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9 Death No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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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가 끝났다. 오늘은 팀장이 조금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글쎄요..."
"뭐 짐작가는 거 없어?"
예은과 정숙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랑이 전원 참석하라고 말한 건 처음이다. 게다가 티타임이 아니라 컨퍼런스라고 했다. 잘은 몰라도 티타임 보다는 조금 무거운 주제가 아닐까 싶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갔다오면 되지 뭐."
"그래도 뭔가 팀장님 눈치 보여서..."
평소의 주랑이라면, 화장실같은 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사실 그런 거 눈치 보는 것 자체가 웃긴 거다. 그런데 지금은 가기가 좀 그랬다.
맨 앞에서, 주랑이 입을 열었다.
"저는 여러분들이 처음 이 곳에 들어올 때, 여러분들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억 나시죠?"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텔러들은 주랑의 말을 경청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의 행동에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했고 여러분을 존중했으며 최대한 여러분들의 편의를 봐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이제 슬슬 다들 눈치 챘다. 이거 뭔가 있다.
"그런데 그 믿음과 신뢰가 철저하게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라 무척 힘드네요."
텔러들이 조금씩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찔리는 게 어디 한두개 이던가.
"저는 여러분들의 녹취기록을 단 한번도 검사하지 않았습니다. 기록을 들춘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요."
그 말이 나오자 몇몇 텔러들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몇몇 텔러들의 표정은 좋아졌다. 수희에게 직접적으로 질타를 가했던 예은의 경우는, 표정이 좋아졌다. 정숙에게 귓속말했다.
"녹취기록... 그거면 됐네."
"그러게."
현실보다도 더 현실같은 가상현실이 발전한 세상이다. 예은이 믿는 거 하나 없이 고객에게 쌍욕을 퍼부었을 리 없다.
그런데 주랑이 말했다.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기회를 드리고자 합니다. 제 믿음과 신뢰에 작은 상처라도 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자진해서, 지금 당장 제게 개인적으로 메일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텔러들의 각 자리에는 컴퓨터도 놓여있다. 초소형 컴퓨터이지만 문서작업이나 인터넷 서핑을 하는데에는 전혀 무리 없는 기종이었다.
"30분 드리겠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기회에요."
주랑은 전에 없이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 물었다.
"휴가쓴 사람 포함인가요?"
텔러가 200명이나 되면 보통 몇 명은 휴가가 겹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은 겹치지 않았다. 이런 날은 사실 별로 없는데, 그건 눈엣가시같은 신입사원을 골탕먹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람 몇 명이서 한 명 바보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텔러들 몇명만 입 맞추면 이번에 새로온 김수희인지 이수희인지하는 그 맹랑한 계집애를 확실하게 엿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휴가 쓴 사람은 한 명밖에 없네요. 그 분께는 제가 따로 연락 드릴 거에요. 저는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기회 드리는 거에요. 자신이 책임져야할 일을 고백하거..."
"어래래래, 이게 무슨 일이래?"
민혁은 두 눈을 꿈뻑 거렸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분위기가 냉랭한 것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있구나 싶다.
민혁은 뒷통수를 긁적거리다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하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오랫동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직감했다. 주랑은 지금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민혁이 말했다.
"야. 윤석아. 오늘은 날이 아닌갑다."
"뭔 소리야?"
"몰라. 주랑이 지금 엄청 화났고 텔러들 엄청 긴장하고 있던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 무슨 일이 있나봐."
"주랑이가 화를 낸다고?"
윤석은 일단 놀랐다. 주랑이는 평생 화 한번 안 낼 것 같았는데 의외다. 윤석은 약간 속고 있는 거다. 주랑은 화를 자주 낸다. 그러나 윽박지르거나 욕하는 형식이 아니라 부드럽게 돌려서, 지혜로운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한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네가 나빠'가 아니라 '어떠한 것 때문에 내가 슬퍼요'와 같은 식이다. 전자와 후자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상대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거고, 후자는 자신의 감정상태를 표출하는 거니까. 후자가 주랑이 화를 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애초에 주랑은 윤석에게 불만이 별로 없다. 그렇다보니 윤석은 주랑이 화를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처음 몇 초간은 놀랐고, 그 다음 몇 초는 열받았다. 나중에, 수희의 말을 빌리자면 '초딩 같이 덜떨어진 모양새'로 불만을 표출했다.
"감히 어떤 놈이 우리 주랑이 열받게 했어?"
* * *
대외적으로 수희는 병가를 냈다. 갑작스럽게 아파서 하루 쉬는 거다. 누군가 들어왔다. 워낙에 조용했다보니 시선이 절로 쏠렸다. 한 남자와 여자였다.
