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7 Death No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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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는 사회경험이 별로 없다. 그래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고객한테 친절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게다가 여기는 다른 곳도 아니고 윤석이 운영하는 회사다. 이 회사는 직원들의 복지가 무척 좋다고 이미 평판이 자자하다. 들어오고 싶어하는 기업 1순위고 텔러들의 편의를 위해 아이디 인증까지하고 나서야 전화연결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복지만 좋은게 아니라 페이도 좋다. 세상에 편한 회사가 얼마나 있겠냐마는 유토매니아는 굉장히 편한 축에 속하는 회사였다. 성과에 대한 압박도 없을 뿐더러, 눈치를 봐야하는 간부급 인사가 몇 명 없다.
급여 좋고 복지 좋고 거기에 눈치 봐야할 상사가 몇 명 없는 곳이 바로 유토매니아다. 그 유토매니아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어디 한 번 눈 똑바로 보고 얘기해봐요."
하라면 누가 못할 줄 알고! 수희는 발끈했다. 그냥 신입사원이 아니다. 그녀는 이수희가 아니라 김수희다. 글자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그건 엄청난 차이다. 신입사원 김수희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제가 틀린 말 했어요? 고객한테 그렇게 쌍욕하는 경우가 어디있어요?"
신입사원이라 당연히 기 죽어서 빌빌 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예은은 아주 잠깐 찔끔 놀랐다가, 자신이 놀랐다는 사실을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 더 목소리를 높였다.
"쌍욕 나오게 하니까 쌍욕을 하는 거죠. 텔러일 얼마 안해봐서 모르시나본데, 며칠만 더 해봐요. 그딴 말이 나오시나.신입 주제에 왜 그리 설쳐요?"
제대로 일을 시작한지는 겨우 하루밖에 안됐다. 그 동안 아직 진상이라고 할만한 손님은 보지 못했다. 애초에 장난전화는 아이디 인증을 통해 대부분 걸러지는데다가 괜히 진상을 부렸다간 접근이 제한된다. 그렇다보니, 유토피아가 새로운 세상인 지금 시점에서 유토매니아에 괜히 이유없이 진상 부리는 고객은 별로 없었다.
수희는 여전히 기죽지 않았다.
"기분 좀 나쁘면 사람 죽여도 돼요?"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내가 언제 사람 죽였어요? 이거 참 웃기는 아가씨네."
보다못한 문승미가 옆에서 말렸다.
"예은씨. 참아요. 제가 잘 얘기할게요."
수희와 다툼을 벌이던 예은은 인상을 팍 썼다. 승미는 사태를 진정시킨다고 한건데, 승미 때문에 수희는 더 기분 나빠졌다. 예은보고 참으란다. 아니 왜! 잘못한 건 저쪽인데 저쪽이 참아욧! 소리칠 뻔 했다.
예은은 한술 더 떠서 계속 툴툴댔다.
"신입사원 맞아요? 말투가 뭐 저래요? 사회생활 안해 본 티 팍팍 내고 말야."
예은이 투덜거렸고 승미는 수희를 살살 달랬다.
"수희씨. 이 쪽으로 와서 커피 한 잔 해요. 내가 살게요."
"커피 마시면서 제대로 좀 교육 시키세요!"
수희는 승미를 좋게 본다. 성격도 차분한 편이고 일도 열심히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승미가 중간에서 하도 난처해해서 잠깐 물러서주려 했는데, 예은이란 여자가 말하는 꼬락서니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제대로 교육 시키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잘못한 게 없었다. 생각해보니, 저 여자는 배가 부를대로 부른 것 같았다. 이를 바드득 갈았다. 어떻게 요리를 해줄까 고민하는데 승미가 말했다.
"수희씨. 그냥 모른 척 하고 넘어가는 게 나아요."
"어떻게 모른 척 해요? 저건 분명 잘못된 거 잖아요."
