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8 Death No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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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생일을 챙기지 못하고 지나갈 때도 가끔 있기 마련이다. 어떤 날에는 아예 생일인지는 모르고 살 때도 있다. 윤석 같은 경우는 군대에 있을 때 그랬다. 정신없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날짜를 확인하게 됐고 아 맞다!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20대 중반 이후론 생일을 거하게 챙겼던 기억은 없다. 그냥 대부분의 평범한 다른 가정들이 그러하듯 가족들끼리 모여 생일 케이크나 한 번 자르고 말았다. 윤석은 개인적으로 생일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었다.
"울 오빠가 기념일 같은 걸 살뜰하게 챙기는 성격은 아니잖아."
"난 매일매일이 기념일인걸."
어휴. 어련하시겠습니까. 수희는 저도 모르게 허- 하고 웃어버렸다. 주랑이 진심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어이 없었다.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매일매일이 기념일 같을 수 있을까.
"언니는 뭐 준비 할거야?"
"비밀!"
주랑은 배시시 웃었다.
"언니는 존재자체가 반칙인데 그 눈웃음 지으며 거의 사기수준인 거 알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언니는 아마 언니가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 있을걸?"
상대가 남자라면 말야. 언니는 진짜 반칙이라고! 그냥 달라고하면 눈이 뒤집어져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 같단 말이야 언니는! 수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주랑은 수희의 예상을 뛰어넘는 답변을 내놓았다.
"난 이미 다 가졌는걸."
"허..."
다 가졌단다. 그게 돈이나 명예. 그런 게 아님은 잘 안다.
"오빠 따위를 갖느니 난..."
그러고보니 오빠를 대체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말하려하자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나, 난 사탕을 더 사랑하겠어!"
수희의 말에, 주랑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자애로운 미소로 그저 수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수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하여튼 오빠를 세상의 전부를 합친 것만큼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근데 그게 진심이라서 더 화나."
이건 도대체 이길 수가 없다. 어떻게하면 저렇게 세상을 아름다운 눈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너도 꽤 많이 모았을텐데..."
굵직한 이벤트만 12차례 참여해서 11번 상금을 타냈다. 평균 실수령액이 약 300만원쯤 되었으니 대충 3000만원 가량의 상금을 탄 거다. 수희는 스스로를 '잘하는 게 이 것 밖에 없어'라고 자책하고 있지만 사실 이 일을 생업으로 하는 유저들도 있는 만큼 상당히 대단한 거라고 할 수 있었다.
"응... 오빠가 용돈 주는 것도 열심히 모아서 지금 한 3500만원 정도 모은 것 같아."
"대학생이 3천만원 모은다는 건 진짜 대단한 거야."
"오빠에 비하면 멀었는데 뭐."
그리고 아이템도 몇 개 처분할 거다. 판타리아에서도 네임드 유저이다보니 꽤 좋은 아이템들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처분하면 적어도 천만원은 나올 것 같았다.
"차 사려고 그러지?"
"으, 응? 아, 아니?"
수희는 손사래를 쳤다. 눈에 띄게 당황했다. 수희는 황망해하면서 말을 돌렸다.
"그, 그보다 어, 엄청난 걸 준비하고 있어!"
"엄청난 거?"
"으, 응."
엄청난 걸 준비 중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다. 그런데 유토매니아의 텔러들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수희가 보기에 아주 배가 불렀다. 배가 부르고 부르고 계속 부르면 언젠가 터질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로 했다.
주랑은 그거 참 궁금한걸?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조심스레 말했다.
"수희야. 언니도 부탁이 있는데..."
* * *
결국 수희는 주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사회경험이 없고, 그토록 큰 돈을 한꺼번에 써본 적도 없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주랑이었다. 주랑과 함께 차를 하나 구입했다. 엄청나게 값비싼 외제차는 아니었다. 3천만원 선에서 해결봤다.
그랜드 카니발이다. 그리고 편지도 썼다. 어차피 서프라이즈 파티는 물 건너 갔다. 주랑이 출근 전에 찾아와 모닝키스와 함께 럭셔리 여행권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돈으로 줄 수 있는 건 의미가 없다. 윤석은 주랑의 선물을 굉장히 좋아했다. 모닝키스는 그에게 최고의 아침을 선사해줬고 여행권은 그 최고의 아침보다 더욱 최고의 아침을 선사해줄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 분명했으니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주랑은 윤석에게 귓속말 했다.
"오빠한테 웨딩드레스 보여주고 싶어요."
