겠다만 상당히 귀여워 보이긴 했다. 투정 부리는 조카를 보는 기분이랄까.

"농담이야. 너도 실습왔냐?"

"응."

"넌 어차피 우리 사원인데 뭔 실습?"

"몰라, 학교에서 하래."

애초에 유토매니아는 IT 계열의 회사는 아니다. 다만 사회 전반적으로 퍼진 이미지 자체가 워낙에 훌륭한 기업이어서, 학생들이 종종 찾아오곤 했다.

"근데 애들이 안 믿어."

"뭘?"

"내가 무팀 부팀장이라는 거!"

윤석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너 설명 듣기는 했냐?"

"무슨 설명?"

안 들은 게 확실하다. 유토매니아 산하조직인 무팀, 판팀, 현팀은 '대외비'다. 죽자 살자 감춰야 할 비밀은 아니지만 어쨌든 새어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건 약관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내용이다.

주랑은 따뜻하게 웃으면서 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설아부팀장님은 집에 가시면 계약서를 한 번 읽어보고 오셔야 해요."

"네?"

"숙제에요."

"숙제 싫은데..."

숙제란 말에 설아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가 이내 '히잉...'소리와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비록 오빠를 노리고 있긴 하지만 주랑언니 팀장님은 너무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인거 같아."

"주랑언니 팀장님이 뭐냐. 그냥 언니라고 하든지 팀장님이라고 하든지. 회사에선 팀장님이라하고 밖에선 언니라고 해."

네네, 네네, 알겠습니다요! 설아는 그렇게 대답한 뒤 빠이빠이!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이내 설아는 친구들 무리에 둘러싸였다. 아마도 '너 어떻게 저런 대단한 분과 그렇게 친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와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을 거다.

"저 드라이브 시켜주시게요?"

"응. 요즘 바쁘다고 밖에 못 나갔으니까."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랑의 귀에 속삭였다.

"차 세워놔도 아무도 안 오는 곳이 있대."

"네?"

"게다가 내 차는 밖에선 안이 안보이잖아?"

주랑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무,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리고 먼저 베네노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말똥말똥 윤석을 쳐다봤다.

"오빠 안 타세요?"

윤석이 헛웃음을 지었다.

"너 앉은지 1초밖에 안 지났어."

* * *

서울의 야경을 만끽하며 교외로 나갔다. 주랑과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얘기를 나눠도 좋고,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아도 좋았다. 연애 초기에는 대화가 끊기면 초조하곤 했었는데 이젠 침묵도 하나의 대화 수단이다.

말은 오가지 않아도 서로의 체취를 느끼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음 자체에 큰 위로를 받고 행복해한다. 그게 날이가면 갈수록 깊어지는 것 같다.

한적한 길가에 윤석은 차를 세웠다.

"창문 조금만 내릴까?"

주랑은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저었다. 아무래도 어떤 남자들은, 약간의 스릴과 함께 즐기는 섹스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남편이 조금 그런 성향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떡해요?"

"괜찮아. 어차피 아무도 안 와."

장소 미리 다 물색해놨다. 주랑과 차에서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야외에서는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은 언제나 익숙한 자극보다는 새로운 자극에 더 쉽게 흥분한다. 윤석의 그 것이 부풀어 올랐다.

주랑의 손이 조금씩 움직였다. 낮의 주랑과 다른 밤의 주랑이 슬슬 내면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이 조금 빨라지는가 싶더니 지퍼를 내리고서 성을 내고 있는 윤석의 물건을 손으로 쥐었다.

"오빠 벌써 이렇게 커지면 어떡해요?"

주랑은 장난스레 웃고는 그 곳에 살짝 키스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내가 먼저 해줄게요. 오늘은 빨아달라고 말 안해도 돼요."

"난 그런 말 한 기억이 없는..."

윤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주랑은 뭘 하든지 금방 배욱 금방 익숙해진다. 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뭐든지 잘해낸다. 밤일도 그랬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주랑의 스킬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중이다.

밤이 깊어갔다.

현실에서 하루가 지나는 만큼, 게임 시간으로는 3일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참고로 설명하자면 천마가 대법을 펼친 뒤 정신을 제압하는데 걸리는 시간의 최대한계선이 바로 3일이다.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정신을 제압해야하는데 제압할 정신이 없다라는 사실이다.

동쪽으로부터 동이 텄다. 주랑은 윤석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서 잠들어 있었다. 윤석은 다짐했다. 다시는 차에서 하지 않기로. 도대체 왜 사람들이 카섹, 카섹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불편하기만하고 힘들기만하다. 상대가 여배우 뺨치는, 사랑해 마지않는 주랑임에도 불구하고 이건 완전히 중노동에 가까웠다.

아침 8시.

주랑이 악! 지각할 거 같아요!라는 비명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사장님이랑 업무차 나왔다고 하면 돼. 내가 사장이야."

"그래도..."

"그리고 지금 빨리 가면 늦진 않을 거야."

매사에 완벽에 가까운 주랑은 무언가를 굳게 다짐한 듯 말했다.

"오빠 안전이 우선이니까 천천히 가요."

윤석도 유유히 핸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신간발매.

그 남자의 절대 지지 않는 방법.

한줄리뷰 독자평

여긴 어디인가.나는 누구인가. 왜 아무도 없는가 ㅡ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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