승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희가 열을 내는 걸 이해 못하지는 않는다. 사실 승미도 텔러가 고객을 막대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안 보여도... 아무래도 사람이 모인 곳이다보니까... 음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려나? 파벌도 생기고 세력도 생기고 그래요..."
"파벌이요?"
"그러니까... 음 사실 파벌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몰려다니게 된다 뭐... 그런 거에요. 수희씨도 알잖아요? 사람들이 모이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거."
안다. 그녀가 경험한 사회생활이라곤 학창생활이 거의 전부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그랬다.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몰려다녔다. 사실 학창생활의 그 것은 '파벌'이라고 말하기엔 좀 무리수가 있지만 어쨌든 무리를 이루긴 이뤘었다.
"흔히들 그러잖아요. 인간은 사회적인 생물이라고. 여자들은 특히 더 그렇잖아요. 여기도 하나의 사회고... 너무 곧이 곧대로 행동하려다보면..."
승미는 말을 아꼈다. 말 하기 어려워하는 듯한 모양새였지만 수희는 승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이가 어린 만큼 순수한 편이었다. 말을 빙빙돌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왕따 당할 수도 있다구요?"
그랬다. 왕따 비슷한 개념이었다. 인간은 관계 속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생물이다. 그 관계가 비틀어지면 정말 힘들어한다. 그리고 이런 꿈의 직장에서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건 정말로 불행한 일이다. 직장은 좋은데 사람관계 힘들어서 그만두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던가.
승미는 그걸 걱정해줬다. 그러나 수희는 그런 걱정 필요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이수희가 아니라 김수희다. 이수희는 몰라도 김수희는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섭다.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왕따 시키려면 시키라고 해요!"
수희는 화가난 듯, 승미가 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승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예은이란 사람은 이 그룹 내에서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승미도 아무말 않는 것이리라.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만약 수희가 윤석의 동생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화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녀가 윤석의 동생이라는 거다.
윤석 동생 김수희, 제대로 열 받았다. 그건 그건데,
"으캐캑! 으부아아!"
열 받긴 했는데 얼음이 목에 걸렸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창피하게도, 마침 커피를 마시러 올라온 예은이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깐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는데 이번엔 창피해서 죽을 뻔 했다.
점심 시간.
수희는 노트와 펜을 하나 장만했다. 매직으로 노트에 제목을 붙였다.
- Death Note!
* * *
"주랑아. 수희가 요즘 돈이 필요한가봐?"
윤석이 물었다.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네?"
주랑은 저도 모르게 조금 놀랐다. 수희가 유토매니아에 취직한 걸 알아차렸나 싶었다. 지원자가 넘치는데 한 명을 뽑았으면 그건 좀 형평성에 어긋난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 일부러 자리 하나를 더 늘렸다. 원래 와야할 사람을 못 오게 막은 게 아니라, 한 자리를 일부러 더 만든거다. 전자와 후자는 확실히 다른 문제다.
"그, 그게..."
"주랑이 넌 뭐 아는 거 없어?"
뜨끔했다. 그럴 리 없지만 윤석이 자신을 떠보는 것 같기도 했다. 윤석은 태평스레 말을 이었다.
"너도 잘 모르는 눈치네. 걔가 여기저기 싸돌아댕기고 있더라고. 상금 걸린 이벤트에 막 참여하고 다닌다나봐."
"도, 돈이 필요한가봐요?"
주랑은 눈에 띄게 말을 더듬었지만 윤석은 그 것을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그런가보다, 하고 별 생각 없었다. 사실 주랑이 거짓말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선의의 거짓말은 무척 잘하는 편이다. 연기를 해도 티도 별로 안 난다. 그러나 윤석 앞에선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석 앞에서 거짓말을 할 땐 티가 많이 난다.
"용돈을 좀 올려줘야 하나..."
수희를 위해 떡볶이 체인점을 하나 사들이긴 했었다. 그러나 명목상으로 사들였을 뿐, 유지와 운영은 전 CEO에게 그냥 맡겨놓았다. 수익의 일부만 받는 형식으로 운영 중이다. 나중에 수희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선물로 주려고 했다.