보통 여자들은 드레스를 고를 때에 예랑 -예비신랑을 줄여 쓰는 말-과 함께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주랑은 윤석과 가지 않았다. 그녀는 윤석이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존중했다.
윤석은 물론 주랑과 함께 있는 시간 자체를 즐거워하기는 했으나, 쇼핑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왕에 즐거운 시간을 보낼거면 윤석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더 즐겁게 지내고 싶은 게 그녀의 속마음이었다.
그리고 윤석은 물건을 보는 안목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주랑은 수희와 함께 웨딩드레스를 골라봤고 그 중 마음에 드는 세 벌만 추려서 오늘 보여주기로 했다. 괜히 윤석의 눈에 똑같아 보이는 드레스들로 윤석을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수희의 선물에 윤석은 어이가 없었다.
"차 키?"
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좋아해야말지 말아야할 지 모르겠다. 예전 놀이공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럼 니가 사주던가'식의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그걸 진짜로 받아들였단 말인가?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일 열심히 했어."
"이벤트 참여?"
"......."
윤석은 수희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누가 차 필요하다디?"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차를 살까. 사실 이건 분명 기쁘다. 차라는 선물이 너무 황당하긴 하지만 그래도 동생이 마음써서 준비했다는데 기쁘지 않을 리 없다. 민혁의 말을 빌리자면 시스터콤플렉스에 가까운, 동생을 지극히 아끼는 오빠가 아니던가.
"오빠 화났어...?"
수희는 괜히 윤석의 눈치를 살폈다. 별로 기뻐하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아니. 화 안났어. 고마워. 고마운데, 다시는 나 몰래 싸돌아댕기고 하지 마라. 적어도 네가 결혼하고 할 때까진 내가 네 행선지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고맙다고 말하고 화도 안났다고 말했는데 언성은 좀 더 높아졌다. 수희가 우물쭈물대며 조심스레 대꾸했다.
"무섭게 왜 화를 내고 그래?"
윤석은 또 화 안났다고 주장했다.
"화 안났어. 안 났는데, 너 그 뭐야. 충청도에서 사고 났었다며? 작은 사고여서 다행이지 큰 사고였으면 어쩔 뻔 했어? 그렇게 몰래 돌아다니다가 진짜로 무슨 일 생겼는데 내가 너 어디있는지도 모르면 어쩔 거야? 엉?"
"화 안 났다며..."
수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가,
"안 났어!"
윤석의 말에 움찔 놀랐다. 주랑언니만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빠도 알고 있었나보다. 윤석은 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수희는 성인이고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지만 그래도 적어도 어딜 갈 때엔 얘기라도 하고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조금 생각해보니 왜 굳이 차키를 선물했는지 알 것 같다. '네가 사'라는 그 말에 산 것은 아니다. 조사에 따르면 수희는 그것보다 훨씬 전부터 이벤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너 일부러 큰 차 산거냐?"
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작아졌다. 본심을 털어놓으려니 좀 민망했다.
"맨날 주랑언니하고만 놀러 다니잖아..."
그러면서 윤석의 눈치를 살폈다. 윤석이 허- 하고 웃고 말았다.
"그니까 우리 가족이 전부 다 타도 될만한 커다란 차를 사서 선물했다는 거야? 같이 놀러 가자고?"
"저, 저차는 고속도로에서도 버스전용차선 쓸 수 있대...그, 그니까 안 막힐거야."
'차'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차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차를 타고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적어도 수희에겐 그랬다.
"나 스무살 될 때까지는 우리 가족들끼리 여름마다 같이 놀러갔잖아."
그게 2년 전이다. 2년 동안은 삶에 치이고 바쁘다보니 가족여행 한 번 제대로 못갔다. 이제 클만큼 컸겠다 그런 것 쯤은 전혀 신경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오빠도 진짜로 결혼하게 되고 나도 결혼하고 그러면... 서로 더 시간 없고 그럴 테니까..."
수희는 말하는 내내 민망한지 눈을 어디다 둬야할 지 몰라했다. 발가락을 꿈틀 거리는 것이 정말로 창피한 것 처럼 보였다. 윤석은 피식 웃었다.
"여행 한 번 가자."
"진짜?"
수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마터면 깡총 뛸 뻔 했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랬다가 이내 자신의 모습이 창피했는지, "흥! 하, 하나도 기대되지 않아!" 라고 말하고선 뒤로 팽그르 돌았다.
방을 향해 발걸음이 무척 경쾌해보였다. 경쾌한 정도를 벗어나서 하늘로 깡총깡총 뛰어오를 것 같았다. 그러더니 문득 멈춰섰다. 뭐가 그렇게 창피한지 거짓말했다.