예은은 옳다구나 싶었다. 지금 메신저를 통해 약간의 계획을 짰다. 신입사원 이수희가 팀 내 분위기를 어지럽히고 나이가 너무 어려서인지 고객 응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 업무 적응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자기 잘못 적으라니까 남 잘못만 실컷 적었다. 예은 혼자가 아니고 예은과 친한 몇 몇 텔러들이 합심했다.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예은 혼자서면 모를까, 여러명에서 하면 힘이 생기기 마련이다. 단, 상대가 김수희가 아닐 때면 말이다.
얼른 타자를 쳤다.
- 이수희 병가 낸 거 맞지?
- 내가 알기론 병가였는데. 완전 멀쩡해 보이는데?
- 아픈 애가 화장은 무슨. 어이가 없네 진짜.
뭔가에 꽂히면 그 것만 보이고 다른 것들은 안보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하나에 미치도록 파고들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지만, 넓은 시야를 갖기는 힘들어서 외곬수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예은이 지금 그런 경우였다.
지금 이 시간 회사에, 사원증과 같은 것도 없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그냥 들어올 수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는 전혀 생각을 안했다. 수희만 보여서 아예 인지를 못했다. 텔러들 중엔 윤석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정말 운이 나쁜 건, 예은이 윤석의 얼굴을 모른다는 거다.
윤석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보기에도 지금 주랑은 화가 많이 났다.
"오...아니 사장님?"
윤석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는 아무래도 멋진 CEO, 존경받는 기업인이 되기엔 글러 먹었다.
"누가 우리 주랑이 열받게 했어?"
수희는 사실 들어올 때 조금 기 죽었다. 이유는 잘 몰랐다. 주랑이 앞에 서있는데 괜스레 주눅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윤석이 주랑의 얼굴을 감싸쥐듯, 얼굴에 손을 댔고 그 순간 주랑의 얼음장 같은 분위기는 풀려버렸다. 예의 그 따뜻하고 천사같은 주랑언니로 돌아왔다. 분명 똑같은 얼굴 똑같은 사람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변해버렸다. 신기한 노릇이다.
그 사이, 수희는 예은과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움찔했다. 에은이 웃는 모습이 참으로 아니꼬웠다.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 하여튼 괴상한 기분이었다.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데 도대체 뭔 짓을 하는건지 모르겠다.
"사장님. 지금 중요한 컨퍼런스 진행 중이에요. 6시면 퇴근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괴롭히는 놈 다 나와! 말만 해! 오빠가 다 무찔러 줄게! 와 같은 매우 유아틱한 모습을 보이며 별로 같잖지도 않은 위로를 던지는 윤석을 향해, 주랑은 한 번 생긋 웃어보였다.
윤석은 찝찝해하면서도 결국 밖으로 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윤석은 주랑에게 꼼짝도 못한다. 스스로 꼼짝도 못한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해서 그렇지.
"무슨 일이지? 수희야 너 아냐?"
"응. 알아."
"근데 6시 이후에 말해줄게. 언니가 말한 다음에."
안다고 말했던 건 실수였다. 애초에 김수희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 * *
6시가 지났다.
주랑은 메일을 검토했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메일이 몇 통 오지도 않았으니까.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한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다. 나머진 침묵으로 일관했고 10명의 사람이 한 명을 욕했다. 신입사원 이수희가 팀의 분위기를 망친단다. 마지막 기회를 줬다. 그런데 그걸 버린 거다. 주랑은 할 땐 하는 여자다. 윤석이 아는 것처럼 마냥 착하기만 하지 않다.
수희는 자신의 Death Note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지 예측하지 못했다.
"최예은씨. 이정숙씨. 이화영씨. 조혜원씨. 오연수씨....... 내일부터 얼굴 뵙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예?"
몇몇이 벌떡 일어섰다. 주랑은 상담팀장임과 동시에 인사관리도 맡고 있다. 윤석과 민혁은 주랑에게 전적으로 권리를 부여했다. 즉, 사람 고용하고 자르는 건 그녀의 주관이란 소리다.
"말도 안 돼요!"
"저는 분명히 마지막 기회를 드렸어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납득할 수 없어도 하세요."
주랑은 자신 앞에 놓여져 있는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방금 호명된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완전히 신경을 꺼버릴 듯한 모양새다.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이들의 대표격인 최예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유토매니아가 어떤 회사인가. 죽을때까지 등 비비고 살아도 될 그런 회사다. 어지간한 집의 며느리로 들어갈 때도 꿀리지 않는 직업이다.
"유토매니아의 인사관리는 제가 담당해요. 저는 더이상 최예은씨가 필요하지 않아요. 필요없는 인력은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필요 없다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필요가 있고 없고는 제가 정해요. 스스로를 잘 생각해보세요. 어째서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는지."