"한 달 50만원이면 충분하지 않아? 대학생 용돈으로..."
"글쎄요... 갑자기 뭔가 필요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주랑은 윤석의 눈치를 살폈다. 윤석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제서야 주랑은 배시시 웃었다. 윤석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안았다.
"오빠."
"왜?"
"오빠 지금..."
주랑은 애교를 잔뜩 담아 웃었다. 눈이 반달모양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초승달로 변해버렸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난 사람이어도 단숨에 화가 풀려버릴만큼 사랑스러운 눈웃음이었다.
"수희가 뭔가 어려운 일이 있는데 오빠한테 상의하지 않고 기대지 않아서 삐진 거에요?"
"그럴 리가."
"그래서 삐진 것 같은데요?"
주랑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계속 쿡쿡 웃다가 윤석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쪽 소리가 났다.
"저도 나이차이 많이 나는 오빠 있었으면 좋겠어요. 엄청 든든할 거 같아요."
"진짜로 있으면 엄청 불편할걸? 어릴 땐 얼마나 많이 싸웠는데."
"진짜 뜬금 없는 말인데요..."
주랑은 윤석을 볼 때면 언제나 그렇듯 예쁘게 웃었다. 혹자가 본다면 푼수같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주랑은 윤석을 보기만 하면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푼수같다고 놀려도 괜찮았다. 좋아서 웃음이 새어나오는건 별로 창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해요."
"진짜 뜬금없네."
윤석이 피식 웃었다. 뜬금 없다길래 얼마나 뜬금 없겠나했는데 진짜로 뜬금 없다. 윤석도 뜬금없이 말했다.
"빨리 결혼날짜 잡자."
주랑이 싫지만은 않은 듯, 그러나 약간 샐쭉해진 표정으로 윤석의 어깨를 톡 쳤다.
"정말 뜬금 없어요!"
* * *
수희는 어김없이 출근했다. 수희가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길래 주랑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수희는,
"안돼요 팀장님! 이건 정말 사적인 거란 말이에요!"
라면서 주랑을 거부했다. 주랑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자애로운 미소를 띄고서 미안해요, 하고 사과했다. 그 모습은 다른 텔러들에게 공분을 샀다. 주랑은 정말 이상적인 상사였다. 적어도 주랑이 앞에 있으면 모두가 일을 열심히 했다. 신입사원 주제에 팀장에게 저렇게 버릇없이 굴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많은 텔러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신입주제에... 건방지게...'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뒷담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특히 여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말이 더 빨리 퍼진다. 사람 평판 떨어뜨리는 건 일도 아니다. 수희의 평판이 무척 나빠졌다. 아무도 수희에게 먼저 와서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수희도 느꼈다. 텔러들이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저러나 상관없다. 오늘도 한 명의 이름을 추가했다.
< 이름: 이정숙
내용: 8월 20일. 오후 2시 20분. 욕은 하지 않았지만 굉장히 무례한 태도로 전화를 끊어버림. "아 알아서 하시든가요." 라고 했음. >
수희가 씩씩대다가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그 날, 복도에서 이정숙이 수희에 대한 뒷담을 하는 걸 수희가 들었다. 경험도 없고 실력도 없는 주제에 이사인 강민혁과 그렇고 그런 관계여서 들어왔다나 뭐라나. 말도 안 되는 낭설이다. 수희는 좀 더 열받았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한 문장을 더 추가했다.
< 이름: 이정숙
내용: 8월 20일. 오후 2시 20분. 욕은 하지 않았지만 굉장히 무례한 태도로 전화를 끊어버림. "아 알아서 하시든가요." 라고 했음. 내가 민혁오빠랑 잤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퍼뜨림. >
아무도 모르게, 수희가 또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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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민혁오빠랑 잤다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퍼뜨림.
헬게이트 오픈!!!