"그, 그리고 나, 난 오빠가 물주니까 같이 가는 게 좋을 뿐이야!"
"물주 따로고 같이 가는게 좋은 거 따로지?"
물주라서 좋은 것과, 물주인것과는 별개로 같이 가는 게 좋은 건 다른 거다. 윤석이 쿡쿡대고 웃었다. 아침엔 주랑의 모닝키스와 여행권을 받았다. 저녁엔 주랑이 웨딩드레스 입은 것도 볼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수희한테 선물 받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수희가 중학교 시절이었으리라. 14살 아니면 15살쯤 되는 것 같다. 그 때 수희는 윤석에게 손편지를 썼었는데 내용이 대충 이러했었다.
- 추억을 만들어가는 그 소중한 시간자체가 너무 좋아. 그게 나한텐 최고의 선물인 것 같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경험하면서 쌓아올리는 추억의 탑은 행복으로 가는 길의 작은 열쇠가 아닐까?
그 때 윤석은 소리 죽여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제딴에는 열심히 감성을 살린다고 쓰긴 썼는데 윤석이 보기엔 좀 유치하고 오그라들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표현이 좀 웃기기는 해도 그게 15살 소녀의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15살 소녀는 어느새 22살이 되었고. 그 22살 숙녀께선,
"메롱이다! 메롱 약오르지 까꿍! 흥! 치! 퉤!"
라면서 문을 닫아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시뻘개진 얼굴을 부여잡고 침대위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거다.
윤석이 킥킥 웃었다. 저건 중학교시절보다 더 어려진 것 같다. 크게 말했다.
"다음주에 약속 다 비워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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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수희는 고민을 많이 해야만 했다. Death Note라는 걸 만들긴 만들었는데 오빠가 정말로 이걸 보면 혹시나 낙심하지는 않을까, 혹은 주랑언니가 괜히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많이 망설였다. 그렇다고 덮어두자니 이건 언젠가 곪고 곪아서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건 안 될 일이다. 수희는 주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혹시 오늘 시간 돼?"
걸어놓고서 아차, 싶었다.
"아니아니, 오늘 말고 내일!"
수화기 저편에서, 주랑이 배시시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눈을 반달로 만들고서 화사하게 웃고 있을 거다. 질투가 날래야 질투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예쁜 모습으로 말이다.
- 음. 내일 저녁에 볼까?
오늘 저녁은 웨딩드레스를 보러 간단다. 수희에겐 꿈 같은 얘기다. 주랑이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얼마나 이쁠지 상상도 안 된다.
"세상은 불공평해."
수희도 물론 예쁘다. 인기도 많다. 그러나 주랑처럼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이쁨'과 '아름다움'은 애초에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어쨌든 수희는 먼저 주랑과 상담하기로 했다. Dath Note엔 최근 2주일 동안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리스트에 오른 사람은 11명. 딱히 보고서의 형식도 아니고 공적인 자료도 아니었지만 그건 가히 살생부라 불릴 만 했다.
이 살생부가 불러올 여파가 어떨지 몰라 주랑과 먼저 상담하고서 오빠와 얘기하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오늘 예은이 접근했다. 아예 제대로 마음을 먹은 듯 했다. 오늘 일과 끝나고 잠깐 얘기좀 하잔다. 그런데 얘기를 하자는 그 분위기가 자못 살벌했다.
마침 오늘은 약속 없다. 오빠는 아마 주랑언니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저녁 늦게나 돌아올 거다.
"좋아요."
예은은 수희의 승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대답도 않고 수희를 한 차례 째려본 뒤 등을 휙 돌려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버렸다. 그녀는 낙하산 무서운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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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모였다. 주랑도 함께 했다. 주랑은 윤석을 포함한 윤석의 가족 모두에게 이쁨 받았다. 수희의 말을 빌리자면 '반칙급의 존재'인 주랑은 이제 거의 윤석의 아내 취급을 받는다. 어쨌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오빠! 촛불 불어!"
"응? 으응?"
윤석이 다소 바보 같아졌다. 주랑의 웨딩드레스를 보고나서 정신이 혼미해졌단다. 저게 자신을 약올리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건지 아니면 실제로 혼이 쏙 빠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데 수희는 왠지 저 모습이 정말로 혼이 나가서 저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그런 게 가능할까 싶지만서도 그게 하필이면 또 주랑이다. 주랑이 언니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생일파티는 단촐하게 끝났다. 선물을 받고 케익을 받았다. 그리고 윤석이 다음주엔 가족여행을 가는 겁니다! 라며 여행을 제안했고 모두가 동의했다.