주랑은 단호했다. 예은의 마음이 급해졌다. 주랑이 언급하지도 않은 말을 꺼냈다.
"녹취기록을 확인해보시면 될 거 아니에요!"
"뭔가 찔리는 게 있으신가봐요."
주랑은 그제서야 예은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예은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걸 알아두세요. 녹취기록을 없앨 수 있다면 다시 복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해고당하는 건 납득할 수 없어요!"
최예은이 억울해했다.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적어도 그 순간은, 예은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잘못해놓고도 자기가 잘못한지 모른다.
문이 열렸다.
"사장이 직원 필요 없다는데 무슨 납득이 필요해요? 죄송하다고 벌벌 기면서 한 번만 봐달라고 싹싹 빌어도 고용해줄까 말까구만."
사장이다. 평소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데 갑자기 나타났다. 얼굴이 가관이다. 인상을 잔뜩 썼는데 별로 아름답지 못한 모양새다. 씩씩댔다. 이미 Death Note에 대해 들었다. 거짓말 못하는 수희가 다 털어놨다.
저 여자도 이쯤 됐으면 대충 상황 파악을 해야 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 싹싹 빌면, 어차피 좋게는 못 지나가겠지만 그래도 조금 덜 나쁘게 지나갔을 거다.
"듣자듣자하니까 도대체 못 들어주겠네. 이봐요. 당신 제가 언제 제발 내 돈 받아주시고 일해주세요 했어요? 납득? 내가 왜 당신을 납득시켜야 돼요? 내가 당신 납득시켜가면서 월급 줘야 돼요? 이거 안 될 아가씨네. 필요 없다는 말 안들려요? 귀 없어요?"
사장 열 받았다. 그나마 반말 안하고 쌍욕 안한게 다행이다. 데이트가 자꾸 늦어져서 뿔도 났다.
"하,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에요?"
윤석은 군필자다. 병장이 이병 지적했는데 이병이 '하지만 이러이러해서 이랬습니다'하면 그 순간부터 이병은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핑계를 댄다는 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속마음이 숨어있는 거다. 진짜로 잘못했으면 이유따윈 없다. 그냥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면 족한 거다. 그런데 예은은 자꾸만 핑계를 대고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것도 '죄송합니다' 이후에 변명을 하는게 아니고 그저 대놓고 변명이다. 그게 윤석 눈에 훤히 보였다.
덕분에 윤석 제대로 분노했다.
'다 죽었어 늬들!'
갑작스런 윤석의 등장에 텔러 전원이 긴장했다. 주랑은 그래도 착한 편이었다. 평소 이미지도 있을 뿐더러 항상 예의를 갖췄다. 평소 이미지가 워낙에 상냥하고 유순하다보니, 정말 화가 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기보다는 관리자이기 때문에 화난 척 하면서 이런 자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사장은 아니었다.
사장은 말 그대로 열 받아 보였다. 정중한 말투의 주랑과 달리 말투도 거칠었다. 기분 나쁘다는 걸 대놓고 팍팍 드러냈다.
"난 절차같은 거 몰라요."
만약 윤석이 전문 경영인이고 경험많고 노련한 사람이었다면 각종 절차를 밟아가며 내부감사를 확실히 진행하고 충분한 물증을 잡은 뒤 해고과정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윤석은 그런 거 모른다. 지금 수틀렸다. 그게 중요한 거다.
200명의 긴장한 텔러들 앞에서 윤석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전원 해고입니다."
텔러들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황당한 말이라 이해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모양이다. 윤석은 인상을 더 찡그렸다.
"이해가 안 돼요? 전부 짤렸다니까요? 법이고 나발이고, 항의든 뭐든 해봐요. 단, 그 이후는 책임 못집니다. 뭐해요? 퇴근들 하세요 영원히."
바깥에서 귀 기울이고 듣고 있던 민혁은 순간 문을 열고 뛰쳐들어갈 뻔 했다. 야이 미친 사장 새끼야! 아무리 열받아도 그렇지 개념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억눌러 참았다. 그래도 친구놈이 그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믿었다.
============================ 작품 후기 ============================
독자: "헐. 너무 막던지시네. 전원 해고? 너무 생각없이 말하신 듯. 너무 무리수 같은데..."
윤석: "괜찮슴. 내가 주인공임여. 이 소설이 망하지 않는한 내가 갑임니당."
주랑: "전 오빠만 믿어요.♡♡♡"
민혁: "주랑아! 이럴 땐 좀 말려!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내일 일 안할거야?! ㅠㅠ"
주랑: "^^♡♡♡"
민혁:"(절망하며)생각이 있긴 있는 거냐? 계획 있는 거 맞지...? 그렇지...?"
윤석:"...ㅇㅅㅇ?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