주랑을 집에 데려다 주고 온 윤석은 수희의 방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어제꼈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냐?"
"뭐가?"
수희는 무언가를 황급하게 숨겼다. 넋이 나가 완전 바보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았나보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확실히 있다고 대답할 수 있다. 사실 그녀는 지금 매우 분노한 상태다.
예은이라는 여자 때문에 그렇다. 이 바닥에서 몸 제대로 붙이고 회사생활 하고 싶으면 그만 나대고 착한척 그만 하란다. 신입주제에 건방떨지 말란다. 한번만 더 눈에 띄거나 거슬리면 회사에서 쫓겨나게 만들어 주겠단다.
유토매니아는 분명 꿈의 직장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거나 잘리는 걸 매우 두려워한다. 수희가 만약 보통 평범한 신입사원이었으면 타협했을지도 모른다. 다들 그러려니하는 거니까 그냥 모른 체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뭘 그렇게 숨겨?"
"이, 일기! 보지마! 보면 나 콱 죽어 버릴거야!"
"내 욕 썼냐?"
"다, 당연하지!"
윤석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너 아무래도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평소엔 둔하기 그지없는 둔탱이 주제에 이럴 때만 촉을 발동시킨다. 수희는 인상을 찡그리고서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런 거 없네요!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주무셔!"
윤석은 쿡쿡대고 웃었다. 오늘 주랑의 웨딩드레스를 보고 난 뒤라 매우 관대해진 상태다.
"하여튼 내 꼬꼬마 동생 괴롭히는 놈 있으면 이 듬직하기 그지없는 오라버니한테 다 일러. 내가 다 혼내줄게."
"어떻게?"
"응?"
"어떻게 혼내줄 거냐고?"
윤석은 흐음...눈을 감고 3초 가량 생각한 뒤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오라버님을 보게 될 거야. 호랑이보다 더 무서울걸? 크와앙!"
"술 마셨어? 왜 이래? 저리가!"
수희는 가까이 다가오는 윤석을 밀쳐냈다. 그런데도 윤석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수희의 방을 나가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주랑이 키스해줬다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해줬다거나 했을거라 생각한 수희가, 윤석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오라버님을 보게 될 거란다. 호랑이보다 더 무섭단다. 어이가 없다.
닫힌 문을 보며 메롱했다.
"헹! 퍽이나 무섭겠다!"
침대에 누운 수희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 * *
이건 의외였다. 주랑은 언제나 천사같고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같았었다. 주랑을 보고 있으면 요동치지 않는 깊은 바다 위를 따뜻한 태양이 연신 따스하게 비추고 있는 그런 이미지가 보였다. 적어도 수희한텐 그랬다.
"언니...?"
"고마워 수희야. 나한테 먼저 얘기해줘서 고마워."
주랑은 평소처럼 예쁘게 웃고 있었으나, 겉모습만 그랬다. 평소와는 다른 웃음이었다. 수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 평소 조용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운 법이다. 요동치지 않는 깊은 바다가 얼핏보면 잔잔해보이지만 그 안에는 소용돌이치는 해류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수희는 오늘 처음 알았다.
"언니 화 났어?"
"응. 아주 많이 났어."
주랑은 자신의 감정상태를 속이지 않았다. 솔직하게 아주 많이 났다고 대답했다.
"아니... 그니까 여기엔 내 사적인 감정도 많이 들어간 거고... 공식적인 자료도 아니고..."
"이거면 충분해."
수희가 작성한 Death Note. 이건 윤석보다 주랑을 먼저 화나게 만들었다.
"수희야. 이건 언니가 가져가도 될까?"
평소에도 주랑을 반칙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오늘은 더했다. 주랑이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 것 같았다. 당연히 줘야만 할 것 같았다.
"으, 응."
주랑은 수희로부터 Death Note를 전해받았다. 주랑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참. 그리고 계속 일 할거야? 오빠 선물도 샀고... 이제 돈 더 필요하지 않잖아?"
"으, 응. 근데 경험 삼아 며칠만 더 하면 안 돼?"
"음..."
주랑은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일은 휴가 써."
"응?"
주랑은 수희의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수희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주랑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내심 좋아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무섭다.
"수희한테 흉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정정한다. 좀 무서운 게 아니라 아주 많이 무서웠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일은 휴가쓸게."
* * *
오전 8시 45분.
일과 시작하기 15분 전이다. 이 때가 되면 모든 텔러들이 간단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체조를 하면서 몸을 푼다. 모두가 즐겁게 일을 시작한다. 유토매니아 같은 직장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휴가도 많고 급여도 좋고 진상도 별로 없고 눈치 봐야할 상사도 몇 없는데다 복지마저 훌륭하다. 오죽하면 꿈의직장으로 불릴까.
주랑이 들어왔다. 텔러들은 주랑을 좋아한다. 주랑이 이 곳에 있어서 자신들이 편하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사장과의 관계도 알고 있다. 주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텔러들의 편의를 이렇게까지 봐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실 그런 게 아고 인격적으로도, 주랑은 충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 했다.
교만하지 않고 언제나 겸손했으며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쏟았으며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업무능력도 탁월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 주랑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일과 후 컨퍼런스있습니다."
주랑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다들 눈치챘다. 그래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컨퍼런스가 있는 날은 거의 없다. 보통 5시에 칼퇴근이다. 그리고 평소와 좀 다른 게 있었다. 주랑은 평소에 '회의'나 '컨퍼런스'란 말 대신 '티타임'이란 말을 주로 쓴다.
텔러들의 편의를 위해 퇴근시간을 최대한 보장하지만 그래도 1주일에 한 번, 1시간 정도 그룹을 나누어 티타임을 가지면서 텔러들끼리의 친목을 도모했다. 물론 강제는 아니었다. 바쁜 일이 있다고 빠져도 상관없는 티타임이었다. (티타임이 끝나도 6시다. 대부분의 텔러들은 참여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전원 모두 참석해주세요. 오늘 컨퍼런스 불참은 딱 두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용납하지 않겠어요. 첫 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낄 만큼의 갑작스런 질병 발발. 둘 째. 4촌 이내 친인척의 갑작스런 죽음. 이 외에는 100퍼센트 참석을 요구합니다."
순간 다들 아무런 말도 못했다.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늘 뭔가 다르다. 태풍 전야 같은 기분이었다. 한편, 주랑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휴가를 사용하게 된 수희는 간만에 집에서 빈둥거렸다. 그런데 빈둥거리는 사람이 수희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야. 오늘은 안 돌아다니냐?"
"오늘은 백만년만에 한 번 있는 한가한 날이야."
수희는 쇼파에 누워 다리를 천장쪽으로 들어올렸다. 사실 심심하면 유토피아에 접속하면 된다. 수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윤석의 눈치를 살폈다. 윤석은 방금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어대고 있었다.
윤석은 귀찮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야. 너 심심하면 오빠랑 좀 나갈래?"
"어딜?"
수희가 들어올리고 있던 다리를 내렸다. 먹이를 앞에 둔 아기고양이처럼 재빠른 속도로 움직여 쇼파에 앉았다. 그리고나서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듯,
"무, 물론 즐거운 제안은 아니지만 오빠가 말한다면 생각을 한 번 정도는 해볼게."
윤석은 수희에게 가까이 걸어가 정수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시끄럽고 한 시간 있다가 나갈거니까 준비해."
"어디 가게?"
"다음주 여행계획도 짜고 밥도 먹고. 그냥 이것 저것."
윤석은 무성의하게 대답하다가 문득 생각 난 듯 말했다.
"아참. 회사도 들러야 되는데. 있다 잠깐 같이 들렀다가 주랑이랑 같이 저녁도 먹자. 오늘은 특별히 내가 점심부터 저녁까지 풀코스로 쏜다. 어때? 고맙지? 내가 좀 위대해 보이냐?"
갑자기 심각해진 표정의 수희를 보면서 윤석은 수희의 어깨를 콕콕 찔러댔다.
"어서 대답해. 위대하잖아. 위대한 오빠다! 어서 인정하라고!"
윤석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자꾸만 유치한 장난을 걸었다. 그러나 그 유치한 장난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유치한 오빠에게 동생인 수희가 성인다운 훈계를 내려주었다.
"저리가! 이 유치빵꾸 똥빵꾸야!"
윤석이 대답했다.
"반사!"
수희는 할 말을 잃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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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두편이었는데 사건 진행이 좀 루즈해지는 것 같아 한편에 꾹꾹 눌러담았습니다. 헤헤-
26KB에요! 두편으로 나눠서 연참할까도 했지만 용량늘리기라고 혼날까봐 훌쩍.
제가 재미는 장담 못하겠는데... 대신에 생색낼 수 있는게 용량 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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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회사도 들러야 되는데."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